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상인연합 부수기
비 내린 밤거리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축축한 길바닥이 꼭 물결치는 밤하늘처럼 반짝거렸다. 배고픈 길고양이들이 살금살금 빗물 고인 자리를 피해 걸었다.
고즈넉한 밤이었다. 한데 그 아름다운 장소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나, 어느 허름한 집 앞에 섰다.
한 손에 두툼한 수첩을 든 슈트 차림의 남자가 물었다.
“여긴가?”
그러자 그를 따르던 사내들이 집 앞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아비는 몇 년 전에 달아나 없고, 어미는 얼마 전에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동안엔 조부모가 허드렛일 하면서 이자를 내곤 했는데, 3개월 전부터 감감무소식입니다.”
“3개월이나 기다렸다고? 이 새끼들이…… 누군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쫓겨나고 싶어? 너희 모두 다음 달까지 목표액 못 채우면 해고인 줄 알아.”
“예? 아니, 그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돈 놓고 돈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인 거 몰라? 그것도 못 하는 새끼들은 나가 죽어야지. 막말로 자금 다 대 주고 사람도 모아 주는데, 이자 받아 오는 것도 못해?”
“조부모까지 죽었다는 얘기가 있어서…….”
사내들이 변명할수록 슈트 차림의 남자는 더욱 싸늘하게 화를 냈다.
“애들은 있을 거 아냐.”
“예. 대충 열댓 살 되는 남자애가 하나, 그보다 어린 여자애가 둘인가.”
“팔아 버려.”
“알겠습니다.”
“집은 주인이 따로 있고?”
“친척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보부상이라 몇 년에 한 번 나타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서류 꾸며서 집도 팔아 버려.”
사내들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트 차림의 남자는 집 앞에 서서 수첩을 펼치더니 주소와 아이들의 나이, 그리고 채무액을 적어 넣었다.
거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 네 명의 남녀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사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 새끼들이 확실해?”
“네, 확실해요.”
묻는 사람은 바바슬로프였고, 대답하는 건 율리아였다.
“수첩 든 놈?”
“네, 저자가 상인연합 간부의 회계사예요.”
“개 쓰레기 같은 놈이군.”
바바슬로프가 주먹을 쥐었다가 푸는 걸 반복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서 사내들의 이를 다 털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데 그보다 더 깊게 분노한 사람이 있었다. 알렉사였다.
알렉사의 나른한 회색 눈이 설표처럼 빛났다. 그녀가 몸을 기울이자 바짝 올려 묶은 흰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려 율리아의 팔에 닿았다. 그러자 그 부분의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죽이면 안 돼요.”
율리아가 알렉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참아요, 알렉사.”
율리아와 함께 왕자궁을 빠져나온 알렉사는 맥스웰과 바바슬로프를 만났을 때만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들에게 용병 시절 동료들에게 배웠던 거친 농담을 건넬 만큼 여유 만만했다.
그런데 막상 질 나쁜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하수인들을 목격하게 되자, 애써 감춰 두었던 울분이 살의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녀가 긴 세월 노예처럼 일하며 수모를 당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알렉사의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낀 맥스웰이 분위기를 환기하려 호들갑을 떨었다.
“시녀님, 나 무서워.”
그래도 알렉사는 살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얼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율리아가 알렉사의 팔을 안듯이 잡아당겼다. 그러곤 부드럽게 품에 가두고 말했다.
“지금은 죽이면 안 돼요.”
흠칫 놀란 알렉사는 그제야 살기를 풀 수 있었다.
바바슬로프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시녀님, 우릴 믿어. 복덩이가 시키는 일이라면 우리 엄마한테 불효하라는 거 빼고는 다 할 작정이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바바슬로프와 맥스웰이 알렉사와 한 차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역할은 수첩 든 남자를 사로잡는 것이었고, 알렉사의 역할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율리아를 지키는 것이었다.
애당초 알렉사는 직접 놈들을 습격하고 싶어 했다. 한데 바바슬로프가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복덩이를 지키자.’라고 하자, 자원해서 율리아의 곁에 남았다.
“가자.”
바바슬로프가 먼저 골목을 박차고 나갔다. 맥스웰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대각선 뒤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사채업자들이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냅다 주먹부터 날렸다. 바바슬로프는 날렵한 편이었는데, 그의 주먹에선 북 치는 소리가 났다.
고요한 골목이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집 창문에 등불이 들어왔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거나 신고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자식들, 뭐야! 너희 누구야!”
사채업자들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앞니가 부러져 발음이 새고 피가 튀었다. 바바슬로프가 놈의 멱살을 잡고 한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맥스웰에게 말했다.
“산 채로 잡아야 하는 놈은 하나야.”
“알아.”
나머진 다 죽여도 된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약자만 괴롭히는 사채업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놈들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성공하지 못했다. 잡으려고 다가가면 주먹이 날아왔고, 때리려고 손을 뻗으면 발길질이 날아왔다.
한 사채업자가 맥스웰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다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단도에 가까운데, 그것보다는 긴 칼이었다. 손때 묻은 가죽 손잡이를 보니 오랫동안 써 온 무기 같았다.
맥스웰이 그걸 보고 웃었다.
“나 주려고?”
칼을 뺏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맥스웰은 놈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동료들을 버리고 달아나던 자의 허벅지에 꽂았다.
“사, 살려 줘……!”
비명과 애원, 욕설이 뒤섞였다. 힘깨나 쓰던 동료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자, 수첩을 들고 있던 남자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를 보고만 있을 바바슬로프가 아니었다.
“어디 가, 이 새끼야. 너 잡으러 온 건데.”
그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러곤 반항하는 놈을 한 손으로 질질 끌어 율리아에게 데려갔다.
“이놈 맞아?”
“네, 맞아요.”
율리아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남자를 데려간 곳은 한적한 부두에 있는 폐창고였다. 워낙 넓고 외진 곳이라 누군가 찾아올 염려는 없어 보였다.
장소를 마련해 준 맥스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율리아가 기둥에 묶여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선박을 만들 때 쓰는 굵은 나무 기둥에 꽁꽁 묶여 있었다. 맥스웰이 재갈을 풀어 주자,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들, 내가 누군지 알고!”
“알아.”
율리아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고리대금업자들 회계 처리해 주는 놈이잖아, 너. 이자 못 내는 사람들 찾아가서 인신매매도 하고, 겸사겸사 집도 뺏고.”
“너 누구야.”
“시녀.”
“뭐? 그게 무슨…….”
“상인연합 대표 알지? 그 남자가 숨겨 둔 금고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