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헛소리하려거든 꺼져.”
“폐하께서 카루스 님을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으로 임명하자마자 황비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지 않았다. 카루스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블라이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블라이스는 카루스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데네브라의 소식을 전했다.
“머리카락을 염색 중이셨죠. 워낙 감정 기복이 심한 분이라, 시중인들이 자꾸 죽어 나가서요. 그래서 제가 직접 염색약을 발라 드렸는데…….”
데네브라 황비는 원래 잘 익은 밀밭처럼 밝은 금발이었다. 한데 그녀가 카루스 란케아에게 집착하게 된 이후부터는 언제나 그처럼 새카만 색으로 염색을 하곤 했다.
“당신이 남부에서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거란 소식을 들으셨죠.”
데네브라는 미친 여자였다. 그녀는 황제의 아내이면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카루스를 향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날 데네브라 님의 침실에 멀쩡한 거라곤 본인 하나뿐이었어요.”
나머지는 다 때려 부쉈다는 말이었다.
처음엔 평범한 사랑 고백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데네브라도 카루스의 철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사랑은 집착이 되고, 이내 미움으로 변했다. 그리고 미움은 더 심한 집착이 되어 그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루스가 문을 가리켰다.
“황비 얘기를 하러 온 거라면 돌아가라. 블라이스, 네가 폐하의 사절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잘난 무혈 제독은 천박한 정부와는 말조차 섞기 싫어하시니.”
블라이스의 말투가 꺼끌꺼끌했다.
항상 이랬다. 카루스를 대할 때마다 블라이스는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카루스 란케아는 뭐든 다 가진 남자였다. 바이칸 제국을 다 뒤져도 그처럼 완벽한 남자는 찾기 힘들었다.
북부의 얼음에 밤의 어둠을 새겨 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 목소리는 낮고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무혈 제독이자 황제의 두 번째 기사라는 대단한 업적을 저토록 젊은 나이에 이루었으며, 출신과 인품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몸으로 황비를 유혹해 출세한 블라이스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남자.
“그거 아십니까?”
그래서 카루스를 만날 때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충동적인 마음이 치솟았다. 고요한 호수만 보면 돌을 던지고 싶어서 안달하는 악동처럼, 곱게 쌓인 눈 위에 가장 먼저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그런 마음.
“제가 오르테가로 오는 길에 이걸 주웠는데.”
블라이스는 그래서 황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주인을 찾아 주려고 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카루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흉할 정도로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손에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여자 반지였다. 반지는 블라이스의 새끼손가락에 겨우 들어갈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그건 보석에 관심 없는 카루스의 눈에도 꽤 값비싸 보였는데, 보면 볼수록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저걸 어디서 봤을까. 눈살을 찌푸리는 카루스에게 블라이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른 봄이었을 겁니다. 웬 가난한 약초꾼이 저한테 이걸 팔지 뭡니까.”
카루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래서 얼른 샀죠. 돈을 준 뒤엔 다 죽여 버렸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흘렀다. 착 가라앉아 있던 살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카루스의 시선에 여과 없이 노출된 블라이스의 팔뚝에선 솜털이 부르르 몸을 일으켰다.
카루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가난한 약초꾼이 팔 만한 반지는 아니로군.”
블라이스는 일부러 웃었다. 카루스가 여기서 자신을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는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오르테가에 온 사절이었기에, 그 지위가 유지되는 한 카루스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티타니아 산맥, 작은 산골 마을에서 만난 약초꾼이었죠. 어떤 여자한테 샛길을 안내해 주는 조건으로 받았다던데.”
카루스가 눈동자를 스르륵 움직여 블라이스의 손에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카루스의 검은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분노, 살의, 성가심,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어둠인지, 가득 찬 어둠인지 그걸 알 길이 없었다.
저 빌어먹을 검은 눈. 블라이스는 카루스의 눈이 싫었다. 도저히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서였다. 보면 볼수록 숨이 막혀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블라이스 백작.”
카루스가 입을 열었다. 얼핏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느껴지는 단조로운 어조에 블라이스가 반지 낀 손을 꽉 말아쥐었다.
“잘 들어라. 나와 부하들은 폐하의 밀명을 받아 산맥을 넘던 중에 습격을 받을 뻔했다.”
“저런, 그러셨습니까?”
“두 차례의 기습을 준비하고 있더군. 정찰병을 미리 보내 놓지 않았다면 우린 거기서 다 죽었겠지.”
카루스가 읊조리듯 말했다. 율리아가 알려 줬다는 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습격을 명령한 자는 데네브라 황비, 습격을 계획한 건 블라이스일 터였다. 카루스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누가 그랬는지도 알고 있다.”
블라이스가 웃음을 멈추었다. 카루스는 블라이스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나를 공격하는 자를 살려 두지 않아.”
너를 죽이겠다. 카루스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도발은 먹혔다. 데네브라 황비는 카루스 란케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몸이라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몸마저 가질 수 없다면 그를 파괴해 미움을 받겠다고 했다.
블라이스는 황비의 노예였기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카루스의 분노를 자극했다.
용건을 마친 블라이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출정식 기대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다거나 이만 돌아가겠다는 인사는 할 필요 없었다. 블라이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카루스는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카루스는 창가에 서서 관저를 빠져나가는 블라이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바바슬로프가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물었다.
“저 자식은 언제 죽일 수 있는 겁니까?”
“언젠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마 이대로 내버려 두실 생각은 아니죠? 기사단 선배들이 언젠가 블라이스 자식 처리하는 놈한테 몰아준다고 돈 모으고 있는 거 아십니까?”
“얼마나 모았는데?”
“잘 훈련된 군마 한 필 정도는 된다던데요?”
“너는 안 걸었어?”
“제가 돈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저 자식 죽이고 그 돈 받을 겁니다. 전쟁 때문에 군마 값이 미쳤단 말이에요.”
바바슬로프가 펄쩍 뛰었다. 할 수만 있다면 블라이스를 네 번 접어서 땅에 묻고 싶은데,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바바슬로프.”
“뭡니까, 또.”
“놈이 율리아의 반지를 가지고 있어. 약초꾼을 찾아낸 모양이다.”
“뭐라고요?!”
바바슬로프는 당장이라도 블라이스를 죽이러 가거나 율리아를 데려와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외쳤다. 카루스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직 그게 율리아의 반지라는 건 몰라. 주인을 찾겠다고 했으니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
문제는 주인을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반지의 주인이 율리아라고 해서 블라이스가 그녀에게 해코지할 것 같지도 않았다.
습격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율리아에게 보복을 가하면 그가 습격의 배후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 되니까.
일단 그녀에게 말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카루스가 바바슬로프에게 맥스웰을 불러오라고 말했다.
* * *
율리아를 데려가려는 샤트린의 구애가 나날이 적나라해지는 가운데, 1왕자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크리스틴과는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전 연인은 실종되었는데 새 연인이라니. 그 소식을 들은 코코가 식사하는 내내 하도 원색적인 욕을 하는 바람에 체한 알렉사가 소화제를 찾아 먹었다.
국왕에게 상인연합 대표 임명권을 빼앗긴 마조람 후작은 1왕자에게 크리스틴과의 약혼은 아직 유효하다며, 복잡한 절차는 생략하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는 게 어떻냐는 전갈을 보냈다.
물론 1왕자는 크리스틴이 치 떨리게 싫었기에 전갈에 답장도 하지 않고 보란 듯이 새 연인의 손을 잡고 사교계에 드나들었다.
마조람 후작은 국왕과 왕비에게 정식으로 항의했다. 1왕자의 일탈이 도가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왕께서 1왕자 전하를 불러서 크게 야단치셨대요. 왕좌에 앉겠다는 놈이 그렇게 철이 없어서 되겠느냐며…….”
트루디의 입에서 온갖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새 연인이라는 여자는 이번에 1왕자궁에 새로 들어온 시녀인데, 마조람 후작에게 땅을 빼앗긴 적이 있는 귀족의 딸이라고 해요. 어찌나 대놓고 왕자 전하를 유혹하는지, 시녀님들한테 미운털이 콱 박힌 것 같더라고요.”
“어차피 오래 못 갈 거야.”
율리아는 1왕자에게 이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마조람 후작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후계자로 떠받들어진 자에 불과했다.
국왕과 후작은 반목하기 시작했고, 크리스틴과 1왕자에게는 해소할 수 없는 앙금이 남았다. 그가 움켜쥐고 있던 권력은 곧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갈 것이다.
1왕자의 몰락은 샤트린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율리아는 공주가 이 기회를 잘 이용해 1왕자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녀님, 마차가 왔어요.”
율리아가 외출하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트루디가 재빨리 다가와 모자와 부채를 내밀었다. 율리아는 모자만 건네받고 부채는 넣어 두라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니 맥스웰이 마차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며 경비병들과 잡담을 나누던 그가 율리아를 보곤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율리아 시녀님. 후원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실까요?”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마차에서 말씀드리죠.”
맥스웰이 눈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율리아가 눈을 깜박이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곤 그와 함께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 카루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