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율리아는 샤트린이 알렉사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선물하겠다며 방을 돌아다니는 동안, 코코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코코가 흠칫 놀라며 율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화내지 마세요.”
“화 안 냈는데?”
“지금 욕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잖아요. 참아요. 한동안은 샤트린 공주님의 기분을 맞춰 줘야 해요. 알잖아요.”
율리아가 코코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코코가 짧게 숨을 마시고, 길게 뱉었다. 차갑게 굳었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코코는 율리아가 잡은 자신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고 피식 웃더니, 징그럽게 왜 이러냐며 냅다 팔짱을 꼈다.
“뭐예요. 손잡는 거 좋아하면서. 좋으면 좋다고 말해요.”
“가서 알렉사 손이나 잡아 줘. 저 순진한 애 혼자 두지 말고.”
알렉사는 샤트린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코코의 말대로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태평한 얼굴이었다.
알렉사는 샤트린이 드레스를 하나하나 꺼내 보여 줄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코코한테 어울릴 것 같습니다.”
“율리아한테 어울릴 것 같습니다.”
샤트린은 이내 질린 얼굴이 되었다. 율리아가 워낙 철벽을 치니까 시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알렉사를 공략할 셈이었는데, 그마저 녹록지가 않았다.
심지어 알렉사는 샤트린이 가지고 있는 화려하고 풍성한 디자인의 드레스와는 상극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뭘 가져다가 입혀도 어울리질 않았다.
금세 질린 샤트린이 시녀들을 손짓으로 부르며 짜증을 냈다.
“보석으로 줘. 드레스는 틀렸어. 아니, 아예 디자이너를 부를까? 너희 생각은 어때?”
“알렉사 시녀는 드레스보다 승마복이나 기사들의 정복이 어울릴 것 같아요.”
“무기를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전하께서 검을 선사하면 약식으로나마 기사 서임도 받을 수 있을 텐데.”
율리아는 샤트린의 시녀들이 공주에게 말하는 걸 귀담아들었다.
그들은 드레스 룸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에야 정원으로 나와 본래의 초대 목적인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화사하게 장식된 티 테이블 위에 각종 다과가 차려졌다.
시녀들이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앉으려는데, 갑자기 샤트린이 율리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넌 나랑 얘기 좀 하자.”
거절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코코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는 걸 보곤 서둘러 몸을 움직여 샤트린을 따라갔다.
샤트린이 율리아를 데려간 곳은 공주궁 안에 있는 작은 응접실이었다. 공주는 율리아에게 의자를 권하지도 않은 채 저 혼자 소파에 앉아 물었다.
“귀족이 우스워?”
“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네. 그때도 아니라고 하긴 했지. 어때, 율리아. 이제 우린 한편이니까 진심을 들려줘도 되잖아.”
“귀족을 우습게 보다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거절하니. 남작가의 영애 정도면 괜찮잖아. 재산은 별로 없지만, 작위는 물려받을 수 있어. 그 정도만 해도 굉장한 거야.”
“과분하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런데 왜 거절하냐고. 네가 귀족을 우습게 보지 않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어.”
샤트린은 율리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평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크리스틴에게 그렇게 착취당해 왔다면, 무엇보다 귀족이 되고 싶어 해야 정상일 터였다.
그것도 왕족인 공주가 직접 알아본 가문이었고, 절차는 뒤탈 없이 깨끗하게 처리될 것이었다.
“율리아 아르테, 그만 튕기고 나한테 와.”
“공주님.”
“네가 이루고자 하는 걸 이뤄 주겠다잖아. 그렇게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면서. 내가 추천한 남작은 병세가 심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 집 양녀로 들어가서 어림잡아 2, 3년만 지나면 너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남작이 될 수 있어.”
“저는 귀족이 되려고 왕궁에 들어온 게 아니에요.”
“그럼?”
“살고 싶어서 들어왔어요.”
율리아는 샤트린에게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되, 진심은 숨겼다.
샤트린이 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욱 내 밑으로 들어와야지. 레위시아는 너를 지키지 못해. 좋은 녀석이지만, 강한 왕족이 아니니까. 게다가 그 녀석은 싸우는 걸 아주 싫어한단 말이야. 우리가 어릴 때는 귀족들이 일부러 경쟁을 부추기기도 했는데, 레위시아는 그때마다 일부러 꼴찌를 도맡아서 했어.”
레위시아는 착한 왕자였다. 그래서 왕이 될 수 없다. 샤트린은 그 점을 지적했다.
“나는 달라.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습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의 자식 중에서 왕좌에 오를 만한 인물은 나밖에 없어. 내가 완벽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모자라기 때문이지.”
율리아도 그 점에 있어서는 샤트린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1왕자는 왕이 되기엔 너무 게으르고 이기적이었다. 2왕자는 떠돌이 소금 장수가 되고 싶어 했다. 4왕자는 아직 어려서 글씨부터 배워야 할 판이었다.
“율리아 아르테, 내 시녀로 들어와.”
샤트린과의 개인적인 대화가 끝난 뒤, 율리아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정원으로 나왔다.
공주궁의 시녀들이 알렉사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코코는 살짝 떨어진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왕자궁에 초대장을 전하러 왔던 심약한 시녀가 코코를 접대하고 있었다.
레위시아가 봤다면 서운해했을지도 모르는 장면이었다. 시녀들 사이에 섞여 있는 코코와 알렉사는 마치 이곳 공주궁의 실세라도 되는 듯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
레위시아가 아니라 샤트린이 왕이 되는 미래라면, 공주의 말대로 두 사람은 공주궁의 시녀가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물론 말한다고 들을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이제 가요.”
율리아가 계단을 내려와 코코에게 다가왔다.
“얘기 끝났니?”
“내일 다시 오라고 하셨어요.”
“뭐? 왜?”
“생각할 시간을 하루 주겠다고.”
코코가 다시 욕을 하려고 했다. 율리아는 이번에도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달래듯 흔들었다.
* * *
율리아는 알아서 잘 거절할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코코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왕자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뚱한 얼굴로 생각에 빠진 그녀의 곁에 알렉사가 다가와 물었다.
“율리아는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왜 그렇게 화난 얼굴입니까?”
“내가?”
“네, 화난 얼굴입니다.”
알렉사는 유독 코코의 감정을 잘 알아채는 편이었다. 코코의 뾰족한 말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듣다 보면 다 맞는 말인데 말투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기까지 해서, 왕자궁의 하녀들은 알랙사를 존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코코가 신경질을 낼 때마다 알렉사를 방패로 내세웠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코코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은 하녀들이 알렉사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설마 율리아를 공주궁으로 보낼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알렉사.”
코코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오는 모양이었다.
“샤트린 전하는 진심이야. 율리아는 당분간 공주궁에 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지금이야 마조람 후작도 정신이 없겠지만, 아카데미에서 크리스틴의 졸업 자격을 취소해 버리면…… 또 율리아를 죽이려고 할 거야.”
“제가 지키면 됩니다.”
“실종된 여자를 생각해 봐. 그 여자가 유난히 조심성 없이 굴었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왕자의 아이를 가졌는데?”
“코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뭐가 더 나은지 생각하는 거야. 너희 둘 다 공주궁으로 보낸 뒤에 나 혼자 왕자궁을 지키거나.”
“절대 안 됩니다.”
“율리아만 보낸 뒤에 나중에 다시 데려오거나.”
“안 됩니다.”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잖아. 공주님이 제안한 그 가문…… 나도 알아봤어. 남작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자손이 없어 가문의 이름이 사라지는 걸 슬퍼하고 있대. 브레웨 훈장을 받은 왕궁 시녀가 양녀로 들어와 작위를 이어 준다면 기뻐할 사람이야.”
우리가 율리아를 붙잡고 늘어지는 게 그 애의 앞길을 막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닐까. 코코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알렉사가 살짝 열린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위시아가 벽에 기대서서 코코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화내지 않았다. 코코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의 힘이 약해 율리아를 지킬 수 없어서 일어난 일이기에, 두 사람 다 그것 때문에 감정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다만 율리아를 향한 레위시아의 마음을 알고 있는 코코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했다.
“다시 데려오면 돼요.”
“그래.”
“우리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유리해졌을 때, 그때 다시 돌아오라고 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위시아가 빙그레 웃었다. 전의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태도에 발끈한 코코가 뭐라 쏴붙이려는 찰나, 레위시아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코코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아. 율리아를 노리는 하이에나가 내 궁을 멋대로 침입했던 시기에 샤트린이 이런 제안을 했다면, 난 분명 받아들였을 거야.”
“전하.”
“율리아를 보내면 샤트린은 또 빚지고 살 수는 없다면서 나한테 이것저것 해 주려고 하겠지. 어쩌면 그 작은 호의가 나한테는 꽤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레위시아는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코코, 율리아는 우리 가족이잖아.”
코코의 말문이 콱 막혔다.
“누가 가족을 그런 식으로 거래해.”
지킬 것이다. 그게 왕족의 의무였다. 레위시아는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누이이자 스승이었던 코코에게 굳은 다짐을 꺼내 보였다.
“내가 율리아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왕자라면, 왕이 아니라 왕궁 문지기조차 되면 안 되는 거지.”
“진심이세요?”
코코가 물었다. 레위시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렇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