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레위시아는 마침 왕자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함께 있던 율리아가 그의 뒤에서 은밀하게 속삭였다.
“제국에서 온 사절, 블라이스 백작입니다. 도발에 응하지 마세요.”
레위시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이스 백작,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 아닙니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 레위시아 오르테가 왕자 전하.”
“제 궁엔 무슨 일로…….”
레위시아는 블라이스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굴었다. 국왕처럼 비굴하게 엎드리진 않았으나, 최대한의 공손함을 보였다.
블라이스는 그런 왕자의 태도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왕궁 구경은 이제 질렸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남부의 왕족에게 관심이 많으시니, 제가 제국으로 돌아가서 할 말이 있으려면 왕족이란 왕족은 다 만나 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러시군요. 그럼 약속을 잡을까요?”
레위시아는 블라이스를 샤트린의 궁으로 초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라이스는 오만하고 불친절하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편이 좋았다.
레위시아가 그의 뒤를 지키던 율리아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네, 전하.”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율리아까지 백작 앞에 세워 두기 싫었던 레위시아가 그녀를 왕자궁 안으로 돌려보냈다.
율리아는 얇은 여름용 드레스에 손목까지 오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쓴 모자가 그녀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그늘을 만들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에선 상쾌한 허브 향이 났다.
블라이스의 시선이 율리아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왕자에게 약식으로 먼저 인사하고, 그 뒤엔 사절인 블라이스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말은 꺼내지 않았으나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태도였다.
무심한 눈빛에 평범한 차림새와는 달리 존재감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 앞에 서자 블라이스의 화려한 외모가 거목 아래 버려진 단풍잎처럼 느껴졌다.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말을 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율리아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던 블라이스는 주위 모든 사람을 무시한 채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의 눈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레위시아라는 왕자가 잘생겼다고 해서 구경하러 온 길이었는데, 왜 저 여자에게 자꾸 시선이 끌리나.
블라이스는 자신의 감을 굉장히 신뢰하는 편이었다.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 중에는 특별히 육감이 뛰어난 자가 있어, 짐승처럼 천적과 먹잇감을 구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쟤구나.’
그는 자신을 그 육감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었고, 제 안의 짐승이 율리아를 바라보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민 시녀.’
블라이스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왕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율리아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의 시커먼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레위시아 왕자가 블라이스를 정면에서 막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레위시아는 친근하면서도 예의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깨끗한 얼굴엔 서글서글한 미소가 가득했다.
블라이스가 그를 옆으로 흘겨보며 말했다.
“제가 조금 전까지는 왕자님한테 관심이 있었는데.”
“저한테요?”
“방금 없어졌습니다.”
비슷한 처지인 줄 알았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레위시아 2왕자는 오르테가 왕가의 천덕꾸러기일망정 블라이스처럼 시궁창에서 뒹굴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블라이스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여전히 온실 속 화초였다. 깨끗한 얼굴만큼 영혼도 깨끗할 것이다. 욕심도 없겠지. 그런 사람에겐 관심 없었다.
블라이스가 물었다.
“방금 들어간 시녀는 왕자님의 연인입니까?”
젊은 왕자에게 젊은 시녀가 붙어 있다면 으레 의심하게 되는 관계. 블라이스는 그걸 물어보았다.
레위시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방금 들어간 시녀…… 아, 그 아이요.”
그는 율리아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얼굴로 그런 건 왜 묻느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시녀와 연애할 만큼 인기 없는 남자가 아닙니다만. 블라이스 백작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은근슬쩍 인기 많은 그와 자신을 묶어 버리기까지. 레위시아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웃음이 터진 블라이스가 율리아의 뒷모습을 쫓던 시선을 그제야 제자리로 돌리고 말했다.
“조만간 식사 한번 하시죠. 국왕께서는 제가 오르테가에 머무는 동안 좋은 인상을 받아 가길 원하던데, 왕자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바이칸 제국의 사절을 대접할 수 있다면야 저 같은 변변찮은 왕족에게도 좋은 기회겠네요. 오르테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저는 왕자님의 궁에 들어가고 싶은데.”
블라이스가 씩 웃으며 레위시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서로의 체취를 맡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레위시아보다 반 뼘 정도 큰 키를 가진 블라이스가 그를 귀엽다는 듯 웃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래야 왕자님한테도 더 좋을 거 아닙니까.”
황제의 대리인을 2왕자궁에 초대하면 단번에 귀족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다. 블라이스가 그 점을 지적하자, 레위시아가 설핏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그 역시 긴 시간 긴장하며 살아온 왕족이기에 금세 평정심을 회복하고 눈꼬리에 선한 눈웃음을 매달았다.
“저는 샤트린을 지지하는 왕족입니다. 백작이 괜찮다면 공주궁에서 함께 식사하는 걸 권하고 싶네요.”
“하, 그래요.”
블라이스는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맹수가 아니란 법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시아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보고 싶었는데, 그는 물러나기만 하고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싸우지 않으려는 자는 재미없다. 블라이스는 이 시골 왕국의 왕위 싸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바이칸 제국의 입장에선 왕의 자식 중 왕좌에 오르는 게 누구건 상관없었다. 반역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르테가는 바이칸의 속국이며, 오래 지나지 않아 제국의 남부로 전락할 것이다.
“반가웠습니다.”
레위시아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희고 고운 왕자의 손을 내려다보던 블라이스가 눈썹은 쓱 들어 올리고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입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블라이스의 손은 지저분했다. 피부는 흉터로 가득하고, 툭 불거진 마디는 비틀리고 휘어져 흉측해 보였다.
“또 봅시다.”
블라이스가 레위시아의 손을 잡고 꽉 쥐었다. 두어 번 흔들다가 고통스러울 만큼 세게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성질이 있는 녀석이라면 마주 힘을 줄 법도 한데, 레위시아는 아프다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재미없는 놈이로군.’
블라이스가 비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레위시아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글서글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 * *
한가로운 저녁, 샤트린 공주궁의 시녀가 왕자궁을 찾았다.
“이게 뭐니?”
“초대장입니다.”
“누가 누구를 초대하는 건데?”
“샤트린 공주 전하께서 오후 티타임에 율리아 아르테 시녀를 초대하는…….”
“뭐야? 율리아한테 주면 되는 걸 왜 나한테 가져왔니?”
“그, 그야 코코 시녀님은.”
거기까지 말하던 공주궁의 시녀가 꿀꺽 침을 삼켰다. 긴장했더니 자꾸 목소리가 갈라져 이상한 소리가 났다.
율리아가 샤트린의 은밀한 제안을 무시한 지도 꽤 여러 날이 지났다. 보석이나 다른 값비싼 선물은 받을 이유가 없다며 돌려보냈고, 귀족 작위는 못 들은 척하며 흘려보냈다.
샤트린이 율리아를 탐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왕자궁에 아무도 없었다. 아마 공주궁도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샤트린이 율리아를 티타임에 초대한다고 했을 때, 공주궁의 시녀들은 그 초대장을 가져갈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초대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악마 시녀 코코를 만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코코가 두 눈을 삐딱하게 치뜨고 시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동자와 속눈썹까지 붉은색이었다. 꼭 고양이인 척하는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왕자궁에 온 김에 코코 시녀님께 인사도 드릴 겸, 율리아 시녀에게 초대장을 주러 왔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또…….”
공주궁에서 온 시녀는 심약한 사람이었다. 제비뽑기 운이 나쁘지 않았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코코가 까칠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공주께선 아직 포기를 안 하셨구나. 그렇지?”
“저는 그것까진 잘…….”
“왕자궁엔 시녀가 셋뿐인데 공주께서 율리아를 데려가시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거지?”
“네, 네?”
공주궁의 시녀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코코가 진짜 악마처럼 비뚜름한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가 왕자궁으로 올 거니?”
“아니요!”
“왜? 여긴 손님도 없고 연회도 없어서 와 봤자 매일 놀기만 할 텐데. 빼지 말고 솔직히 말해. 네가 우리 궁으로 오고 싶어서 이 초대장을 들고 온 거지? 율리아를 보내는 대신에 네가 그 애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코코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시녀는 다급하게 두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공주궁 시녀인 게 좋아요! 죽을 때까지 샤트린 전하의 시녀로 살 거예요!”
“저도 그래요.”
율리아였다.
공주궁의 시녀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사이, 응접실에 나타난 율리아가 코코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도 레위시아 왕자님의 시녀로 살 거예요. 그러니까 돌아가서 공주님께는 잘 이야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