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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99/319)

89화

첫 화살이 날아오던 순간, 율리아는 레위시아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위시아는 빠르게 몸을 숙이며 율리아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알렉사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알렉사가 순식간에 달려와 레위시아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레위시아는 의자째로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기사의 방패를 빼앗은 알렉사가 그를 방패로 덮었다.

코코는 단상에서 물러나 레위시아를 가리고 섰다. 화살이 날아오면 몸으로 막아 그를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율리아는 누구도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두 번째로 화살이 날아온 순간, 율리아는 자신을 잡아당기려는 알렉사를 뿌리치고 코코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고 제 뒤로 보냈다.

“율리아!”

“숙여요!”

다른 왕족들은 기사들이 몸으로 화살을 막고 난리가 났는데, 레위시아는 희한하게 시녀들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보다 시녀들의 반응 속도가 빨랐던 탓이었다.

카루스가 단상 위로 뛰어 올라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의 검은 망토가 크게 휘날렸다. 그는 큰 소리를 내며 왕족의 단상 위로 뛰어 올라와 곧장 율리아를 찾았다. 다른 왕족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율리아만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율리아와 카루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너는 도대체……!”

그가 화를 냈다. 율리아가 또 제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방패로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 많은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카루스는 율리아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자신이 그녀를 가로막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레위시아는 카루스가 단상에 올라온 뒤 오직 율리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교묘하게 율리아를 보호하듯 서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단상 앞 귀빈석에 앉아 있다가 뒤늦게 위로 올라온 블라이스가 카루스와 율리아, 그리고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블라이스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세 남자가 서로를 인식했다. 행사장을 공황에 빠뜨린 습격과는 상관없는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카루스는 블라이스를, 블라이스는 레위시아를, 레위시아는 카루스를 노려보았다.

율리아를 사이에 두고 세 남자가 서로를 감정하고, 경계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정작 그녀는 습격이 멈춘 후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습격한 자들을 찾아라! 행사장을 봉쇄해!”

“왕자님이…… 전하! 1왕자 전하께서!”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뭣들 하느냐! 의사를 불러라!”

율리아의 시선이 단상 오른쪽으로 향했다. 화살을 맞은 건 국왕도, 왕비도 아니었다.

1왕자였다.

1왕자의 가슴과 어깨에 세 개의 화살촉이 박혀 있었다. 그의 입에서 시뻘건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경련하듯 온몸을 떨던 1왕자가 짧은 숨을 컥컥 몰아쉬었다.

“의사! 의사는 어디 있느냐!”

국왕 부부가 절규했다. 1왕자의 상처는 누가 보기에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녀들이 드레스를 찢어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지만, 피가 멈추질 않았다.

“해방군 이 새끼들이…….”

누군가 중얼거렸다. 기사인지, 병사인지 알 수 없었다. 귀족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흉수의 정체가 해방군이라는 데에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 * *

1왕자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왕궁 전체가 뒤숭숭했다. 왕궁 기사단과 제국군까지 동원되어 행사장을 봉쇄하고 조사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가 한꺼번에 달아났기 때문에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

건진 거라곤 바닥에 버려진 석궁과 화살뿐이었다.

“네 후원자가 무혈 제독이었니?”

코코가 다그치듯 물었다.

율리아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 당시 카루스가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눈치 빠른 코코가 두 사람의 관계를 금세 알아챈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왜 말 안 했어? 그런 거물이 네 뒤를 봐주고 있었단 말이야? 마조람 후작이 알면 밤잠은커녕 밥도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겠다!”

“빨리 알려져 봤자 후작의 경계심만 키울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후작이 저를 같잖게 여길수록 싸우긴 편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는 말을 했어야지!”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코코, 카루스 님은 겨울의 마지막 날에 오르테가의 국경을 넘었어요.”

“뭐? 그게 언제야.”

“하이에나들에게 쫓기다가 티타니아 산맥에서 얼어 죽어 가고 있을 때, 저를 구해 준 사람이 카루스 님이에요.”

코코가 입을 떡 벌리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알렉사도 많이 놀랐는지 게슴츠레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이번에는 알렉사가 물었다.

“그 사람은 황제의 기사잖아요. 왜 율리아를 돕는 겁니까?”

“마조람 후작이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거기에 전임 사령관과 남부 함대가 연루되어 있었어요. 카루스 님은 그걸 바로잡기 위해 파견되었죠.”

“아…….”

코코가 모든 걸 이해했다는 얼굴로 긴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전임 사령관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구나. 무혈 제독이 처리했으니까. 그래. 마조람 후작도 그래서 비자금에 문제가 생겼고, 그 뒤에…….”

코코는 왕자궁 응접실을 정신없이 오가며 말을 늘어놓았다.

“어쩐지. 평범한 후원자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지. 그 금화 상자부터 시작해서, 맥스웰도 그렇고. 가만, 그럼 그 돈은 해적의 금화였던 거니?”

“네.”

“맙소사. 전임 사령관은 오르테가에서 엄청 오래 있었다고. 그동안 비자금을 모았으면 한두 푼이 아니었을 텐데, 그걸 다 무혈 제독이 빼앗았어?”

“네.”

“그러고 보니 왕궁에 나타난 시기도 의심스러워. 1왕자와 샤트린 공주가 같은 날에 연회를 열고 싸울 때, 국왕이 그자를 데려왔었지. 그거…… 설마.”

“맞아요. 제가 그날 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너희 도대체 무슨 사이니?”

코코가 물었다. 어지럽게 응접실을 돌아다니던 그녀가 율리아 앞에 서 있었다. 알렉사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이라니, 제 은인이고 후원자예요. 제가 무사히 왕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고, 왕궁에 들어온 뒤에는 바깥에서 지원을…….”

“세상의 모든 후원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 귀족의 후원으로 아카데미를 다녔던 너라면 잘 알 텐데.”

보통은 집사나 시종을 시켜서 필요한 만큼의 돈만 보내 주고 만다.

“세상에 어떤 후원자가 그 위험한 상황에서 후원인이 화살에 맞을까 봐 몸으로 막고 서 있니. 그 남자는 그 중요한 자리에서 국왕이고 사절이고 다 상관없이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달려왔어.”

그 이유는 율리아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카루스는 그녀가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걸 무척 싫어하니까,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코코의 말을 가만히 듣던 알렉사가 율리아에게 대놓고 물었다.

“율리아, 그를 좋아합니까?”

“그런 건 불가능해요.”

“저는 남녀 사이에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생명을 구원받은 관계라면.”

율리아가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을 무슨 말로 설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일이라면 뭐든 객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의 감정을 말할 때는 유독 말을 잊은 사람처럼 난처했다.

다행히 1왕자궁에 갔던 레위시아가 돌아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다들 여기 있었네.”

그의 얼굴이 초췌했다. 1왕자는 긴 수술을 끝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하루가 지나는 동안 몇 번이나 고비를 맞았다. 1왕자 궁에는 왕비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코코가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어떻게 됐어요?”

레위시아의 얼굴이 이상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아…….”

“오늘 밤을 못 넘길 거야. 의사들이 다 똑같은 소리를 하니까 사실이겠지. 율리아, 검은 옷을…….”

무겁게 중얼거리던 레위시아가 습관처럼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얼른 레위시아가 내민 손을 잡았지만, 그의 얼굴엔 미묘하게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들 검은 옷을 입어. 왕족이 살해당하면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나이만큼 날짜를 세어 검은 옷을 입어야 해.”

“네, 전하. 준비하겠습니다.”

“율리아.”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불렀다. 왕자의 옷을 고르기 위해 앞장섰던 율리아가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

한데 레위시아는 입술을 한 번 달싹거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가 부르셨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코코가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밀었다.

“이럴 시간 없어요.”

그러곤 비보를 듣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하녀들을 모아 놓고 명령을 내렸다.

“다들 뭐 하니. 궁에 장식된 여름 꽃은 다 치우고, 흰 조화를 준비해. 한동안 술은 식사에 올리지 말고. 병사들에게도 전달해. 명심해. 1왕자 전하의 소식을 전하는 너희 목소리가 왕자궁 밖으로 나가선 안 돼.”

“네, 코코 시녀님.”

“말, 행동, 표정까지 항상 신중해. 왕족의 죽음 앞에선 별것 아닌 농담 한마디가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아무 데나 기웃거리지 말고.”

“네……. 명심할게요.”

하녀들이 겁먹은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흰옷과 흰 조화, 검은 옷을 준비해 두고 종이 울리면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오늘 밤은 모두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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