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2화 (98/319)

16. 세 명의 남자

여름 더위가 시작되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이른 더위였다. 늙은 뱃사람들은 지난 태풍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부두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밤바다에 흰 꽃을 뿌리는 사람이 늘었다. 물에 빠진 영혼을 달래는 오르테가의 방식이었다. 캄캄한 밤, 너울거리는 파도 위에서 춤을 추던 흰 꽃들은 아침이 되면 축 늘어져 모래사장으로 밀려오곤 했다.

비가 오려는지 공기가 축축하고 무거웠다. 밤이고 낮이고 바닷가엔 윗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선원이 많았다. 왕궁 경비들은 갑옷 안에 얇은 천을 넣어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냈다.

그렇게 더위가 맹위를 부리던 어느 날, 남부 함대 출정식이 시작되었다.

뿌우우우-.

거대한 뿔 나팔 소리가 기지 전체에 퍼져 나갔다. 작은 꽃잎이 눈처럼 쏟아지고, 바다 위엔 수십 척의 군함이 나란히 서서 위용을 뽐냈다.

바이칸의 국기가 펄럭이고, 바이칸의 국가가 울려 퍼졌다. 음유시인은 황제를 칭송하는 시와 제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출정식을 위해 모인 오르테가의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손뼉을 쳤다.

하지만 구경 나온 백성들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남의 나라에서 출정식이 웬 말이야? 여기가 오르테가 남부해안이지, 바이칸은 아니잖아?”

“쉿! 그런 말 하다가 잡혀갈라.”

“말도 제대로 못 하게 할 거면, 차라리 왕국 깃발 내려야지.”

때마침 국왕과 왕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국왕과 왕비를 필두로 왕의 자식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그 뒤엔 각 왕족을 모시는 보좌진과 측근 시녀들이 있었다.

왕족들은 행사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자리 잡았다. 임시로 단상을 만들어 높게 올린 자리였다. 가운데에 국왕 부부가 앉고, 오른쪽엔 1왕자와 4왕자가 앉았다. 왼쪽엔 샤트린 공주와 레위시아가 있었다.

“갈증이 나는데…… 율리아, 물 좀 갖다 줄래.”

명령을 내린 건 샤트린이었다. 율리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레위시아가 먼저 말했다.

“내 시녀한테 왜 네가 명령하냐. 내 시녀는 세 명인데, 네 시녀는 스무 명도 넘잖아. 쟤들 시켜.”

“쪼잔하긴.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소개하냐?”

“뭐? 자기소개? 너 지금 네 시녀한테 물심부름 좀 시켰다고 날 비난하는 거야?”

“그럼 칭찬해야겠냐?”

샤트린은 말로 레위시아를 이길 수 없었다. 별로 대단한 말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울컥한 샤트린이 레위시아의 손등을 꼬집었다.

“그렇게 재수 없게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 너 이제 보니까 하나도 안 착하네. 어릴 땐 안 그랬잖아?”

“무슨 당연한 소릴…….”

레위시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코코에게 향했다. 샤트린의 시선도 그를 따라 코코에게 향했다.

따분해하는 얼굴로 출정식을 바라보던 코코가 한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왜 그러세요, 전하.”

“아무것도 아니야.”

레위시아가 하하 웃었다. 샤트린도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싸우는 사이에 물을 가져온 율리아가 테이블 위에 컵을 올려놓았다.

뿌우우우-.

사람들의 시선이 바다로 향했다. 검은 깃발과 붉은 깃발이 동시에 휘날렸다.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대포에 불을 붙이고, 바다를 향해 열린 포문이 불을 뿜었다.

제국을 욕하고 국왕을 손가락질하던 백성들도 그 순간만은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이칸 제국은 오르테가 왕국을 보호할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황제 폐하 크세노 8세께서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를 남부의 수호자로 임명하셨습니다!”

“사령관께 경례!”

출정식의 주인공은 단연 카루스 란케아였다. 위명 자자한 무혈 제독의 얼굴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행사장을 빼곡하게 둘러쌌다.

카루스가 긴 망토를 휘날리며 바닷가에 따로 마련된 단상 위로 올랐다. 그의 어깨엔 묵직한 휘장과 함께 남부 함대 제독임을 증명하는 패가 장식되어 있었다.

카루스가 단상 위에 우뚝 서고, 기수가 우렁차게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의 국기와 남부 함대를 상징하는 깃발이 함께 휘날렸다. 그걸 시작으로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군함에서도 수많은 깃발이 깃대를 타고 올랐다.

웅장하면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장면이었다. 오르테가의 국민이라면 무혈 제독과 제국군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저들이 오르테가의 적이 된다면 상상하기 싫을 만큼 두려운 상대임이 확실하기에.

그때였다. 행사장을 둘러싼 군중 사이에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건 아주 은밀하게 시작된 일이었다. 열 명, 혹은 스무 명, 혹은 서른 명.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다. 모자를 쓰거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힘으로 군중을 헤치고 자리를 잡았다.

행사장은 바닷가에 마련되어 있었고, 귀족이 아닌 백성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바깥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자리를 찾기 위해 높은 곳으로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멀리서 제국군 병사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상 위엔 오르테가의 왕족들이 표정을 감춘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이 품에서 묵직한 석궁을 꺼내 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보다 그들이 석궁을 조준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건 언덕이었고, 왕족의 단상과 가까운 위치였다.

모두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군함을 바라볼 때, 그들은 왕족을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 표정을 감춘 왕족 사이에서 저 혼자 시녀들과 잡담을 나누느라 출정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사람.

쉬익-.

사람들은 화살이 석궁을 떠난 뒤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습격이다!”

수십 발의 화살이 왕족을 향해 날아들었다. 살벌하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콱 소리와 함께 단상과 바닥, 테이블에 꽂혔다. 쇠를 덧대 개조한 화살은 나무 테이블을 뚫고 들어갈 만큼 강력했다.

“전하를 보호하라! 놈들을 막아!”

기사들의 고함이 절박했다.

화살이 또 한차례 쏟아졌다.

“저리 비켜! 비키라고!”

“사람 살려!”

공황에 빠진 군중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 움직였다. 석궁을 쏜 자들은 두 번의 공격을 쏟아낸 뒤 군중 사이에 섞였다. 그들은 재빨리 석궁과 화살을 바닥에 버렸고, 군중 속으로 흩어진 뒤엔 얼굴을 가린 모자와 두건까지 벗어 던졌다.

출정식이 엉망이 되었다. 당황한 제국군 병사들이 모두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화살은 전부 오르테가의 왕족을 노렸기에 그들의 사령관은 멀쩡했으나, 그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카루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왕족의 단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왼쪽 끝에 앉아 있던 레위시아를 찾고 있었다.

샤트린이 앉아 있던 자리엔 공주를 지키는 기사들이 있었는데, 레위시아가 앉아 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카루스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망토가 크게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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