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율리아는 증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상인연합 대표는 끝까지 협조하지 않으려 했지만, 율리아가 무시무시한 협박과 적절한 회유를 곁들이며 설득을 거듭하자 결국 울먹이며 열쇠를 넘겼다.
금고 안엔 온갖 서류와 장부, 계약서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수십 년에 달하는 범죄 장부였다.
율리아는 맥스웰과 바바슬로프에게 산도발과 회계사를 맡기고, 자신은 알렉사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와 상인연합 대표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레위시아는 밤이 새도록 그 장부들을 읽고 또 읽었다. 때마침 본가에서 돌아온 코코가 합세해, 왕자와 시녀들은 상인연합 대표가 마조람 후작을 등에 업고 그동안 저질러 온 범죄를 낱낱이 파헤쳤다.
“부왕께 알려야 해.”
상인연합 대표가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걸 알게 되면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이 증거를 없애 흔적을 지우려 할 것이다.
이 일로 마조람 후작을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을 어느 정도 깎아 낼 수는 있었다. 그러려면 장부에 있는 사람을 최대한 많이 치죄해야 한다.
문제는, 레위시아에겐 그럴 만한 병력이 없다는 것이다.
“부왕이 직접 처리해야 해.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으면 죄다 도망치고 말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율리아도 레위시아의 의견이 옳다고 말했다. 장부를 툭툭 치며 생각에 빠져 있던 코코가 왕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가 직접 국왕께 이걸 가져다 드리세요.”
레위시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과 마주하는 건 그에게 무척 힘들고 싫은 일이지만 이제는 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새로운 상인연합 대표에 힌치 백작을 추천한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고 오세요.”
“뭐? 백작이 허락했어?”
“네, 설득했어요.”
레위시아가 도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냐고 물었다. 힌치 백작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그토록 경계하는 권력 싸움의 한복판에 들어오겠다고 하다니.
“비결이 뭐야? 나도 좀 알려 줘.”
코코는 그녀가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국왕 전하는 레위시아 님의 아버지예요. 그분은 왕이지만, 아버지이기도 해요. 가서 부딪치세요.”
“형님을 잃은 슬픔에 괴팍해지셨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러니까 가서 알려 드리세요. 왕께는 아직 자식이 셋이나 더 있다는 것을요. 그들을 모두 지키려면 마조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도.”
코코의 붉은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레위시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다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은 1왕자를 기리는 기간이 끝나는 날이었다.
왕궁을 가득 채우던 흰 조화가 사라지고, 귀족들은 검은 옷 대신 평범한 여름 정장과 드레스를 꺼내입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울리던 우울한 종소리도 멈추었다.
레위시아는 우아하고 세련된 차림새로 국왕의 집무실을 찾았다.
긴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낯설었다. 왕실 기사와 하녀, 보좌관들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레위시아는 보좌가 이끄는 대로 집무실로 들어가, 왕 앞에 바로 섰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왕은 1왕자를 잃은 후유증으로 홀쭉하게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피부색은 창백하고, 눈 밑이 검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프와 술만 먹는다고 들었다.
왕비는 더 심했다. 의사들이 왕비의 침실 앞에서 상시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레위시아.”
왕이 레위시아를 불렀다. 강한 왕은 아니었으나 중후한 울림을 가졌던 그의 목소리가 타는 장작처럼 메말라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레위시아는 왕에게 안부 인사 같은 건 건네지 않았다. 입에 발린 걱정이나 어색한 위로가 그들 부자 관계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상인연합 대표를 바꿔야 합니다.”
“뭐?”
“마조람 후작의 친척이 그 자리에 앉아 오랜 세월 동안 오르테가를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저의 힘으로는 막을 수도, 벌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왜 하필…….”
형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골치 아픈 얘기를 하느냐고 말하려는 왕에게, 레위시아가 두툼한 장부와 계약서 등을 내밀었다.
“증거입니다.”
“증거?”
“상인연합 대표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멋대로 굴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가 달아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왕이 책상 위에 놓인 장부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레위시아가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왕의 얼굴에도 걷잡을 수 없는 노기가 자리 잡았다.
“아버지, 힌치 백작을 그 자리에 앉혀야 합니다.”
“뭐?”
왕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왕은 레위시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전신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레위시아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것도 이상하고 의심스러운데, 힌치 백작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레위시아는 그날 국왕의 집무실에서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다. 그렇다고 그들 부자 관계가 돈독해진 건 아니었다. 담소를 나누거나 함께 식사한 것도 아니었다.
레위시아는 왕의 집무실에 머무는 내내 상인연합 대표가 그동안 무슨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고, 그 일에 또 어떤 자들이 연루되어 있는지 낱낱이 고해바쳤다.
힌치 백작을 추천한 이유도 명확했다. 백작은 공명정대한 사람이었고, 중앙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에 걸쳐 무역선을 운용하며 상업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국왕은 상인연합 대표가 저지른 범죄보다 그가 마조람 후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놈이 저지른 건 단순 비리가 아니었다. 연합은 오르테가를 좀먹는 병균과도 같았다.
분노한 왕이 왕실 기사단을 파견했다.
왕의 마음에서 마조람의 방이 좁아지고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레위시아라는 새로운 방이 생겼다.
일과를 끝낸 왕이 침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애첩에게 말했다.
“그거 아는가?”
“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가장 괜찮은 기분이야.”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레위시아가 욕심을 내더군.”
왕이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침대에 엎드렸다. 애첩은 그 곁에 앉아 딱딱하게 굳은 왕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그러곤 가만히 숨을 참았다가 불쑥 물었다.
“무슨 욕심이요?”
“힌치 백작을 상인연합 대표로 추천하더라고. 마조람의 힘을 깎겠다는 거겠지. 백작은 성품이 곧고 인망이 두터우니까 괜찮을 것 같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
“레위시아가 드디어 욕심을 내는군. 그동안엔 그 녀석이 도통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왕의 혼잣말이 길어질수록 애첩의 손길이 느려졌다.
“시시덕거리며 놀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제법 사람 부릴 줄도 알고.”
상인연합은 레위시아 혼자만의 힘으로는 공격할 수 없는 곳이었다. 국왕은 아마도 힌치 백작이 그를 도왔을 거라고 추측했다.
“왜 저한테 오셔서 그런 얘기만 하시는 거예요. 저 오늘 정말 오랜만에 두통이 오지 않아서 너무 행복했어요.”
“그랬어? 다행이구나.”
왕이 애첩을 품에 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1왕자가 죽은 뒤 매일 시름에 잠겨 있던 왕에게 처음으로 활력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