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블라이스는 즐거워 보였다. 눈꼬리를 실룩이며 진하게 눈웃음 짓던 그가 율리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또 같은 향기였다. 그에게서 짙은 사향이 흘러나왔다. 외부 테라스에 바닷가라 바람이 제법 부는 데도 그의 향기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율리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향수를 좋아하시나 봐요.”
율리아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향수를 쓰는 남자는 많지만 블라이스는 조금 특별했다. 그가 쓰는 건 성적인 의미의 향수였다. 황비의 정부라는 걸 굳이 냄새로 드러낼 필요까진 없을 텐데, 이 또한 의도적인 선택일 것이다.
블라이스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복숭아는 맛있었어?”
“그건 왜 보내신 거예요?”
“바이칸 황실에서 최고로 치는 게 오르테가의 과일이라서. 그중에서도 복숭아, 포도, 석류, 무화과.”
블라이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잡았다. 단단한 과일을 자르기 위한 것인지 날이 날카로웠다. 그는 식사하기 위한 자세가 아니라, 꼭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느낌으로 나이프를 잡고 만지작거렸다.
전채 요리가 다 차려졌는데도 두 사람 다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내가 쓰는 건 아주 평범한 향수야.”
블라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남자건 여자건, 아무나 쓰는 거지. 구하기도 쉽고. 바이칸의 귀족들은 싸구려라고 취급도 하지 않는, 그런 거야.”
“왜 그런 걸 쓰세요?”
“내가 뿌리면 냄새가 달라진다고 해서.”
들어 본 적 있었다. 체온이 높고 체취가 강한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했다. 같은 향수를 뿌려도 냄새가 확 다르게 느껴지는. 블라이스는 자신이 그런 경우라고 말했다.
“재밌잖아. 아무나 뿌리는 싸구려 향수인데, 나만 유독 다른 냄새가 난다는 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취향은 아니었으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사향이 크게 불쾌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전채 요리를 먹으려 하지 않자, 종업원이 다른 요리를 가져와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잘 구운 해산물과 과일, 각종 치즈와 샐러드가 놓였다.
율리아가 다시 물었다.
“저를 만나려고 하신 이유는요?”
“그냥 같이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이야.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저는 백작님과 친하게 지낼 마음이 없어요.”
율리아가 차갑게 거절하자, 그가 제법 다정한 척 물었다.
“내 나쁜 소문 때문이라면…… 해명할 기회를 줄래?”
“제게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너는 오르테가에서 내가 만난 유일한 동류이니까.”
웃음이 났다. 동류라니.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블라이스와 자신은 근본부터 달랐다. 그는 출세를 위해 짐승이 되길 자처했고, 율리아는 복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파괴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율리아.”
“당신과 내가 동류라면 이 세상에 동류가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을걸요.”
“그렇게 생각해?”
블라이스가 웃으며 되물었다.
“데네브라 님의 수족인 나는 그분의 손으로 원하는 걸 쟁취했지. 레위시아 왕자의 수족인 너는 그의 손으로 원하는 걸 쟁취하려 하고.”
“그건…….”
“아니라고 말할 셈이야? 내가 레위시아 왕자와 처음 마주쳤을 때, 네가 그의 그림자에 숨어서 넌지시 건넨 말이 뭔지 맞혀 볼까?”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도발에 응하지 마세요.’”
“귀가 밝으시네요.”
“레위시아는 아무 힘없는 애첩의 아들이잖아. 네가 그를 조종해서 얻으려는 게 뭔지 물어도 될까. 진짜 궁금해서 그래. 마조람 후작의 아들은 널 배신한 대가를 치렀고, 후작의 딸도 널 이용한 대가를 치렀던데.”
그럼 복수는 이제 끝난 거 아닌가. 도대체 그 힘없는 왕자를 등에 업고 평민 시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설마 왕좌라도 노리려고?”
블라이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집요한 남자였다. 율리아는 탐색당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율리아의 마음을 떠보고, 머릿속을 그려 보고, 그녀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녀의 영혼이 어떤 색인지, 심장은 따스한지, 사냥감인지 사냥꾼인지.
재미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상대를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블라이스가 율리아를 탐색하는 방식은 그녀가 타인을 관찰하는 방식과 많이 닮았다.
블라이스는 변수였다. 그는 율리아가 예측할 수 없는 상대였고,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백작님에 대해서.”
“설레는 대답이네.”
블라이스의 유치한 도발은 율리아를 유쾌하게 했다. 복숭아와 장미라니. 그건 순진했던 첫 번째의 율리아에게도 먹히지 않는 방식이었을 텐데.
율리아가 물었다.
“제가 어떤 반응을 보였으면 좋겠어요?”
블라이스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씩 웃을 때마다 창백한 얼굴에 볼우물이 깊게 파였다.
“기뻐해도 좋고, 화내도 좋아. 그런데 넌 너무 담담하네.”
“놀랍지 않으니까요.”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봐?”
“제 뒷조사를 성실하게 하신 모양인데, 그럼 잘 아시겠네요.”
“알다마다. 샤트린 공주가 저택과 금화, 작위까지 제시하면서 데려가려 애쓰는 시녀라면서. 난공불락의 마조람에 깊은 상처를 새긴 최초의 평민이라지.”
율리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재밌다는 얼굴로 블라이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날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 제국에서 온 젊은 백작이 바닷가 왕국의 평민 시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흔한 얘기잖아. 넌 이렇게 아름답고, 난 아주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남자거든.”
이 남자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할까. 율리아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블라이스는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누구보다 계산적이고 치밀한 남자였다.
카루스는 율리아에게 블라이스 백작을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율리아는 그와 싸우게 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대라 해도 괜찮았다. 겁먹고 피해 다닐 거였으면 이런 식으로 삶을 반복하지도 않았다.
카루스는 또 화를 내겠지만, 어차피 이 또한 새로운 시도일 뿐이니까. 율리아는 과감해지기로 했다.
블라이스는 완벽주의자였다. 사냥꾼이면서 책략가이기도 했다. 충동적인 바람둥이를 연기하며 율리아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당겨 반응을 관찰했다.
율리아는 그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블라이스는 모르겠지만, 그의 방식은 율리아가 즐겨 쓰는 수법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을 탐색할 때, 일부러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러면 당황한 상대의 가면을 쉽게 벗길 수 있었다.
블라이스가 나이프를 들고 두툼한 스테이크를 잘랐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스테이크에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입에 침이 고였다.
“난 사람을 잘 보는 편이거든. 특히 너처럼 눈빛이 흉흉한 여자라면 절대 못 알아볼 수가 없어. 살기 위해 왕궁에 들어왔다고? 거짓말. 살고 싶었으면 멀리 도망을 쳤어야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때, 나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아닌가? 잠깐 즐기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밤바다에서 물놀이도 하고…… 모래사장에서 뒹구는 것 정도는.”
스테이크를 다 자른 블라이스가 율리아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 주었다. 그러곤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손가락으로 율리아의 손등을 살살 간질였다. 강아지풀로 간질이는 것 같은 섬세한 유혹이었다.
이것도 도발이라고 하는 건가.
율리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짙은 녹색 눈이 위험하게 일렁였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음에 사로잡힌 블라이스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율리아가 툭 말했다.
“그 반지 내 거였어요.”
“……뭐?”
블라이스가 당황해 손가락을 움츠렸다. 율리아는 시선을 천천히 내려 그가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 반지.”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내 거였다고요.”
* * *
‘날 도발하다니.’
블라이스는 율리아의 도발에 크게 흔들렸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율리아 아르테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나타났다. 모습은 희미한데 눈빛이 선명했다. 그를 저울에 올려놓고 가치를 재는, 그 가차 없는 시선이 잊히지 않았다.
율리아가 이 반지의 주인이라니.
약초꾼들은 죽기 전에 블라이스에게 많은 걸 털어놓았다. 그들은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눈보라 치는 산 위에서 다 죽어 가는 여자를 발견했고, 아침에 출발하려던 일정을 뒤엎고 자정에 짐을 꾸렸다고 말했다. 그러곤 여자가 시키는 대로 위험한 샛길로 방향을 잡았다고.
반지의 주인, 그게 율리아였다니.
‘운명인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참을 수 없는 살의가 치솟았다가, 이내 웃음으로 터졌다. 누가 그를 봤다면 미친놈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짝을 이루는 영혼이 있다더니.’
그게 바로 자신과 율리아가 아닐까. 블라이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해 겨울이었다. 데네브라 황비는 카루스 란케아가 그녀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자 격분한 나머지 그와 부하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들키면 황제의 손에 죽는다. 블라이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