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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95/319)

86화

“또 직접 오셨어요?”

카루스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맥스웰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엔 바바슬로프가 저한테 와서 율리아 시녀님을 모셔오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알았다고, 언제 가야 좋겠냐고 물었더니…….”

“맥스웰.”

“갑자기 카루스 님이 나타나서는 지금 당장 가자는 겁니다. 저도 처리해야 할 일과가 있고, 부하들 보고도 받아야 하고, 가끔은 쉬고 싶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저 양반은…….”

“맥스웰.”

맥스웰을 부르는 카루스의 목소리가 갈수록 낮아졌다. 카루스는 화내고 있지 않았지만, 맥스웰이 그를 곁눈질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엔 두 손을 슬쩍 들고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말씀 나누세요. 저는 찌그러져 있죠.”

마차가 출발했다. 왕궁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는 주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카루스는 출정식 날짜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했고, 율리아는 왕궁에 퍼진 소문과 샤트린의 구애에 대해 말했다.

카루스가 물었다.

“샤트린 공주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공주도 마조람 후작에게 원한이 생겼으니까 이제는 좀 더 강한 왕족의 궁으로 자리를 옮겨도 되잖아.”

“원한의 깊이가 달라요.”

“원한이라. 레위시아 2왕자가 왕좌에 오르기 위해 마조람을 용서하고 널 배신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제가 왕자님이라면 마조람 후작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을 것 같거든요.”

“그 원한이라는 게 단순히 어머니를 애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면…….”

부족하지 않나. 카루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불행한 일이긴 했지만, 그것도 결국은 레위시아의 어미가 선택한 삶이 아닌가. 그녀에겐 왕과 헤어지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선택지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외로웠던 성장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카루스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대신에 율리아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율리아, 블라이스 백작이 네가 버린 반지를 갖고 있어.”

“네?”

“우리가 산맥에서 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지, 그 원인을 조사했던 모양이다. 약초꾼들이 하필이면 블라이스 백작에게 그 반지를 금화로 바꿔 달라고 했다더군.”

“왜 실패했는지 정말 알고 싶었나 봐요.”

대단한 집착이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산맥을 이 잡듯이 뒤지지 않았다면 그 작은 마을의 약초꾼을 찾아내진 못했을 것이다.

“놈이 반지의 주인을 찾겠다고 했어.”

“카루스 님.”

“율리아, 블라이스 백작을 조심해.”

조심하라기엔 조금 늦은 것 같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블라이스 백작은 이미 그녀를 만났고, 첫눈에 반했다는 헛소리까지 지껄여 가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블라이스 백작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했다. 데네브라 황비의 측근인 그는 언제나 카루스 손에 처리되었으니까.

카루스가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마차 구석에 찌그러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맥스웰이 꼭 이럴 때만 자길 찾는다고 구시렁거렸다.

“변태입니다.”

“네?”

“무서운 게 없는 놈이고, 하루살이 같은 놈이에요. 카루스 님을 그런 식으로 도발하는 놈은 저 넓은 바이칸에도 오직 그놈 하나뿐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카루스 님의 관심을 원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종종 받았죠.”

“그런 점이 변태 같다는 거예요?”

“데네브라 황비 같은 절정의 변태와 잘 어울리는 걸 보면…… 사실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알쏭달쏭했다. 율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자, 카루스가 맥스웰을 노려보며 말했다.

“객관적인 정보를 줘.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냐.”

“객관적인 정보는 다 알고 계실 거잖아요! 우리 시녀님 기억력이 보통입니까? 오르테가 왕궁 인간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황제의 사절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그러니까 자신은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주관적인 의견을 전달하는 거라고, 맥스웰이 억울해했다.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블라이스 백작은 지금 왕궁 내에서 무법자와도 같아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국왕의 무릎을 꿇려 버렸으니, 누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궁을 제한 없이 돌아다니고, 아무나하고 술을 마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그의 목적이에요. 도무지 원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아요.”

“전쟁이겠죠. 그 자식은 원래 그런 거 전문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방법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가능하다면 막아야 한다. 율리아가 그렇게 말하자, 카루스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카루스를 만나고 왕궁으로 돌아온 율리아는 자신의 방이 낯선 향기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콤하고 끈적끈적한 향이었다. 평소 향수를 즐겨 쓰지 않는 율리아는 트루디의 짓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자 위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보였다. 그곳엔 탐스러운 장미와 함께 잘 익은 복숭아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장미 특유의 진한 향기에 복숭아 냄새까지 더해지니, 어지러울 만큼 향기로웠다.

카드나 편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누가 보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샤트린 공주가 보냈다고 하기엔 너무 소박했고, 선물의 의도조차 알 수가 없었다.

“트루디.”

바구니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율리아가 트루디를 불러들였다. 그러곤 냉랭하게 물었다.

“이거 누가 가져온 거야?”

“시녀님! 언제 돌아오셨어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거 귀빈궁 시종이 가져온 거예요.”

“귀빈궁?”

“네! 제국에서 오셨다던 그 백작님 있잖아요. 그분이 시녀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대요.”

율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블라이스 백작이 복숭아와 장미를 보내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했다.

“이게 다야? 돈이나 보석은 없었어?”

“네, 그런 건…… 없었는데…….”

트루디가 괜히 죄지은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트루디의 눈에 비친 율리아는 무섭고 계산적인 사람이었기에,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상자나 값비싼 보석이 아니라 싸구려 복숭아 따위나 보내는 백작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블라이스의 의도가 읽히지 않아 답답해진 율리아가 팔짱을 낀 채 장미꽃을 노려보았다.

“이상한데.”

“그냥 이 말만 전해 달라고 했어요.”

“무슨 말?”

“같이 식사하자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 식사하자고요.”

“식사?”

율리아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녀의 얼굴은 꼭 잔뜩 화가 난 코코를 떠올리게 했다.

율리아는 트루디가 겁먹은 얼굴로 진짜 그게 다라고 몇 번이나 말한 후에야 바구니에서 시선을 떼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카루스와 맥스웰이 알려 준 정보로는 블라이스의 기행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은 단순한 흥미가 아니었다.

“트루디.”

“네, 시녀님!”

“귀빈궁에 다녀와. 내일 저녁, 율리아 시녀가 블라이스 백작을 초대한다고. 장소는 여기.”

율리아가 아무 무늬 없는 카드에 장소와 시간을 적었다. 트루디는 그걸 두 손으로 받아들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귀빈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세상엔 직접 부딪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율리아는 오르테가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었으나, 블라이스 백작은 그 안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변수였다. 변수를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없애거나, 통제하면 된다.

다음 날 저녁이 되었다. 율리아는 얇은 여름용 드레스를 입고, 모자 대신 양산을 들었다. 그러곤 미리 대기시켜 둔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율리아가 예약한 곳은 오르테가에서도 백사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한 해변의 고급 식당이었다.

새하얀 테라스에 푸른 커튼이 휘날렸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율리아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로 올라갔다.

그런데 블라이스 백작이 먼저 도착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신기한 남자였다. 눈빛은 끈적거리고 목소리는 색정적인데,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정중했다. 율리아의 손가락 끝을 잡고 입술이 닿지 않게끔 손등에 키스한 그가 그녀를 테이블로 이끌었다.

“제게 무슨 용건인지 궁금해요.”

“와, 앉기도 전에 거절당한 기분인데.”

블라이스가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채 요리를 나르던 종업원이 그를 힐끔거리다 얼굴을 확 붉혔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객관적으로 매력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제대로 마주하니 그에게서 느껴지던 음흉한 기운도 적당히 봐줄 만했다.

그래, 악당이 담백한 것도 재미없지. 그렇게 생각한 율리아가 그가 내민 술을 거절하며 유리잔을 한쪽으로 밀어 버렸다.

“내가 권하는 건 다 거절할 생각인가 봐.”

“그럴 거였으면 백작님을 식사에 초대하지도 않았겠죠.”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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