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미친 여자구나. 산도발은 사람을 잘 읽는 편이었다. 노예를 많이 다루다 보니 절로 얻게 된 눈썰미였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율리아는 어딘가 크게 비틀려서 정상이 아닌 여자였다.
아무래도 같잖은 수로 시간을 끌며 기회를 노리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아까부터 살벌하게 웃으면서 그를 구석구석 훑어보는 두 명의 남자도 두려웠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산도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금고 위치도 알려 주고, 대표도 유인해 줄게. 어차피 너도 그걸 열려면 열쇠가 필요하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런 뒤엔 날 노예로 팔아. 죽이지 말고.”
산도발은 일단 이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오르테가에 그가 모르는 노예 상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느 배에 팔리든 직접 자신의 몸값을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리를 지키지 않는 남자. 그에겐 상인연합 대표나 마조람 후작도 결국 수많은 돈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율리아는 그걸 다섯 번째 삶에서 알았다.
산도발이 협조하기로 한 이상, 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율리아는 일행과 함께 산도발의 안내를 받으며 비밀 금고가 있다는 상인연합 대표의 별장으로 향했다.
“대표는 적이 많아. 연합 본관은 물론이거니와, 별장에도 용병을 잔뜩 고용하고 있다고. 저길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산도발의 말대로였다. 별장엔 제법 많은 수의 용병들이 오가고 있었다. 언뜻 봐도 열댓 명은 되어 보였다. 안에도 그만큼 더 있을 터였다.
맥스웰이 가서 부하들을 불러오겠다며 몸을 일으켰지만, 율리아가 그를 잡았다.
“그러면 너무 늦어요. 곧 해가 뜰 거예요.”
“그렇다고 우리끼리 저길 뚫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셋은 괜찮은데, 시녀님이 위험해요.”
맥스웰은 바바슬로프와 알렉사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용병들을 뚫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율리아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남아서 산도발을 감시해야 했다.
“그냥 내일 다시 오죠.”
“달아난 해적들이 이 자식이 납치당했다는 걸 알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대표는 금고부터 옮기려 할 거고요.”
어떻게 할까. 율리아가 조급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려던 때였다.
알렉사가 물었다.
“그냥 저 사람들을 다 때려눕히면 되는 겁니까?”
“네?”
“그런 거라면 저 혼자 들어가도 됩니다. 두 분은 여기서 율리아를 지키세요.”
“무슨 소리예요! 너무 위험해요.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저 많은 인원을 혼자 상대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다들 실력 있는 용병일 텐데.”
율리아가 알렉사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자 알렉사가 아주 부드럽게 율리아의 손을 떼어냈다.
“율리아.”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저를 모릅니다.”
모른다니. 잘 안다. 율리아는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알렉사의 손가락을 다시 잡아챘다.
“위험해요.”
“제가 아니라, 저들이 위험한 겁니다.”
알렉사가 씩 웃었다. 반쯤 감긴 것처럼 내리뜨고 다니던 눈이 또렷한 빛을 발했다. 그녀는 수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표범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갈 곳을 잃은 율리아의 손가락이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알렉사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자꾸만 다섯 번째에서 만났던 알렉사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어어?”
하지만 그건 모두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하…….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바바슬로프가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사는 거의 날아다니고 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사냥을 개시한 맹수처럼 용병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그녀는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었다. 분명 달랑 검 하나만 들고 달려 나갔는데, 싸움이 끝날 때쯤엔 용병들이 쓰던 무기를 모두 수거해 한쪽에 던져 놓은 뒤였다.
알렉사의 흰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꼭 한 명의 용병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자 별장 안을 지키던 용병들이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렉사의 상대는 아니었다.
율리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렉사를 아기처럼 어리게만 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 고리대금업자에게 착취당하면서도 혼자서 그토록 눈부신 성취를 이뤄낸 그녀였다. 천재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는 게 아니다. 알렉사는 소문난 실력자들 사이에서도 특출한 천재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별장 안의 용병을 모두 처리한 알렉사가 산도발에게 말했다.
“이제 그 대표라는 놈 불러와.”
산도발이 처음으로 잔뜩 겁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연합 대표는 산도발이 보낸 전갈을 받고 헐레벌떡 별장으로 달려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슴푸레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대표가 별장 안에 용병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바바슬로프가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오랫동안 마조람 후작을 위해 뒤에서 지저분한 일 처리를 도맡아 온 그는 율리아와 함께 서 있는 산도발을 목격하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쏟아냈다.
산도발은 뻔뻔하게 말했다.
“아니,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이겠다는데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습니까? 내가 바보도 아니고. 요즘 오르테가 분위기 뒤숭숭한 거 알면서 이러신다. 마조람 후작님이 날 지켜 줄 사람도 아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어 보이던데.”
“네 이놈! 이 쥐새끼 같은, 짐승만도 못한 놈아!”
“에헤이, 솔직히 말해 봐요. 똑같은 입장이었으면 그쪽도 배신했을 거면서.”
율리아는 산도발이 대표를 충분히 도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한 짓이었겠지만, 덕분에 이성을 잃은 상인연합 대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후작님이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사지를 찢어 버릴 거야!”
“그쪽 걱정이나 하시죠. 이거 열리는 순간 최소한 교수형일 텐데.”
산도발이 히죽 웃으며 금고가 있는 방을 가리켰다.
대표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열어.”
* * *
집이 불편하다.
코코는 힌치 백작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는 숙면을 이룰 수 없었다. 집보다 왕자궁에 있는 기간이 훨씬 길다 보니, 이렇게 가끔 돌아올 때면 집이 낯설어 팔자에도 없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녀는 힌치 백작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태 왕자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백작님이 식사하자고.”
“혼자서는 밥도 못 먹는대? 늙어서 그런가.”
“빨리 안 내려오면 오늘 배 타고 나가셔서 한 달 동안 안 들어오신대요.”
“아니 무슨, 부모가 돼서 자식한테 가출로 협박을 해?”
집사가 호호 웃으며 한두 번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코코를 달랬다.
식당으로 내려가니 힌치 백작이 근엄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코코는 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말했다.
“상인연합 진짜 이대로 둘 거예요?”
“내 알 바 아냐.”
“오르테가가 망해도 알 바 아니에요?”
“그건 국왕한테 가서 따져야지, 왜 나한테 그러는 거냐? 내가 왕이야? 왕이 무능한 게 내 탓이야?”
“아빠는 할 수 있잖아. 심지어 잘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아니면 누가 해도 불안해요.”
“네가 하면 되겠네. 넌 내가 키웠는데.”
“전 레위시아 님을 키워야죠.”
코코가 그렇게 말하자, 힌치 백작이 근엄하게 자르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콱 찍었다. 그러곤 통째로 들고 크게 한 입 뜯어먹었다.
“아빠.”
“1왕자가 죽고 상인연합이 우리 수중에 떨어진다고 해도 마조람 후작의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놈에게 충성하는 가문을 세운 줄이 왕에게 충성하는 귀족을 세운 줄보다 길어.”
“곧 뒤집힐 거예요. 샤트린 공주도 분발하고 있고. 이제 곧 귀족들도 레위시아 님을 다시 보게 될 거니까.”
“이상하네. 내 딸은 이상주의자가 아닌데.”
“상인연합 대표가 그동안 저질러 온 범죄의 증거를 확보했어요. 레위시아 님은 그걸 들고 왕을 찾아갈 거고, 그 자리에서 아빠를 추천할 거예요.”
“확보했어? 네 손에 있어, 그게?”
“왕자궁으로 돌아가면 있을 거예요.”
백작이 코웃음 쳤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아빠를 속이려고 하지 말라며, 코코에게 밥 먹고 뱃놀이나 가자고 말했다.
“싫어요.”
“그럼 낚시할래?”
“싫다고요.”
“그럼 인형 놀이할까?”
“상인연합 대표.”
“너 그냥 왕자궁으로 꺼져.”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는 백작을 보며, 코코가 신경질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식사하는 동안엔 더 싸우지 않았다. 후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여느 부녀처럼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고, 연락 좀 자주 하라는 잔소리를 주고받았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코코가 백작에게 물었다.
“레위시아 님은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내가 왜.”
“어떻게 자랐는지 안 궁금해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죠? 아빠가 왕궁에 언제 왔었는지 기억도 안 나.”
“어미 닮아 예쁘게 자랐겠지. 알 게 뭐냐.”
“내가 언제 외모 얘기했어요? 왕좌에 앉을 만한 그릇인지 아닌지 보라고요. 아빠, 솔직히 말해 봐요. 궁금하잖아.”
힌치 백작도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잔뜩 주눅 든 채 유모의 손에 끌려다니던 레위시아의 어린 시절 모습이 아른거렸다. 장성한 사내가 되었다니 한 번쯤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
“왕좌라…….”
백작이 중얼거렸다. 코코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위시아 님은 내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예요. 공부도 내가 가르쳤고, 사교도 내가 가르쳤어. 제일 오래 있었던 유모보다 내가 더 긴 시간 동안 왕자님을 보살폈어요.”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나를 믿잖아. 나도 나를 믿어요.”
내가 선택한 왕자를 믿는다. 코코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알았다.”
힌치 백작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항복 표시였다.
레위시아는 괜찮은 왕이 될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를 평가하는 건 역사가 할 일이었다. 코코는 그저 레위시아가 지금처럼 정의롭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왕이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