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90/319)

82화

“율리아 시녀…….”

공주궁의 시녀는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녀를 통해 몇 번이나 말을 전달했지만 율리아가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않자, 안달이 난 샤트린이 직접 시녀를 보냈다. 그런데 여기서도 율리아를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코코는 무섭고, 율리아는 단호했다. 궁을 옮기긴커녕 티타임조차 거절할 기세였다. 그녀는 돌아가면 샤트린이 자신을 탓할까 봐 무서웠다. 공주는 시녀들에게 잘해 주는 편이었지만, 불같은 성격 탓에 한 번 화가 나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심약한 시녀는 초대장을 두 손으로 든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가 공주의 초대장을 힘주어 구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지랖 넓은 코코가 그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야, 그거 구겨졌다.”

“아…… 어머! 어머, 어떡해. 어떡해!”

꼬깃꼬깃해진 초대장을 들고 시녀가 울상을 지었다. 왕족이 직접 보낸 초대장을 구겨 버렸으니, 크게 혼날 일이었다.

“어떡하지. 너무…… 죄송해요.”

율리아는 그녀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공주궁에 이렇게 심약하고 순진한 사람이 있었나. 시녀는 모시는 왕족을 닮는다는데, 이 시녀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혹은 얼마 못 가 집으로 돌아가게 될 사람인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율리아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손을 내밀려는 그때, 보다 못한 코코가 벌떡 일어나 구겨진 초대장을 한 손으로 홱 빼앗았다.

“그거 이리 내.”

“코코 시녀님!”

“넌 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 도대체 왕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러니? 어휴, 답답해. 너 가서 공주님한테 이렇게 말해. 왕자궁에 갔더니 율리아 시녀가 없었다고, 그래서 코코 시녀한테 잘 전달했다고 해.”

“네, 네?”

“코코 시녀가 율리아 시녀한테 전해 주겠다고 했다고 하라고! 그래서 답변을 직접 듣진 못했다고. 알아들었어?”

“네…… 시녀님.”

공주궁 시녀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는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돌아가라며 그녀를 내쫓았고, 율리아가 배웅하기 위해 왕자궁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말해 줘야 하나. 코코는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다. 협박이 아니라 귀여워서 놀리려고 그런 거다. 이렇게 말해 주는 편이 나으려나. 율리아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사가 연무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디 가십니까?”

“가는 게 아니라 배웅하는 거예요. 공주궁에서 오신 시녀님인데, 돌아가는 길이라서…….”

율리아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이었다. 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공주궁 시녀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아악!”

그녀는 화려하고 무겁고,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구두는 굽이 높고 불편해 보였다. 발목을 삐끗하면서 중심을 잃은 그녀가 허우적거리는 사이, 옆에서 다가오던 알렉사가 한쪽 팔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괜찮습니까?”

알렉사의 하얀 머리카락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공주궁의 시녀는 알렉사에게 매달린 채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곤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고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율리아는 재밌다는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궁 시녀는 쭈뼛거리며 알렉사의 품을 벗어나 고장 난 인형처럼 걸어서 왕자궁 정원을 벗어났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샤트린 공주의 곁에 저렇게 귀여운 시녀가 있었나. 율리아가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 시녀가 공주궁으로 돌아가 뭐라고 보고했는지는 몰랐다. 다만 코코가 시키는 대로 말하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루가 지났다. 율리아는 요즘 부쩍 궁을 자주 비우는 레위시아를 위해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제왕학에 관련된 책을 골라 놓고 요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도 샤트린에게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세 장이야.”

이번에는 코코와 알렉사까지 모두 함께 오라는 내용의 초대장이었다.

“거절할까요?”

율리아가 어떻게 할 거냐는 얼굴로 코코를 바라보았다.

여름 햇살 아래 주홍색으로 빛나는 코코의 단발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옆머리는 땋아서 물망초 머리핀으로 고정하고, 작은 손엔 산호색 부채가 들려 있었다.

“계속 무시할 순 없어. 아무리 레위시아 전하가 샤트린 공주를 지지한다고 해도, 그 더러운 성격에 우리가 건방지게 구는 것까지 봐주진 않을 테니까.”

“그럼 제가 혼자 갔다 올게요.”

“안 돼.”

“왜요?”

“셋을 모두 초대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애가 혼자서 가면, 그건 상대를 무시하는 셈이 되니까. 오래된 예법이지만 공주궁의 시녀들은 알고 있을 거야.”

“그럼 코코가 혼자서 다녀와요.”

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코코가 혼자 가서 도도한 얼굴로 차나 한 잔 마시고 오는 게 가장 나은 해결책이리라고 생각했다.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율리아의 시선이 다시 두꺼운 책으로 향했다.

그런데 코코가 신경질을 냈다.

“싫어.”

“네? 왜요.”

“난 샤트린처럼 답을 정해 놓고 받아들이라며 우기는 사람하고 대화 못 해. 내가 공주를 앞에 앉혀 두고 넌 어쩌면 애가 그렇게 이기적이고 못돼 처먹었냐고 말해 버리면 어떡해? 가뜩이나 공주님 얼굴 볼 때마다 네 뺨 때린 거 생각나서 입술이 근질거리는데!”

“입술이 왜 근질거려요.”

“성질머리가 그 모양 그 꼴이니까 바실리 같은 개자식한테도 차이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만, 그만해요!”

깜짝 놀란 율리아가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 코코에게 다가왔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큰일 나는 거 알죠? 아니, 맞은 건 난데 왜 코코가 여태까지 그걸 가지고 이래요? 샤트린 공주님만 남부해안만큼 뒤끝이 긴 줄 알았더니, 코코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네요.”

“남부해안이 별거니? 난 나한테 해코지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안 잊어.”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같이 가자.”

코코가 훗 하고 웃었다. 그녀의 손에서 부채가 탁 소리를 내며 접혔다.

“어디 얼마나 좋은 조건을 준비해 놓고 널 데려가려 하는지 들어나 보게.”

그날 오후, 외출에서 돌아온 레위시아가 드디어 공주궁의 시녀들과 승부를 가리기로 했느냐며 하하하 웃었다. 그러곤 자신의 시녀들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지고 돌아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또 한 차례 웃었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율리아와 코코, 알렉사는 산책하듯 걸어서 공주궁으로 향했다. 세 사람의 뒤에선 트루디와 하녀들이 간식과 선물로 가득 찬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공주궁의 시녀들은 살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율리아와는 여러 번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어서 괜찮은 편이었으나, 코코와 알렉사는 그렇지 않았다.

알렉사는 어렵고, 코코는 무서웠다.

오르테가 왕궁 역사에 후계 싸움을 하는 왕족의 시녀들이 사이좋게 지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레위시아가 샤트린을 지지하고 있으니 표면적으론 한 편이었지만, 언젠가 그가 샤트린의 그늘을 벗어나 홀로 서게 된다면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들 어서 와. 너희 요즘 얼굴 보기 어렵더라? 레위시아가 아무리 소탈한 성격이라고 해도, 왕족을 그렇게 매일 혼자 다니게 해서 되겠어?”

샤트린은 거대한 드레스 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 신발 등이 조명 아래 번쩍번쩍 빛났다.

자기가 초대해 놓고 비아냥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던 코코가 뭐라 한마디 쏴붙이려는 찰나, 율리아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공주가 보내는 티타임 초대장은 사적인 친분을 상징했다. 율리아는 시녀였으나 신분상 평민이었기에, 공주가 뭐라 비아냥거려도 공손하게 인사하는 편이 좋았다.

코코도 그런 율리아의 처지를 생각하곤 굳었던 표정을 화사하게 풀었다.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을 좀 챙겨 왔어요. 시녀들과 나누시죠.”

“코코 시녀가 챙긴 거라면 안 봐도 마음에 들겠지.”

샤트린이 깔깔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곤 보석으로 가득 찬 진열대 앞에 서서 코코에게 말했다.

“아무거나 가져.”

“네?”

“보석 좋아한다면서? 부담가질 거 없어. 내 시녀들은 자주 겪는 일이니까. 난 시녀야말로 왕족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거든. 특히 그게 측근 시녀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왜 공주 전하가 저희에게…….”

주려면 레위시아가 줘야지, 왜 샤트린이 나서냐는 말이었다.

샤트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희 셋 다 내 시녀로 삼으려고.”

대충이나마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코코가 얼굴을 확 굳혔다. 샤트린은 그걸 보고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레위시아가 나를 지지하는 이상, 너희는 결국 나를 모시게 될 거야. 당연한 일 아냐?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은 귀족으로 남지. 너희는 결국 가문으로 돌아가거나, 왕궁 관리 시녀가 될 텐데.”

“공주님.”

“내 시녀가 되면 좋잖아.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레위시아가 혼자인 건 나도 보기 안 좋으니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자만심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뭐라고 반박조차 못 할 만큼 강한 확신이기도 했다. 샤트린은 진심으로 다음 대의 국왕이 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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