100화
* * *
“약속이 틀리잖아!”
산도발이 비명을 질렀다.
“풀어 준다고 했잖아! 협조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잖아! 이 비겁한 여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한낱 싸구려 악당 새끼들도 나처럼 고분고분하게 협조하면 목숨은 살려 준다고!”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율리아를 손가락질하고, 큰소리로 욕하고, 끝내는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제발요. 네? 시녀님, 제가 이렇게 빌게요. 발바닥을 핥을 수도 있어요. 제 전 재산도 다 드릴게요! 상인연합 말고, 해적 새끼들은 소탕 안 하세요? 노예 상인은요? 제가 다 안내할 수 있어요!”
바바슬로프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반항하는 산도발을 가볍게 제압해서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작은 조각배에 던져넣었다.
“안 돼, 안 돼! 제발!”
율리아가 서 있는 곳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남부 함대의 군함이었다. 군함치곤 크기가 좀 작았는데, 카루스의 말로는 먼바다의 경계를 순찰하는 쾌속선이라고 했다.
율리아는 군함 위에 서서 산도발을 내려다보았다.
조각배는 아주 작았다. 조그만 파도에도 뒤집힐 것처럼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이날은 바람이 거세 파도가 높은 날이었고, 산도발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차라리 노예선에 팔아 달라고 했잖아. 시녀님! 내가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이건 살인이야! 사람 죽이고 나서 네가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유령을 보게 된다고!”
“너는?”
율리아가 물었다.
“너도 그랬어? 사람 죽이고 나서, 밤마다 원한 맺힌 유령에게 시달렸어?”
“그, 그……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런데 왜 그랬어.”
율리아는 산도발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
다섯 번째 삶에서 산도발이 마조람 후작의 명령대로 율리아를 죽여 없앴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고작 그깟 돈 몇 푼. 그때 산도발은 율리아를 보자마자 무척 기뻐했다. 시체 치우는 일이나 시킨다고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막상 데려왔더니 제법 값나가게 생긴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연 있는 노예는 비싸다. 산도발은 그녀를 바이칸으로 가는 해적들의 노예선에 팔았다. 그가 받은 돈이 얼마인지는 몰랐으나, 율리아를 데려간 해적들이 인신매매로 유명한 자들이라는 건 알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굶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선실 감옥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철창은 차가웠고, 다친 노예들이 죽어 가며 지르는 비명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나도 널 노예선에 팔려고 했어.”
율리아가 말했다. 산도발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조각배가 출렁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어나서 군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노예선! 날 팔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어! 해적들이 내 몸값을 비싸게 쳐 줄 거라고. 시녀님은 나쁜 사람 아니잖아. 살인자 아니잖아! 난 알 수 있어. 얼굴만 봐도 안단 말이야!”
“그래?”
“내가 여기서 죽으면 시녀님은 평생 후회할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율리아는 산도발의 말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무조건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이를 어쩐다. 율리아는 이미 오래전에 다짐했다.
“날 죽이라니까? 차라리 그냥 죽여! 마조람 후작이 날 죽이라고 했다면서!”
“이봐, 아가씨. 시끄러워. 소리 좀 지르지 마. 재갈 물고 싶어?”
“죽어서도 널 잊지 않을 거야. 반드시 복수할 거야!”
“에헤이, 살려 주겠다는데 왜 이래?”
“노예선에 팔리느니 죽는 게 나으니까. 어차피 죽을 거니까!”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겠지.”
파도가 크게 철썩 소리를 냈다. 카루스가 이제 슬슬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율리아가 마지막으로 산도발에게 말했다.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겠지.”
그가 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뒤돌아선 율리아의 귀엔 닿지 않았다. 바람은 시원하고, 파도는 높았다. 멀리서 몰려오는 먹구름과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이 절묘하게 나뉘었다.
철썩.
율리아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산도발은 그에게 주어진 기회가 더는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안 돼…….”
그제야 그가 타고 있는 작은 조각배가 눈에 들어왔다. 엉성한 노가 두 개, 배는 너무 작아 몸을 숨길 공간도 없었다.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배가 뒤집힐 듯 흔들렸다. 그 바람에 노가 떠내려갈 뻔하기도 했다. 엉거주춤 서 있던 산도발이 재빨리 앉아 노를 잡았다.
무서웠다. 파도가 자꾸만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어…… 어떻게 하라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마조람 후작과 손을 잡는 게 아니었는데. 그에게 이렇게까지 적이 많은 줄 몰랐다. 오르테가 최고의 권력자라기에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할 줄만 알았다.
그냥 해적으로 살걸. 내가 왜 그랬을까. 산도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를 악다물고, 노를 저었다.
“으아아아아!”
배가 크게 흔들렸다. 산도발이 미친 듯이 노를 저었다.
“나 산도발이야! 이대로는 안 죽는다고! 내가 어떤 놈인데, 절대 안 죽어!”
곧이어 집채만 한 파도가 몸을 일으켰고, 산도발이 타고 있던 조각배를 한입에 집어삼켜 버렸다.
악을 쓰는 산도발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군함은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고,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손끝이 떨렸다. 다섯 번째 삶의 그 날이 떠오른 뒤부터였다.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고, 온몸에 감각은 사라지고, 기절하다 깨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끝끝내 노를 놓지 않았다.
알렉사를 희생하면서까지 붙잡은 목숨을 허망하게 놓고 싶지 않아서, 손이 말을 듣지 않게 된 뒤에는 팔에다 끼우고 몸을 비틀어가며 노를 저었다. 울다가 쓰러지고, 울다가 일어나길 반복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날을 떠올리자 손바닥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가 이내 차갑게 식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와 자꾸만 옷자락에 문지르게 되었다.
카루스가 물었다.
“괜찮아?”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그가 문가에 선 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불안해 보여서.”
율리아는 카루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불안하다니, 내가? 그녀는 그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이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니까 하는 소리다.”
그가 왜 이러는지 궁금했다. 율리아는 감정적으로 굴지 않았다. 울거나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정말 괜찮아요. 혹시 산도발이 말했던 것처럼 제가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말하다 보니 우스워졌다. 죄책감이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카루스가 좀 더 안으로 들어와 율리아에게 자신의 재킷을 벗어 내밀었다.
한여름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만큼 더웠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그녀에게 건넨 재킷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루스가 율리아의 어깨를 힐긋 보고 말했다.
“아까부터 몸을 움츠리고 있었잖아.”
율리아는 아직도 온몸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운데 그녀 혼자 겨울인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목소리는 차분한데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카루스는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네가 너무 불안해 보여서 화가 난다고, 꼭 눈보라 치는 산맥에서 만났던 그 날처럼 위태로워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데 율리아의 눈빛이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율리아는 분명 여기 있는데, 그녀의 시선은 다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도발을 보면서 다른 산도발을 떠올렸고, 눈앞의 바다를 보면서 다른 바다를 떠올렸다.
율리아는 때때로 과거에 살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혐오에 빠진 것도 아니에요. 그런 건 세 번째 이후부터 다 사라졌어요.”
율리아가 재킷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설령 제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해도 신경 쓰지 마세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싸구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어딨어요.”
“그게 왜 싸구려 감상이야.”
“도움이 안 되니까.”
복수에 도움이 안 되니까 그렇다. 율리아에겐 오직 그 이유뿐이었다. 산도발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복수는 짜릿하고, 언제나 통쾌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해도 똑같았다.
“죄책감을 느껴도 되고, 시원함을 느껴도 된다. 과거에 네가 당했던 일을 똑같이 갚아 주겠다는데 그걸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어.”
카루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는 율리아가 내민 재킷을 바라볼 뿐 다시 가져가지 않았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고통스러우면 아프다고 말해. 그게 나쁜 건가?”
“전 힘들지 않아요.”
“나는 이제 네 말을 믿어.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네가 걸린 저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여기서 나 하나뿐이라면, 나한테는 털어놔도 되지 않나.”
“카루스 님,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쏟아 놓기라도 하라는 거야.”
이상했다. 힘들지 않은데, 힘들다고 말하라는 그가 이상했다.
율리아는 오늘 오래전에 했던 다짐을 또 하나 실현했다. 당했던 만큼 똑같이 갚아 주리라고, 그것만을 위해 살겠다고 했던 과거의 자신과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건 그냥 버릇이었다. 과거의 원한과 마주할 때마다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선 감정을 잘라 내고, 몸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러면 금세 괜찮아졌다. 차분해질 수 있었다.
카루스가 입을 꾹 다물더니 손을 내밀어 율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아주 살짝 잡았다가 지그시 누르고, 가볍게 한 번 두드렸다.
그건 그 나름의 위로였다. 어쩌면 그녀의 아픔을 나누고 싶다는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말씀드렸잖아요.”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그녀는 그에게 잊히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