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산도발은 바이칸 제국 출신이었다. 해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바다 위를 떠돌며 살던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제국 땅을 밟고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노예 장사였다.
그러나 바이칸은 늘 전쟁 중이었기에 노예가 많아 값이 후하지 않았다. 산도발은 바이칸을 떠나기로 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건 남쪽으로 갈수록 매력적인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었다.
“산도발은 남부 해안을 떠돌며 노예를 구해요. 그의 주요 고객은 해적들과 귀족이고요. 상인연합 대표와는 마조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거예요. 대표는 후작의 친척이고, 산도발은 후작의 심부름꾼이거든요.”
“심부름꾼이요?”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 있을 때, 세간의 이목을 피하려 산도발을 통해 외국으로 보내요. 죽여도 왕국 밖에서 죽이는 편이 안전하니까요. 가끔은 살려서 멀리 보내 놓고 나중에 불러들이기도 하고요.”
“그걸 어떻게 다 아십니까?”
맥스웰이 물었다. 오르테가에서 긴 시간 정보상으로 살았던 그조차 알지 못하는 정보들이 율리아의 입에서 쏟아졌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율리아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정보원이 있어요.”
“저 말고 정보원이 또 있다고요? 와, 서운하려고 하네…….”
그 정보원이라는 게 지난 삶의 율리아 아르테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저 자식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치안대에 고발하는 건 안 됩니다. 누가 빼낼지 모르잖아요.”
“알아요. 그냥…….”
율리아가 머뭇거렸다. 누가 보면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완벽한 역지사지가 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때 율리아의 시야에 알렉사가 들어왔다. 알렉사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제국에서 용병 짓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바슬로프가 무슨 재밌는 소릴 했는지, 알렉사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가만히 있으면 율리아보다 연상 같은데 저렇게 웃으니 아직 앳된 티가 났다.
노예선에서 만났던 알렉사는 지금보다 훨씬 마모된 모습이었는데.
“배에 팔죠.”
고민은 끝났다. 율리아가 말했다.
“노예로 팔아 버려요.”
죽을 때까지 채찍질이나 당하라지. 그녀는 남자가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 그대로, 그를 팔겠다고 했다.
산도발을 납치하는 건 조금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는 지은 죄가 많은 만큼 신중한 성격이었고, 어지간해서는 뭍에 발을 내리는 법이 없었다.
바바슬로프는 군함을 끌고 가서 놈의 배를 박살 내면 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게 했다간 산도발이 마조람의 도움을 받아 멀리 도주할 가능성이 있었다.
율리아는 고민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경험과 그때 들었던 말들이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네가 그 악바리 같은 평민이냐? 율리아라고 했던가? 살쾡이처럼 생긴 줄 알았더니, 그냥 사슴이잖아?”
“날 죽여.”
“악바리는 악바린데 멍청한 악바리네. 여기서 내가 널 죽이면 돈은 어떡하라고.”
“마조람 후작이 날 노예선에 팔라고 시켰어? 그럼 그냥 죽여도 돼. 후작은 내가 죽는 걸 더 원할 테니까.”
“아니야. 율리아, 후작은 널 죽이라고 시켰어. 근데 내가 팔려고 하는 거야. 이렇게 예쁜데 아깝잖아.”
다섯 번째 삶이었다. 율리아는 산도발의 손에 이끌려 바이칸 제국으로 향하는 노예선에 팔리게 되었다.
그는 심부름꾼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마조람 후작의 명령에는 충실하지 않았다.
당시 해적들은 해방군과 손을 잡고 있었다. 산도발은 마조람 후작의 심부름꾼인 주제에, 해적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던 박쥐 같은 놈이었다.
“산도발, 널 죽일 거야.”
“어떻게?”
“널 죽이고 말 거야. 넌 반드시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무서워서 지리겠네. 야, 날 죽이고 싶으면 노 젓는 법부터 배워. 난 어지간해선 땅을 밟지 않으니까. 잡혀 온 노예인 척하고 내 배에 오르든지. 그믐달이 뜨는 밤, 6번 부둣가에서 만나자?”
그때 산도발은 율리아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노예가 되어 금세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제 입으로 알려 주며 비웃었다.
율리아가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 그를 잡으러 오게 될 줄도 모르고.
* * *
그믐달이 떴다.
바람도 불지 않는 밤이었다. 율리아는 오랜만에 낡고 허름한 옷을 찾아 입었다. 신발도, 머릿수건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 앞엔 고리대금업자의 회계사였던 남자가 재갈과 족쇄를 찬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끌고 가는 건 바바슬로프와 맥스웰이었다.
“시녀님, 얼굴을 확인하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시간을 끌다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알았어요.”
6번 부둣가였다. 소속이 없는 상선들이 주로 이용하는 더럽고 부산스러운 곳. 율리아는 그곳에서 노예처럼 손목이 묶인 채 맥스웰을 따라 걸었다.
“율리아, 조금 더 제 쪽으로 오세요. 너무 앞서 걸으면 당신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뒤에선 알렉사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웃어 보인 뒤, 조금 천천히 걸었다.
산도발을 잡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진짜 있네.”
바바슬로프가 허허 웃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부두 끝에 수상한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어두운 그믐밤이라 다른 배들은 모두 닻을 내린 채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혼자 어중간한 위치에서 출항 준비를 하는 배였다.
그 앞엔 산도발과 그의 부하 둘, 그리고 서너 명의 해적이 서 있었다.
“뭐야. 급하게 온다던 게 당신들이야?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거래 안 해. 명심해. 식구라서 봐준 줄 알아.”
산도발이었다.
율리아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해적들이 쓰는 말투와 제국식 억양이 뒤섞인 희한한 말버릇. 가벼워 보이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함까지.
율리아는 붙잡은 회계사를 통해 산도발에게 새 노예가 갈 거라는 연락을 넣었고, 그 덕에 신중한 그도 큰 의심 없이 일행을 맞이했다.
“오늘은 운이 좋네. 비싸게 팔리겠어.”
산도발이 율리아와 알렉사를 보고 히죽 웃었다. 재갈을 물고 있는 남자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회계사가 산도발을 보자마자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지만, 맥스웰이 주먹으로 몇 대 때리자 기절했는지 축 늘어졌다.
율리아가 그때 입을 열었다.
“산도발.”
“어?”
“오래간만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율리아는 웃고 있었다. 노예인 줄 알았던 예쁘장한 여자가 자신을 보고 불길한 미소를 짓자, 당황한 산도발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이 새끼들 뭐야! 야, 빨리 출발해!”
산도발은 해적들과 함께 서둘러 배에 오르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바바슬로프가 놈의 목을 한 팔로 껴안고, 그 위에 칼을 갖다 댔다.
그러곤 당황한 해적들에게 말했다.
“빨리 도망 안 치면 너희도 다 잡아간다? 이 해적 새끼들아.”
해적들은 산도발과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에 올랐다. 배가 빠르게 부두에서 멀어졌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산도발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 바바슬로프가 맥스웰과 함께 놈의 부하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알렉사가 재빨리 밧줄을 풀어내고 그들을 도왔다.
율리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산도발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
산도발은 회계사와 함께 폐창고로 끌려갔다. 그 역시 굵은 나무기둥에 온몸이 꽁꽁 묶이게 되었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율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못 알아봐서 미안해. 너 이제 보니까 바실리의 여자잖아? 뭐야.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알고 있구나.”
“이게 무슨 짓이야. 난 너한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애먼 데다 화풀이를 해. 망가뜨리고 싶으면 바실리를 납치해야지. 내가 도와줄까? 어때, 도련님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
율리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가 해야 할 질문을 했다.
“상인연합 대표가 감춰 둔 금고 어딨어?”
“뭐?”
“너희가 저지른 범죄, 그 증거 모아 둔 금고 말이야. 상인연합 대표가 너한테는 알려 준다며.”
“그건…… 뭐에 쓰게.”
“상인연합 대표를 고발해서 사형대에 올리고, 그 김에 마조람 후작도 엿 먹이려고.”
산도발은 순간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곤 애써 웃으며 율리아에게 물었다.
“말 안 해 주면…….”
“말하게 될걸.”
율리아가 눈짓으로 맥스웰을 가리켰다. 그가 더벅머리 아래 눈동자를 뱀처럼 빛내며 웃었다.
산도발의 시선이 맥스웰에게서 율리아로, 그다음엔 기절한 채 옆 기둥에 묶여 있는 회계사에게 향했다.
“말하면 풀어 줄 거고?”
“그래.”
“그걸 어떻게 믿어. 금고 위치만 알아낸 다음에 날 죽일 거면서.”
어떻게 알았지. 율리아는 제법이라며 그를 칭찬했다.
산도발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고 애썼다. 그의 입에서 별의 별말이 다 쏟아져 나왔다.
“날 무사히 풀어 준다는 보장이 없으면 죽어도 말 안 해. 고문해도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있잖아. 그 금고 위치는 대표랑 나밖에 몰라. 근데 열쇠는 나한테 없어. 내가 거기 갈 때는 대표가 항상 같이 가서 직접 열어 주거든.”
“그렇구나.”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내가 대표를 만나서 열쇠를 빼앗아 갖다 줄게. 그러면 날 놔줄래?”
“미친 소리 하지 마.”
율리아가 생긋 웃었다. 산도발은 그녀의 미소에 드리워진 광기를 읽고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