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적인 관계가 되고 싶은데
카루스는 한동안 관저에 머물며 제국군을 단속했다. 오르테가 국왕으로부터 해방군 수색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해적을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율리아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는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그는 이날도 율리아를 데리러 왕자궁에 직접 나타났다. 왕궁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마차에서 내리진 않았지만, 정문까지 율리아를 따라 나온 코코가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자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무 일도 없어요.”
“날 노려보는데.”
“코코는 원래 아무나 노려봐요.”
율리아가 재빨리 창문을 열고 코코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코코는 코웃음 칠뿐 마주 인사하지 않는데도,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뭐 하는 거지?”
“코코가 걱정해요.”
“뭐를?”
“당신이 나쁜 남자라서 절 이용하고 버릴까 봐.”
“그 반대가 아니고?”
카루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율리아가 그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제가 당신을 이용하고 버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남부 함대의 제독이 될 사람이 아니었으면, 네가 나한테 접근했을 것 같지 않아서.”
“제가 삶을 반복하면서 마조람 후작과 싸워 온 사람이 아니었으면, 카루스 님도 제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 거잖아요.”
“널 거둬서 내 집으로 보냈을 것 같긴 해.”
“뭐라고요? 저를요? 왜요?”
율리아는 진심으로 놀랐다. 너무 의외여서 저도 모르게 세 번이나 되물었다.
카루스는 그녀가 진한 초록색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눈썹을 휘어 올리며 까칠하게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넌 우리에게 생명의 은인인데, 당연히 거둬서 은혜를 갚았겠지. 너는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반응인 거지?”
“차갑고…….”
“차갑고?”
“냉정한 사람.”
카루스가 할 말을 잃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눈보라 치는 산맥 갈림길에서 만났던 날 이후 자신의 행보를 곰곰이 반추해 보기도 했다.
“난 내가 제법 마음이 넓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이 좁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알아.”
그가 마부에게 관저로 가자고 말했다. 마부는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며 창문을 잘 닫으라고 외쳤다.
바깥에선 정말로 비가 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꽤 굵었다. 마차 지붕과 창문을 때리듯 두드리는 빗소리에, 율리아의 시선이 절로 창밖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자 귀족들이 가까운 건물을 향해 헐레벌떡 달렸다. 그중엔 남자의 외투를 벗겨 머리 위에 뒤집어쓴 여자도 있었고, 남들은 다 달려가는데 혼자 느긋하게 걷다가 친구들에게 끌려가는 남자도 있었다.
율리아는 비를 구경하고, 카루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빗소리를 감상했다. 마차는 일정한 속도로 달려 왕궁을 빠져나갔고, 이내 바닷가를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율리아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카루스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날 왜 단상으로 올라오셨어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저한테 달려오신 거예요. 제가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그러셨던 거면…….”
“나도 몰라.”
“카루스 님.”
“내가 그 이유를 알았으면 그때 무슨 임기응변이라도 발휘해서 상황을 모면했겠지.”
율리아가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거기서 죽었어도 다시 살았을 거예요. 똑같은 날에, 똑같은 곳에서. 당신은 또 똑같이 말할 거고요. 산맥 갈림길에서 얼어 죽어 가는 널 발견했다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저를 걱정하지 마세요.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말고요. 저는 죽지 않아요. 얼마나 대단해요. 어떤 사람들은 다시 살게 해 달라고 매일 신께 빌기도 할 텐데.”
자신에게는 저주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소원일 수도 있다고, 율리아가 말했다.
카루스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율리아가 말했던 것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네가 부나방처럼 아무 위험에나 뛰어들어 죽으려고 하는 걸 무덤덤하게 지켜보면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