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네.”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스는 화내지 않았다.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율리아의 단호한 눈을 마주하니 차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율리아.”
“다시 시작하게 되면, 당신은 어차피 날 기억하지 못해요.”
그녀는 결국 카루스에게 처음 보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삶을 반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죽는 순간의 고통이 아니었다. 복수에 매번 실패했다는 자괴감도 아니었다.
잊히는 것이다.
율리아가 어렴풋이 웃었다.
“저를 구원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몇 번째부터 미쳐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도 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거든요.”
미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카루스는 율리아가 반복했던 죽음의 순간에 관해 물어볼 수 없었다. 그녀의 숨을 거뒀던 게 꼭 타인의 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율리아가 또 한 번 강조해서 말했다. 그녀는 카루스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죄책감을 짊어질 자신이 없었다.
카루스는 관저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도 그에게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두 사람이 침묵하는 마차 안엔 요란한 빗소리만 가득했다.
관저에 도착한 뒤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중간에 마주친 맥스웰이나 바바슬로프도 전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코코가 카루스 님께 물어보고 오라고 했어요. 해방군이 습격에 사용했던 석궁에 대해서요.”
“그건 오르테가에서 개조한 물건이 아니야.”
카루스는 해방군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율리아의 의견도 그와 같았다.
“알렉사가 그러는데, 바이칸의 전쟁터에서 많이 쓰인다면서요.”
“그 석궁이라면 나도 하나 가지고 있지.”
카루스는 이미 습격에 사용됐던 석궁을 하나 빼돌려 간직하고 있었다. 참사 당일 그의 부하들이 은밀하게 가져온 거라고 했다.
“정말인가요?”
“그 시녀의 말이 옳아. 그런 의미에서 이건 결정적인 증거가 못 돼. 돈만 있으면 아무나 들여올 수 있으니까.”
“제가 의심하는 건 그들을 특별 사면한 시기예요.”
“왜 하필 풀려나자마자 사고를 쳤냐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몸을 사려야 정상이잖아요.”
“맹목적인 자들이잖아.”
또 있었다.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말했다.
“그들을 사면해 주자고 제안한 게 블라이스 백작이라는 사실이 제일 의심스러워요.”
“실은 나도 그래.”
“블라이스 백작이 진범이라면 그가 노리는 건 뭘까요. 지난번에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자신은 길조가 아니라 흉조라고. 순진한 친제국파가 친하게 지내자며 접근하는 게 우습다고.”
“아무래도…….”
“전쟁이겠죠.”
율리아와 카루스는 블라이스 백작이 이번 일의 배후일 거라 믿었다. 증거는 필요 없었다. 그를 재판대에 올릴 것도 아니니, 진실을 아는 게 더 중요했다.
“카루스 님, 블라이스 백작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건 황제일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너무 일찍 죽었던 몇 번을 제외하고, 황제는 언제나 오르테가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거든요.”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보호 동맹으로 강력하게 묶여 있는 두 국가가 서로를 적대하기 위해선 더 큰 명분이 필요하다.
카루스는 습관처럼 창문을 확인했다. 그러곤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 율리아에게 말했다.
“폐하는 내게 남부를 안정시키라고 하셨지.”
황제는 카루스와 블라이스에게 정반대의 명령을 내렸다. 카루스에게는 남부를 안정시키라고 말하고, 블라이스에게는 혼란을 일으켜 전쟁의 씨앗을 심으라고 말했다.
“황제는 카루스 님과 데네브라 황비의 세력이 오르테가에서 상잔하길 원하네요.”
그렇다면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마조람 후작을 엿 먹일 방법을 찾으면 된다.
율리아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마조람 후작은 1왕자를 잃고 바빠질 거예요. 후작과 함께 1왕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겠죠. 당분간은 샤트린 공주가 우세하겠지만, 곧 4왕자에게 힘이 실리기 시작할 거고.”
“블라이스는 해방군을 부추겨 폭동을 일으키겠지.”
“그러고 보니…… 마조람 후작이 그동안 해방군의 활동 자금을 대고 있었어요. 카루스 님,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뭐?”
카루스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율리아가 그를 보며 말했다.
“해방군이 튀어나올 때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친제국파에 힘을 실어 줬으니까요. 후작은 그걸 위해 뒤에서 몰래 활동 자금을 대면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 쥐새끼 같은.”
카루스가 증거를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국왕으로부터 해방군 수색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그걸 들어주는 척하면서 조사해 보겠다는 것이다.
“저는 레위시아 전하를 무대 위로 올릴 거예요.”
“때가 되었나. 생각보다 이르군.”
다시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율리아는 요란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헤치고 마차로 다가갔다. 그러곤 마차 문을 열어 주는 카루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데려다주지.”
“네? 괜찮아요.”
카루스는 괜찮다는 율리아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율리아가 먼저 마차에 오르길 기다렸다가 뒤늦게 의자에 앉았다.
사방에 습기가 가득했다. 마차에 오르는 과정에서 비를 조금 맞았더니 앞머리가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율리아는 손가락을 세워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 물기를 닦았다.
카루스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율리아의 머리카락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작은 턱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었다.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린 물방울에 시선을 빼앗긴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것만 바라보았다.
연약한 물방울 하나에도 힘이 있다. 율리아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를 놀리듯 시선을 빼앗던 물방울이, 마차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툭 떨어져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카루스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이 숨까지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율리아가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그러니까 부하들이 카루스 님하고 겸상하면 체한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왜.”
“그렇게 지그시 바라보니까요. 꿰뚫리는 기분이 들거든요.”
카루스의 검은 눈은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새카맣고 맑은 보석 같았다. 오닉스가 사파이어처럼 투명해진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파헤쳐지는 기분인데.”
카루스는 율리아가 자신을 바라볼 때, 샅샅이 해체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관찰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요. 불편하시다면 자제할게요.”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게 되자 다시금 긴장이 차올랐다. 그들은 상대에게 온 신경을 빼앗긴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둘 다 괜찮지 않았다.
카루스는 율리아의 과거를 생각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첫 번째 삶부터 여덟 번째 죽음까지, 할 수만 있다면 밤새도록 그녀를 붙잡고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대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침묵했다. 율리아가 가엾어서 화가 났다. 가엾은 여자가 위험한 일을 자처하면서 잘해 주지 말라고 선을 그으니까 더 화가 났다.
카루스의 시선이 미묘하게 율리아를 비껴갔다. 그녀를 그의 시야에 담긴 하되, 눈여겨 바라보지는 않았다.
‘내가 만약 아홉 번을 다시 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만으로도 막막했다.
아홉 번의 삶. 여덟 번의 죽음. 여덟 번의 실패와 쓰러지지 않는 원수. 속절없이 잊히는 자신.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매번 자신을 만난다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카루스는 그날 티타니아 갈림길에서 자신의 행동을 깊이 후회했다.
좀 더 친절하게 굴었어야 했다. 좀 더 배려했어야 했다. 그때 율리아는 죽을 듯이 아팠을 텐데, 앓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아픈 여자를 윽박지르듯 끌고 눈보라 치는 산맥에서 내려왔으니, 그녀가 자신을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너는…….”
말을 걸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절로 입이 열렸다. 카루스는 그런 자신이 낯설어 얼굴을 찡그렸다.
다행히 율리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마차 밖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율리아가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이 지나고 있는 곳은 오르테가 왕궁 앞 중앙 광장이었다. 바깥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비를 뚫고 들렸다. 마차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사람들이 질서 없이 모여 있어, 마차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카루스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광장 중앙에 모인 사람들이 뭐라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해방군’이니 ‘불쌍한 1왕자’니, ‘피도 눈물도 없는’ 같은 말들이었다.
“광장에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율리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