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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108/319)

96화

“뭐?”

“자꾸 되묻지 마. 내가 알고 싶은 건 상인연합 대표가 그동안 저질렀던 비리와 뇌물 목록, 인신매매와 각종 범죄 기록이 보관된 금고가 어디에 있느냐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난 그런 사람 몰라! 엉뚱한 사람 잡아다가 이게 무슨 짓거리…….”

남자가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율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가 발악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옷 주머니를 뒤져 작고 두툼한 수첩을 꺼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것들이 진짜 죽고 싶어?”

“그냥 말해. 널 고발하고 나서 피해자 찾고, 증거 찾고, 목격자 찾고…… 사실 그렇게 해도 되거든. 근데 내가 왜 이런 거친 방법까지 써 가면서 너한테 묻는지 알아?”

율리아가 짜증스레 말했다.

“지겨워서.”

지긋지긋했다. 그녀는 이전의 삶에서도 상인연합을 상대로 아주 오랫동안 싸웠다.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상인연합은 언제나 하나부터 열까지 문제투성이였다.

율리아는 보란 듯이 남자에게서 빼앗은 수첩을 펼쳐 보았다. 그러곤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해도 별로 상관없어. 이것만 있으면 널 사형시키는 건 일도 아니니까. 아마 교수형이겠지. 죽은 뒤엔 바다에 버려질 거고.”

남자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바바슬로프가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꽁꽁 묶어 놓은 밧줄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맥스웰이 다가와 율리아에게 말했다.

“시녀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 다시 와야겠네요.”

왕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율리아가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금고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러면 이 중에서 몇 가지는 빼고 고발할게.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적어도 정식 재판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도 말 안 하면 산채로 바닷물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언제 죽는지 구경할 거야. 이왕이면 백상아리가 출몰하는 곳이 좋겠지.”

율리아가 몸을 돌렸다. 남자의 입에서 온갖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율리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하지 않았는데, 맥스웰이 놈의 입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어이구, 주둥이가 시궁창이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오실 때쯤엔 고분고분해져 있을 겁니다.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도 할 거고요.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죠.”

맥스웰이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율리아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창고를 떠났다.

율리아와 알렉사가 상인연합 간부의 회계사를 만나러 왕궁 밖으로 나갔을 때, 코코는 오랜만에 자신의 본가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힌치 백작의 저택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부둣가에 있었다. 그곳은 수많은 고깃배와 무역선들이 쉼 없이 들락거리는 곳이었다.

바다엔 배들이, 뭍에는 거대한 상단의 건물이 죽 늘어서 있었다.

코코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나타난 중년의 여인에게 물었다.

“집사, 아빠는?”

“미쳤어! 아가씨, 연락도 없이 오시면 어떡해요? 백작님이 아가씨 오시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리 연락하셨어야죠! 그래야 맛있는 것도 구해 놓고, 술도 못 마시게 하고…….”

“술 먹고 있구나.”

코코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가방이 없어요? 마차에 두고 내리셨어요?”

“금방 갈 거라서.”

“백작님 우실지도 몰라요.”

“기록해 놔. 10년 동안 놀릴 거야.”

힌치 백작은 부두에서도 알아주는 술고래였다. 그는 먼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간 어부들이 돌아올 때마다 그들을 데려와 함께 술자리를 갖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야 제일 싱싱하고 맛있는 생선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도 그랬다. 힌치 백작은 커다란 바닷가재를 통째로 쪄서 술과 함께 먹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오랜 친구들이 함께 있었는데, 모두 노련한 어부거나 은퇴한 선장들이었다.

“아빠!”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코코를 보고, 힌치 백작이 눈썹을 한쪽만 쓱 들어 올렸다. 그러곤 심드렁하게 물었다.

“누구시더라?”

“……아빠.”

“누구냐니까? 나 참, 이보게. 아빠래. 나한테 딸이 있었나?”

힌치 백작의 친구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없었지요.”

“딸은 무슨! 본 적도 없는데!”

끼리끼리 논다더니. 백작의 친구들도 그 못지않게 짓궂은 사람들이었다.

코코가 크게 심호흡하며 화를 삼켰다. 아무리 그녀라도 아빠의 친구들을 쥐 잡듯이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죄송하지만 저랑…….”

“집 잘못 찾아오셨소이다. 여긴 코델리아 힌치의 아빠가 사는 집이오. 아가씨는 누군지 몰라도, 코델리아 힌치가 아니야.”

“아빠! 좀! 중요한 얘기란 말이에요!”

“내 딸은 너보다 훨씬 예뻐. 못생긴 게.”

“진짜 이럴 거예요?”

“진짜 이럴 건데요?”

“무슨 어른이 그렇게 속이 좁아요? 바쁘다 보면 집에 못 올 수도 있지! 제가 어린애예요? 적당히 좀 하세요!”

“어이구, 뉘 집 딸인지 성질 더러운 것 좀 보게.”

“아빠 닮았거든요?”

“아니거든요?”

백작이 얄밉게 이죽거렸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힌치 백작은 코코를 서재로 데려가 의자에 앉힌 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한마디도 듣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코코는 화를 꾹 참으며 백작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받아 써.”

“뭘요.”

“사랑하는 아빠에게.”

백작이 근엄하게 말했다. 코코에게 줄 다과를 들고 서재를 찾았던 집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코코는 닭살이 돋아서 차마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겠다고 신경질을 냈지만,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아빠, 안녕하셨어요? 아빠의 귀여운 딸, 코코예요.”

“미쳤어요?”

“연락 못 해서 죄송해요.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온몸으로 짜증을 내며 편지를 거부하던 코코가 입을 꼭 다물었다. 백작도 그 이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쓰면 되잖아요.”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코코는 새하얀 편지지에 백작의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이제 만족하냐며 고개를 들고 노려보자, 백작이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집사에게 넘겼다.

“현관에 걸어.”

“네, 백작님.”

아예 가보로 간직하지 그러냐는 코코의 비아냥에도 백작은 그저 흐뭇한 얼굴이었다.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됐다는 듯 느긋하게 의자에 앉는 그를 향해, 코코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상인연합 대표가 되어 주세요.”

* * *

다음 날 밤이 되었다. 율리아는 이번에도 알렉사를 대동한 채 왕궁을 나섰다. 레위시아가 같이 가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위험하다는 말로 만류했다.

“시녀님, 일찍 오셨네요?”

맥스웰과 바바슬로프는 이미 창고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어제와 옷이 다른 걸 보니 숙소에 다녀온 것 같은데, 소매와 신발이 구겨져 지저분했다. 꼭 어디서 드잡이질이라도 하다가 온 모습이었다.

율리아가 물었다.

“누구랑 싸웠어요?”

“별거 아닙니다. 오다가 술 취한 병사들이랑 마주쳤는데…… 다짜고짜 해방군 아니냐고 시비를 걸어서요.”

한숨이 나왔다. 요즘 오르테가의 병사 중 일부가 술값을 벌기 위해 밤거리를 쏘다니며 부랑자를 잡아다가 해방군이라고 속이고 금화를 받아가는 일이 잦았다.

“들어가시죠.”

맥스웰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문을 열었다. 율리아와 알렉사는 어제 납치한 남자가 묶여 있는 위치로 다가갔다.

잠시 고민하던 알렉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죽었습니까?”

“예? 아이고, 아닙니다. 멀쩡해요. 부러진 데도 없고, 다 정상입니다. 아픈 척하는 거예요. 이 녀석이 엄살이 심하더라고요.”

맥스웰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에게 어떻게 한 거냐고 묻는 대신, 묶인 채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금고.”

남자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어딨어.”

“금고…….”

율리아의 뒤에 서 있던 맥스웰이 소리 없이 이를 드러냈다. 그러곤 입 모양으로 ‘죽인다’라고 그를 협박했다. 딴에는 율리아가 겁먹을까 봐 배려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율리아가 다짜고짜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소리가 찰졌다. 남자는 간신히 아물었던 입의 상처가 터져, 검붉은 피를 울컥 쏟았다.

율리아가 다시 말했다.

“금고.”

그러곤 또 때렸다. 이번에는 두 대였다. 철썩 소리가 날 때마다 맥스웰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금고는 몰라. 진짜야. 나는…… 대표랑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야. 제발…….”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팔짱을 낀 채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알렉사가 물었다.

“피해자들한테도 그렇게 말하려고?”

“누구…….”

“내 이름은 알렉사 콴이다. 너희 때문에 전 재산을 잃고 자살한 콴 자작의 딸이고, 너희가 칼잡이로 만들어서 전쟁터로 보냈던 사람이지.”

남자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 그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직감했다. 무슨 말로 애원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금고는 진짜 몰라. 난 대표가 신임하는 측근이 아니니까. 하지만…… 금고의 위치를 누가 아는지는 알아.”

율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이름은?”

“산도발.”

그의 입에서 유명한 노예 상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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