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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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점을 잃은 1왕자파의 귀족 중 일부가 연일 공주궁을 드나들었다. 샤트린은 형제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자신의 궁에서 잘 나가지 않았는데, 율리아가 보기에 그건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밖에서 만나면 티가 안 나잖아요. 이제 자기가 일인자라는 걸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을 텐데, 귀족들이 공주궁 입구가 닳도록 드나들어 줘야죠.”
“걘 왜 그렇게 티를 내고 싶어 하지? 저러다 진짜 왕이 되면 아침에 뭘 먹었고, 옷은 뭘 입었고,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온 세상에 알릴 기세야.”
“다들 그래요. 공주님이 조금 유난한 구석도 있지만.”
“난 아냐. 내 사생활은 소중해. 나만 알고 싶다고.”
“어떡하죠. 왕좌에 오르시면 그 소중한 사생활 다 공개될 텐데.”
“빌어먹을.”
레위시아가 짜증을 내며 모래를 걷어찼다.
그는 자신의 시녀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와 있었다. 장례식 전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를 위해 율리아가 제안한 외출이었다.
“여긴 사람이 없어서 좋네.”
“제국군 기지가 옆에 있으니까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남부 함대 기지가 보이는 외진 해변이었다. 짧은 백사장 너머에 낮은 언덕이 있고, 그 뒤엔 오밀조밀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제국군이 감시하는 곳이라 그런지 여름인데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래사장 위엔 레위시아와 율리아, 코코와 알렉사뿐이었다.
레위시아가 율리아와 이야기하는 동안, 코코와 모래 뺏기 싸움을 하던 알렉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겼습니다.”
“검술을 잘하면 이런 것도 잘하는 거니?”
“그럼요. 저는 다 잘합니다.”
“짜증 나.”
“분하면 한 번 더 하시죠. 어차피 또 지겠지만.”
코코가 울컥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레위시아는 알렉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는, 너처럼 대놓고 코코를 도발하는 애는 처음 본다고 감탄했다.
두 사람의 모래 뺏기 싸움을 눈여겨보던 율리아가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러곤 봉긋하게 쌓은 모래 위에 자신의 긴 머리핀을 꽂았다.
코코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도 하게?”
“재밌어 보여요.”
“이게 생각보다 엄청 어렵거든? 너처럼 겁 없이 막 가져가는 애들은 꼭 지게 되어 있어.”
“나한테 지고 화내지나 마요.”
코코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알렉사가 희한하게 잘하는 거지, 율리아한테는 자기가 질 리 없다고.
“제가 먼저 할게요.”
율리아가 두 손을 쫙 펼치더니, 모래를 크게 한 움큼 가져갔다. 그다음엔 코코, 마지막이 알렉사였다.
그렇게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모래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핀도 한쪽으로 기울어 바람만 불어도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코코 차례예요.”
“시끄러워. 말 걸지 마.”
코코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신중하게 손가락 끝을 모래에 갖다 대더니. 정말 손톱만큼의 모래를 긁어냈다.
“됐다!”
하필이면 그때 바람이 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태롭게 기울었던 머리핀이 픽 쓰러졌다.
율리아가 코코를 보고, 알렉사도 코코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졌네요.”
“졌어요.”
코코는 화내지 않았다. 확 짜증을 내며 모래를 엎어 버릴 줄 알았는데, 말없이 새 언덕을 만들었다. 그러곤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전하, 덤벼요.”
“알렉사는 못 이기겠고, 율리아한테도 지니까 이제 만만한 나구나.”
“알면 빨리 이리 와서 앉으세요.”
“싫어. 나까지 코코를 이겨 버리면 울면서 아빠한테 이를 거잖아. 내가 힌치 백작을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질까 봐 무서워서 안 하는 게 아니고요? 왕자궁에서 왕자님이 최약체란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맞아. 난 연약해. 한 떨기 코스모스 같은 남자야.”
레위시아에겐 전의가 없었다. 코코가 승부 욕심도 없는 재미없는 남자라고 놀려도 소용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율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힌치 백작님은 요즘 뭐 하세요?”
“우리 아빠야 뭐, 집에서 술 먹겠지.”
“상단은 잘 돌아가겠죠?”
“아빠가 제일 잘하는 일이 그건데 그럼…….”
거기까지 말하던 코코가 모래를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러곤 율리아에게 말했다.
“그건 왜 물어보니.”
“상인연합 대표를 치우고, 그 자리에 힌치 백작님을 추천하려고요. 그러니까 코코가 도와주세요.”
부지런히 모래를 두드리던 코코의 손이 우뚝 멎었다. 알렉사도 다음 싸움을 준비하다 말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상인연합.
알렉사에겐 잊을 수 없는 단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인연합이 추천한 사업에 손을 댔다가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고, 상인연합이 데리고 있던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가 결국 목숨을 끊고 말았다.
어린 알렉사를 용병으로 만들어 노예처럼 부리고, 빚을 다 갚았는데도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알렉사 같은 피해자가 많아요. 사채는 물론이고, 노예 거래에,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고, 심지어는 인신매매까지 한 거로 알아요.”
“상인연합은 단체야. 대표를 끌어내린다고 해서 그걸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힌치 백작님이 그 자리에 앉으셔야죠.”
코코가 만든 모래언덕 위에 또 한 번 율리아의 머리핀이 꽂혔다.
이번에도 순서는 같았다. 율리아가 두 팔을 벌려 모래를 잔뜩 끌어왔다.
“지금 상인연합 대표로 앉아 있는 사람은 마조람 후작의 먼 친척이야. 놈을 고발하려면 증거가 충분해야 해. 안 그러면 역으로 당할 수도 있어.”
“증거는 충분히 모을 수 있어요. 알렉사가 도와주기만 하면.”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알렉사가 물었다. 코코가 모래를 끌어가고, 이번에는 그녀의 차례였다. 알렉사는 눈으로 율리아를 보면서 손으로는 모래를 가져오는 기예를 선보였다.
율리아가 씩 웃었다.
“범죄자들을 때리고, 협박하고, 잡아 가둬야죠. 그들이 제 손으로 증거를 갖다 바치고 자백할 때까지.”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네요.”
알렉사도 씩 웃었다.
곧이어 봉긋하던 모래가 거의 다 사라지고, 가운데 꽂혀 있던 머리핀이 위태롭게 기울었다.
이번에도 코코가 할 차례였다. 그녀는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이고 손끝에 집중했다.
“코코, 꼭 그렇게까지 해서 이겨야겠어? 추하게 승부에 집착하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나처럼 좀 둥글게 살아. 평화롭게, 착하게.”
레위시아가 하하하 웃으며 코코를 놀리고 있을 때였다.
그들뿐이던 모래사장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별로 빠르게 걷는 것 같지 않았는데, 보폭이 커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검은 셔츠에 짙은 회색 슈트를 입은 카루스였다.
“어…….”
레위시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재빨리 닫았다. 코코는 그토록 신중하게 긁어내던 모래 위에 손바닥을 콱 짚고 벌떡 일어섰다.
카루스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있었군.”
“카루스 님.”
율리아가 모래를 탁탁 털고 일어나 카루스와 왕자궁 식구들 사이에 섰다. 그러곤 뻔뻔한 얼굴로 서로를 소개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 전하와 코델리아 힌치, 그리고 알렉사 콴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카루스 란케아, 제 후원자님이고요.”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모두 그런 얼굴을 했다.
율리아가 다시 뻔뻔하게 말했다.
“소개해 달라면서요.”
“내가 언제. 수상하다고 했지.”
코코가 대놓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레위시아가 코코의 입을 막고 실례했다며 하하하 웃었다.
시녀들이 모래투성이가 된 드레스와 신발을 정돈하는 동안, 레위시아는 카루스와 함께 조금 떨어진 해변을 걷기로 했다.
“천천히 해.”
코코가 부산스럽게 치마를 털며 알았다고 말했다. 알렉사는 레위시아와 카루스에게 관심이 없었고, 율리아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렸다.
“가시죠.”
카루스가 먼저 걷고, 레위시아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보니 레위시아의 시야 한쪽에 카루스의 뒷모습이 절묘하게 걸쳐졌다.
넓은 어깨와 반듯한 허리, 전신을 감싸는 슈트가 무색하게 그의 온몸에선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다. 무혈 제독이라고 했던가. 바이칸 제국에서 감히 상대할 자가 없었다던 검술의 달인, 노련한 전술가.
율리아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무슨 말로 친분을 나눠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레위시아는 아무나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는데, 유독 카루스 란케아 앞에서는 말을 고르게 되었다.
“율리아를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결국 율리아 얘기였다.
카루스가 슬쩍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왕자께서 감사할 일입니까?”
“제 시녀니까요.”
“그땐 아니었습니다.”
어쩐지 꺼끌꺼끌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적의라고 하기엔 그의 태도가 정중했다. 짧게 멈칫했던 레위시아가 다시 자연스럽게 걸으며 물었다.
“마조람 후작을 치죄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왜 오르테가를 지키려 하십니까?”
당신은 황제의 기사가 아닌가. 레위시아가 물었다.
카루스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 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다.
“오르테가를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율리아를 얻으려는 겁니다.”
레위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카루스도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 위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레위시아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는 평소처럼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이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루스가 고개를 비틀고 레위시아를 바라보다 말했다.
“너는 왕좌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야.”
레위시아는 카루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태어나지는 않았지.”
그는 이제 웃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남자다.”
긴 머리카락을 애써 그러모으던 레위시아가 손을 내려 주머니에 넣었다. 바닷바람이 거셌지만,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내버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