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샤트린은 하루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율리아에게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코코와 알렉사, 레위시아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들에게 달려가 한 번 더 안심시켜 주었을 텐데, 워낙 티를 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율리아는 오전 일과를 마치자마자 샤트린의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공주궁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뭔가 분주하면서 들떠 있고, 바짝 긴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님이 있나.’
율리아는 샤트린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녀를 마중 나온 건 왕자궁에 왔던 심약한 시녀였는데, 은근슬쩍 코코와 알렉사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쪽입니다.”
율리아는 응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샤트린 공주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비워진 포도주 병이 보였다. 응접실을 가득 채운 달콤한 술과 향수 냄새, 율리아의 녹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 손님이 오셨군.”
이곳에서 보게 될 줄 몰랐던 남자가 샤트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블라이스 백작이었다.
그가 진한 눈웃음을 매달고 율리아를 응시했다. 그녀가 등장했을 때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표정과 눈빛, 걸음걸이 하나까지 추적하듯 바라보았다.
“어서 와, 율리아.”
샤트린이 손짓으로 율리아를 불러 테이블에 앉혔다.
‘왜 저자가 여기에 있지?’
율리아는 블라이스 백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토록 노골적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데 눈을 돌린다고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블라이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샤트린이 하는 말마다 과장 섞인 웃음을 흘리며 공주를 치켜세웠다.
달콤한 미소와 현란한 말솜씨로 누군가를 접대하는 건 블라이스의 특기였고, 샤트린은 아닌 척하면서도 기분이 붕 뜨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북부의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부러워했던 게 바로 이 남부의 공기였죠.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시원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바이칸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농담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죠, 백작?”
“남녀를 불문하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매력적인 사람이 많다더라는.”
샤트린이 큰 소리로 웃었다. 블라이스의 입으로 그런 칭찬을 들으니 우스우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 정신 좀 봐. 율리아 널 초대해 놓고 여태 내버려 두고 있었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전하.”
“어떻게 그러니. 어디 보자, 그러니까…….”
“전하, 제 이야기라면 다음 기회에 다시 해도 됩니다. 중요한 손님이 계시잖아요.”
“그래, 그럴까.”
샤트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무슨 얘긴지 자기도 알고 싶다고 넌지시 물었지만, 율리아는 공손한 태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티타임으로 시작해 낮술을 과음하기에 이른 그날의 모임은 샤트린이 취해 잠드는 바람에 일찌감치 끝이 났다.
블라이스 백작은 샤트린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술을 마셨는데도 눈빛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와 함께 공주궁을 나서게 된 율리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달콤한 술 냄새와 함께 백작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율리아 아르테.”
블라이스 백작의 목소리는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카루스처럼 낮은 것도 아니었고, 레위시아처럼 부드럽지도 않았다. 성대가 상해 잔뜩 쉰 것 같은 느낌인데 묘하게 색정적으로 들렸다.
그가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고귀한 여인을 대하듯 정중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왕자궁까지 모셔다 드리지.”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게 해 줘. 나는 시녀님한테 관심이 좀 있거든.”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리아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블라이스 백작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쓸모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방해가 되는 사람인지 좀 더 지켜봐야 했다.
“내가 너한테 한눈에 반했다는 말이라도 해야 허락해 줄 거야?”
“저는 백작께서 관심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왜 네가 정해.”
블라이스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보육원 출신이라며? 귀족 아가씨 대리 시험 쳐 준 대가로 학비를 후원받다가 그 집 도련님이랑 사랑에 빠졌고, 처절하게 배신당한 뒤에 왕궁으로 들어왔다고?”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아홉 번쯤 살게 되니 꼭 남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율리아는 그게 뭐 어떠냐는 얼굴로 블라이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보육원 출신이거든. 아버지가 갖다 버려 놓곤 징집령이 떨어지니까 다시 주워갔지. 장남을 대신해서 전쟁터에 나가는 조건으로 사생아 딱지를 떼었는데,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졌지 뭐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그 얼굴 정말 마음에 들어. 아무튼, 그래서 패전국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말을 들었거든.”
블라이스는 그때 조국을 배신했다. 가족도, 동료도 모두 배신했다.
“다 불었어. 내가 아는 건 전부. 그랬더니 내 아버지와 장남을 처형하더라고.”
“백작님.”
“이 이야기에서 네가 얻어야 할 교훈이 뭐게?”
블라이스가 얼굴을 가까이하고 물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사향에 율리아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하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바로 그거야.”
블라이스가 율리아의 손을 살짝 잡더니 자신의 팔에 얹고 걸었다. 정중하지 않았지만 무례하지도 않은 속도였다.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그와 함께 보폭을 맞추었다.
“그 뒤엔 알려진 대로야. 나는 데네브라 님의 눈에 띄어서 그분의 정부가 되었지. 아버지가 장남에게 물려주려던 작위는 내 것이 되었고, 나는 패전국 포로였던 과거를 청산하고 바이칸의 실세로 자리 잡아…… 내 얘기 재미없지?”
“아니요.”
“거짓말하지 마. 네 얼굴에 쓰여 있어. 이게 무슨 개수작인가, 하고.”
그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샤트린의 궁에서 왕자궁까지 가는 길엔 꽤 많은 사람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블라이스 백작을 보곤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옆에 있는 율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난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사람이 좋아. 악바리라고 할까? 그런 애들은 근성이 있어. 성공하면 누구보다 탐욕스러워지고, 실패하면 손쓸 수 없이 망가지는 것도 재밌고.”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아니라고 생각해?”
이상한 남자였다. 율리아는 그가 자신에게 내보이는 원인 모를 호감이 흥미로웠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겠지만, 그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그 이상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웠다.
“그거 알아? 친제국파인지 뭔지 하는 귀족들이 자꾸 찾아와.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가 봐. 시골이라 그런가? 귀족들까지 그렇게 순진한 줄은 몰랐어.”
블라이스가 율리아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뺨을 긁듯이 훑었다.
“내가 오르테가의 친구가 되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난 행운을 물고 오는 길조가 아니라 태풍을 예고하는 흉조일 텐데.”
손이 거친 남자였다. 진한 향수로도 감출 수 없는 오래된 흉터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이 사람, 나와 닮았다.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실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