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코코는 알렉사와 함께 왕자궁을 단속하겠다고 했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옷을 준비하기 위해 그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옷을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녀들이 잘 보관해 놓은 걸 꺼내 놓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레위시아는 창가에 서 있었다. 한데 그가 뭘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율리아는 그가 과거를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날씨는 더웠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따뜻한 차라도 내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조심스레 찻잎을 고르는 율리아에게 레위시아가 물었다.
“넌 형제가 없지.”
“네, 전하.”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아이들을 형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율리아는 그에게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만을 이야기해 주었다.
“형제라기보다는 경쟁자였어요. 먹을 것과 입을 것부터 시작해서 좋은 잠자리와 보육 교사의 관심, 그 모든 게 부족했으니까요. 머리가 좀 큰 뒤에는 입양을 원하는 부모가 올 때마다 살벌한 눈치싸움을 했죠.”
“왕족도 별다르지 않아.”
레위시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난 아주 어릴 때 알았어. 1왕자, 내 형님과는 절대 공생할 수 없다는 걸.”
“전하.”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했거든. 1왕자께서 왕좌에 오르거든 멀리 달아나라고, 형제의 손에 죽지 말라고 충고했지. 그때 우린 겨우 열 살 남짓이었는데.”
그 어린 것들이 얼마나 대단하게 권력욕이 있어서 형제를 죽이려고 계획했겠냐며, 어쩌면 그들이 서로를 미워했던 건 환경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안쓰러웠다.
“전하, 왜 전하께서 죄책감을 느끼세요.”
“내가?”
“전하는 이번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어요.”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이요?”
“형님도 그리 행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
레위시아는 1왕자궁에서 울부짖는 왕비를 보았다. 그녀는 왕비의 체면 같은 건 전부 집어던진 채 의사들에게 매달려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사이가 소원한 것으로 유명한 국왕조차 왕비를 품에 안고 달래느라 진을 뺐다.
아들의 침대에 매달려 흐느끼던 왕비는 샤트린과 함께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레위시아를 몇 번이나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누가 보더라도 짙은 원망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샤트린이 미안해하더라고. 어머니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그렇다면서, 이 방 안에서 원망할 대상을 찾은 게 하필이면 나인 것 같다고.”
레위시아는 왕비가 자신을 왜 노려봤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형님이 죽어서 그런 거야.”
“전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왕족 중에서 누구 하나가 죽는다면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여야 하는데, 소중한 아들이 죽게 생겼으니까.”
그곳엔 국왕과 왕비, 샤트린과 4왕자까지 모든 왕족이 모여 있었다. 레위시아는 그런 상황에도 동석을 허락받지 못하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여웠고, 또한 그들 중 누구에게도 가족이라 여겨지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가여웠다.
“율리아.”
레위시아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놓였다. 평소 율리아와 그의 취향은 씁쓸하거나 구수한 것들이었는데, 이번 것은 향기롭고 달콤했다.
의자에 앉아 찻잔을 바라보던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만약 형님이 왕위에 올랐다면, 그는 나를 살려 두었을까?”
율리아가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최근 살이 조금 빠진 탓인지 그의 얼굴선이 날카로웠다.
“제가 솔직하게 말하길 바라세요?”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가장 바라는 게 그거야. 거짓말하지 않는 것.”
“그분은 전하를 살려 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가 바란 대로, 율리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1왕자는 레위시아를 봐주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랬다. 코코와 손을 잡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왕자는 레위시아는 죽이거나, 죽게 놔두거나, 죽을 만한 곳으로 보냈다.
“그렇구나.”
레위시아가 하하하 웃었다. 그러곤 찻잔을 잡는 대신 율리아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그런 식으로 형제를 죽이려는 자가 행복할 리가 없지.”
“전하.”
“형님이 마조람의 인형으로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꼈을 리가 없어.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인간이지만, 그런 것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을 거야.”
레위시아는 율리아의 손가락 끝을 아주 살짝 잡고 있었다. 잡은 건지 닿은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너무 어려워졌다.
두 개의 손바닥이 다 맞닿도록 잡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레위시아가 또 한 번 하하 웃었다. 웃음으로 마음을 감추었다.
그때 율리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전하.”
그녀는 레위시아를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워했던 형제이지만 이런 식으로 잃게 될 줄은 몰랐을 테니, 슬프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시원섭섭할 수도 있었다.
“난 왜 왕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그건 전하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세상에 어떤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겠어요.”
율리아가 레위시아의 곁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잡고 달래듯 쓰다듬었다.
“율리아, 만약에…….”
레위시아가 고개를 숙여 율리아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댔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깃털 같은 접촉이었다. 그는 아주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왕족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율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그래도 우리는 만났을 거라고 위로할 수 없었다. 침묵하는 그녀의 어깨 위에 레위시아의 한숨이 내려앉았다.
그는 슬퍼했지만, 끝까지 울지 않았다.
“전하!”
깊은 새벽이었다. 밖에서 기사들이 레위시아를 찾았다.
율리아의 손을 잡고 긴 시간 마음을 다스리던 레위시아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레위시아 전하! 어서 1왕자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왕실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모두 망토와 휘장을 떼고, 무기조차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형님이 돌아가셨구나.”
왕궁에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레위시아는 말없이 율리아가 건네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1왕자궁으로 가기 위해 움직였다.
안개가 짙었다. 바닷가에서 몰려오는 안개였다. 안개 짙은 여름날에 죽은 사람은 낙원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바다 위를 헤맨다던데, 모두가 부디 어서 해가 떴으면 하고 바랐다.
이날 다음 대의 왕이 될 거라 믿었던 1왕자가 죽었다.
세 발의 화살 중 두 발이 치명상이었다. 다른 왕족은 모두 무사한데, 유독 그의 몸에만 화살이 세 대나 박혀 있었다.
하녀들의 눈이 붉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잘 모르거나, 그를 미워했던 사람도 모두 눈물을 글썽였다. 왕궁을 뒤덮은 슬픔에 새벽 공기가 유난히 서늘했다.
* * *
1왕자의 죽음은 오르테가를 빠르게 변화시켰다. 질서는 무너지고, 공포와 분노가 사람들을 지배했다.
습격이 해방군의 짓이라 단정한 국왕은 1왕자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왕국 전역에 척살 명령을 내렸다. 해방군을 밀고하는 자에게는 금화를, 직접 처단하는 자에게는 그보다 더한 액수를 내걸었다.
해방군의 은거지를 추적하는 병사들이 거리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들은 조금만 수상해 보여도 죄다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감옥은 연일 고문당하는 사람으로 가득 차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족들의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특별사면까지 시키면서 용서해 줬는데, 어떻게 1왕자를 죽일 수가 있냐며 분노했다.
이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며, 용서할 수 없는 살인 행위였다.
처음엔 백성들도 왕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습격 장소에 있었던 자들은 그때 느꼈던 공포심에 빠져 알아서 몸을 사렸다. 왕의 마음을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못 본 척했다. 억울한 사람이 잡혀가거나, 병사들의 폭력이 지나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머지않아 백성들의 불만이 밖으로 터져 나올 거라고 말했다.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코코가 짜증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1왕자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도 열흘이 지났다. 오르테가는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불안해 보였다.
코코가 보고 있던 책은 무기에 관련된 군사 서적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던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페이지만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사가 코코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그러곤 율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범인은 해방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