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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104/319)

93화

그녀의 말대로였다. 1왕자가 살해당한 뒤, 왕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중앙 광장에 흰 꽃을 바치기 시작했다.

생화부터 시작해서 종이꽃, 때로는 화려한 바구니가 놓이기도 했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죽은 1왕자를 안타깝게 여겼다.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오르테가의 왕자이니 정성을 다해 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흉흉해진 거리의 분위기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만 수상쩍어도 질질 끌어다 고문하고,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면 금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분노와 불신은 칼이 되어 원망할 대상을 찾아 헤맸다.

“왜 거기다 꽃을 놓는 거야! 더럽게! 저 시든 꽃들이 쓰레기가 되어 뒹구는 거 안 보여?”

“뭐? 쓰레기라니,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이건 불쌍한 왕자 전하를 기리는 꽃인데! 너 인마 해방군이지?”

“왕자 좋아하네. 해방군이 죽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 내가 해방군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해방군이게? 하! 나 참, 우리 집 개도 해방군이다!”

“저 새끼 잡아!”

백성들이 싸우고 있었다. 해방군도 아니고, 병사들도 아니고,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힘없는 백성들이 저들끼리 싸웠다. 그들은 그저 병사들의 폭압에 겁먹은 피해자일 뿐일 텐데.

누군가 흰 꽃이 쌓인 제단에 돌을 던졌다. 한 사람이 돌을 던지자, 이후엔 여러 사람이 돌을 던졌다. 크고 작은 돌들이 엉성한 제단을 무너뜨렸다.

1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던 사람들은 그들을 말리기 위해 멱살을 잡았다. 멱살은 주먹질이 되고, 이내 패싸움이 되었다.

“죽여! 저 새끼 잡아!”

“너희 다 고발할 거야! 여기 해방군이 있다!”

비 오는 광장에서 백성들이 한데 뭉쳐 싸웠다. 병사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만 질렀다.

율리아는 마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보며 침묵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카루스는 이제 율리아의 숨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기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신경 쓰지 마.”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창문을 가렸다.

“네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세상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고,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도 몰라. 그냥 널…….”

위로하고 싶었을 뿐이다. 카루스는 그렇게 말하려다 돌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율리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괜찮다며 창문을 가린 카루스의 손을 잡아 내렸다.

율리아를 왕자궁 입구까지 데려다준 뒤, 카루스는 마차를 타고 관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독님, 광장이 복잡하니 조금 돌아서 가겠습니다.”

“알았다.”

마부가 그에게 양해를 구하곤 방향을 틀었다. 중앙 광장에서 일어난 패싸움 때문이었다. 카루스는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또 율리아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미쳤다고 말했다. 정상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잘해 주지 말라는 말로 카루스에게 또 한 번 선을 그었다.

하지만 카루스의 눈에 비친 율리아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오히려 너무 인간적이어서 문제였다.

타인의 감정, 처지, 세상을 향한 관심,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

율리아의 마음엔 그런 것들이 있었다. 복수에 성공하기 위해 미쳤다는 말로 자신의 맹목적인 분노를 포장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그의 눈엔 안쓰럽기만 했다.

‘위로는 무슨.’

널 위로하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누가, 어떻게, 감히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카루스는 율리아가 겪었던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숨이 막혔다.

이해한다는 건 위선이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그조차 쉽지는 않으리라.

카루스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바라보았다. 율리아가 잡았던 손이었다. 그녀의 손은 언뜻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체온이 희미했다.

그래서일까. 닿을 때마다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안 돼.’

습격이 있던 출정식 날, 그는 왕족의 단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엔 레위시아 왕자가 있고, 그곳엔 율리아가 있을 터였다. 괴한들은 왕족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왕족의 시녀인 율리아는 그 눈먼 화살 하나에도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칼을 들고 놈들 사이로 뛰어들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다. 동시에, 율리아의 곁에서 그녀가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지키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카루스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간 뒤에야 자신이 이성을 잃은 채 율리아를 향해 달려왔음을 깨달았다.

‘레위시아를 지키고 있었지.’

그때 율리아는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노출하고 있었다. 습격이 멈췄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그녀 역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겁먹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소름 끼치게 차분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레위시아와 시녀들의 안전을 확인한 후엔 다른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파악했다.

카루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화를 내면서 데려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고, 곁에 두고 지키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낯설어 냉정을 잃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왜 이러는 것인지 몰라 당황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순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녀석들에게 자신을 노출하고 말았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그리고 블라이스 백작까지.’

짐승은 천적을 알아본다. 카루스는 그때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두 남자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레위시아 오르테가의 눈동자.

위험하게 일렁이던 블라이스 백작의 눈동자.

처음엔 두 사람 다 카루스를 보고 있었다. 그런 뒤엔 서로의 존재를 느꼈는지, 번갈아 가며 신중하게 상대를 탐색했다.

‘유약하고 예쁘장한 줄만 알았더니.’

레위시아도 사내였다. 블라이스도 다르지 않았다.

* * *

마조람 후작은 최근 그의 가문에 액운이 끼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바실리부터 크리스틴, 비자금과 1왕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재수 없는 일들이 그의 가문에만 일어나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정말 묻고 싶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미치겠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어. 1왕자가 죽다니. 내가 그동안 그 녀석한테 들인 공이 얼마인데.”

후작은 평소 찾지도 않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집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손을 휘휘 내저어 그를 쫓았다.

후작 부인의 얼굴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아들 바실리가 실종되었을 때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인데, 1왕자가 죽은 뒤론 유독 신경이 날카로웠다.

“왕은 뭐 하고 있어요?”

“해방군의 씨를 말릴 기세야. 범인이 특정된다면 일가친척까지 참살할 기세더군.”

“왕비는요?”

“우리를 원망해.”

후작이 짜증스레 얼굴을 문질렀다.

“1왕자를 지켰어야 했다고. 그를 살해하려 하는 자들이 왕국 안에 있었는데 알아채지 못했다고, 그걸 막지 못했다고 우릴 원망해.”

“그게 왜 우리 탓이죠. 왕가가 무능한 탓인데.”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잔에 담긴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켠 후작이 잔뜩 인상을 썼다. 술을 마셔도 답답한 마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해방군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끊어야겠소. 당신도 명심하시오. 누가 됐든 우리가 해방군에게 돈을 쥐여 주었다는 사실을 추적할 수 없도록.”

“우린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소. 혹시라도 국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어.”

마조람 후작은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가 쥐고 있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다시는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빈손이었던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만큼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난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갈수록 꼬이고 있어. 도대체 내 주위엔 왜 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헛소리하지 마세요.”

후작 부인이 결국 화를 냈다. 날카로운 질책이 후작에게 쏟아졌다.

“해방군은 당신 책임이잖아요.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들을 통제해요? 일이 잘못됐다고 해서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당신이 벌인 일이니까, 당신이 책임져야죠!”

“그게 왜 내 탓이오!”

“그럼 누구 탓일까요!”

후작 부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후작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이를 악다물고 말했다.

“해방군이니 뭐니 하는 떨거지들 데리고 대장 놀이할 시간에, 진짜 힘을 길렀어야죠. 그 멍청한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해방군은 범인이 아니오! 1왕자를 죽이지 않았어!”

“놈들이 그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게 중요해요? 온 세상이 해방군을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으니까 당장 수습하세요. 싹 다 죽여서라도 마조람에 해가 되지 않게, 똑바로 처리하라고요.”

후작 부인의 말은 마조람과 연결된 해방군을 전부 죽여서라도 흔적을 없애라는 뜻이었다.

후작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동맹 관계였던 두 개의 가문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소. 샤트린 공주의 세력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더군. 심지어 가신 중에서도 배신자가 나왔어.”

“신경 쓰지 마세요.”

“박쥐 같은 놈들.”

후작은 그를 배신한 가문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단순히 이익에 의해 뭉친 파벌이라 해도 그동안 동맹으로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어떻게 1왕자가 죽은 지 열흘 만에 등을 돌릴 수가 있단 말인가.

허탈해하는 후작에게 후작 부인이 말했다.

“그런 떨거지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부인.”

“기억하세요. 우린 마조람이에요.”

마조람은 오르테가의 기둥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들려선 안 된다. 시련은 짧고, 권력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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