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출정식 구상하셔야 하는 것 아니었어요?”
“물 위에 대충 나란히 세워 놓고 겁주면 그게 출정식이지.”
어차피 전쟁을 치르기 위한 출정식이 아니니까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내민 팔에 한쪽 손을 얹고,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남작 작위로는 어림도 없다고? 그럼 어느 정도로 높은 작위를 원하는데?”
“그건 레위시아 왕자님에게 달려 있어요.”
레위시아에게 귀족의 지지가 필요하다면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림자 시녀로 남을 것이다.
카루스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가 풀어졌다. 그는 졸업식장과 연회장에서 봤던 레위시아 왕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유약하고 예쁘장하기만 한 얼굴로 왕이라.”
“생각보다 강한 분이에요.”
“어릴 때 기사 서임이라도 받았나?”
“칼을 들고 싸우는 힘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왕자 전하는…….”
거기까지 말하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율리아가 마침내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저랑 닮았어요.”
“뭐?”
카루스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자, 율리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물러설 데가 없다는 점이 닮았어요.”
“이상한 말이군. 애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도, 그는 왕자야. 너와는 태생부터가 달라. 네가 아홉 번의 삶을 거치며 겪었던 고통 따위는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요람 속 왕자님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 요람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차가운 감옥이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율리아는 그렇게 말해 보려다가 카루스의 눈빛이 단호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기지를 둘러봤으니 관저를 구경할 차례였다. 율리아는 모자의 차양과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가리려고 애썼다.
“왜 얼굴을 감추지?”
“카루스 님과 제 관계를 굳이 광고하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요?”
“굳이 감출 필요도 없지.”
오르테가에 감히 카루스 란케아의 사생활을 지적할 만큼 간 큰 사람이 있을까. 블라이스 백작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율리아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편을 택했다. 그녀가 모자와 레이스로 꼼꼼하게 얼굴을 가리는 걸 지켜보던 카루스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결혼했던 적은?”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덟 번의 과거 중에서 결혼하거나 약혼하거나…… 그런 관계로 발전한 남자가 있느냐고 묻는 거다.”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언제나 도망치거나, 숨거나, 비참하게 살해당하느라 바빴어요.”
“바실리 때문에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건 아니고?”
몇 번이나 지나가는 과거임에도 자꾸만 언급되는 바실리의 이름에 이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율리아가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자, 카루스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율리아.”
“네, 말씀하세요.”
“내가 왜 네 말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했다. 카루스는 예언처럼 들어맞는 율리아의 말에도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의심하던 남자였다.
궁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황제를 배신했다고 말했기 때문이야.”
“카루스 님.”
“폐하를 향한 내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바이칸 제국에 단 한 사람도 없어. 그 데네브라 황비조차 날 죽이려고 살수를 보낼망정 내가 폐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지.”
“황제는 당신을 질투해요.”
그래서 믿게 되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이토록 서슴없이 쏟아 놓으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보고 온 자만이 할 수 있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관저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율리아를 관찰하던 카루스가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예언 하나 하지.”
“네?”
“넌 이번 삶에서 그 긴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보게 될 거야.”
마차에서 내리려 몸을 일으켰던 율리아가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늘 차분하고 단단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멍하니 풀려 있었다.
* * *
블라이스 백작은 오르테가에 도착한 지 단 며칠 만에 왕궁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게 잘 보이려 안달 난 몇몇 귀족들 덕분이었다.
특히 소문 자자한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진 여인들이 몰라도 될 사소한 소문까지 일일이 주워다 주는 통에, 왕의 자식들이 경연에서 유치한 방식으로 후계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참 신기하지.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일들이 일어나. 시골이라 그런가? 후계 싸움을 귀엽게도 한단 말이야. 내가 아는 왕족들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칼춤부터 배우던데.”
블라이스 백작을 따르던 기사들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경연이라니. 이 얼마나 순진한 방식이냔 말이야. 그게 공정할 리도 없거니와, 설령 공정하게 치러진다 해도 결과에 따라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아닐진대.”
“맞는 말씀입니다.”
“그냥 다 죽여 버리고 앉으면 되지. 그건 원래 그런 의자잖아.”
블라이스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비죽 튀어나온 덧니가 보이고, 두툼한 입술이 매혹적인 선을 그렸다.
“난 참 운도 좋지. 여름에 바다에 오다니. 오르테가는 북쪽을 제외한 어느 방향으로 달려도 무조건 바다가 나온다는 반도 국가가 아닌가. 여기서 여름 내내 휴양이나 즐겨야겠어.”
그가 몸을 쭉 펴자 깊게 파인 재킷 안쪽에서 미끈한 근육으로 뒤덮인 가슴이 드러났다. 그 안엔 자잘한 흉터와 함께 온갖 화려한 문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제 놀았던 여자가 재밌는 소리를 하던데. 오르테가에 그렇게 잘생긴 왕자님이 있다고. 외모로만 비교하면 제국 최고의 미인과도 견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제국 최고의 미인은 블라이스 백작님 아닙니까.”
“미친 소리 하지 마. 나는 우리 황비 전하의 애완견일 뿐이잖아. 개는 원래 사람이랑 비교하지 않는 거야.”
블라이스가 아무리 막말을 지껄여도 기사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황비 데네브라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 잘생겼다는 왕자 얼굴이나 좀 구경해야겠다.”
블라이스가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2왕자궁이 어디냐?”
그에게서 풍기는 짙은 사향에 놀란 하녀들이 겁먹은 토끼처럼 몸을 움츠리고 2왕자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블라이스가 레위시아 2왕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패전국 포로 출신이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는 어느 백작가의 사생아였는데, 장남을 대신해 전쟁터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 뒤엔 외모 덕을 톡톡히 보면서 황비 데네브라의 정부가 되었고, 장남이 받아야 했던 작위까지 물려받으며 바이칸 제국에 편입되어 진짜 백작이 되었다.
그런 과거를 가졌기 때문인지, 블라이스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자들과 어울리는 걸 즐겼다. 때로는 그들을 가까이에서 응원하기도 했고, 멀리서 괴롭히며 추락하는 걸 지켜보기도 했다. 그의 괴상한 취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그가 비틀린 인간이라는 건 거의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왕의 애첩이 낳은 아들인데, 왕족으로 대접받지는 못하고 살았다지? 잘생긴 얼굴만 믿고 백수건달인 양 살다가 최근에 갑작스레 샤트린 공주의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보전하려 한다고.”
어느새 레위시아의 최근 행보까지 모두 전해 들은 블라이스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죽기는 싫었나 보네?”
물러터진 바닷가 시골 놈들. 블라이스는 오르테가의 왕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는 상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레위시아 왕자도 왕자이지만, 그 왕자궁에 있는 시녀들이 제법 유명한 모양이라고 하던데요.”
“시녀가 유명해 봤자…….”
“보육원 출신 평민이 죽도록 열심히 공부해서 아카데미 훈장을 받고 시녀가 된 경우라고 하던데요. 한동안 그 평민 시녀 이야기로 시끄러웠답니다. 최근에는 귀족의 대리 시험까지 해 줬다는 소문도 있고.”
“독하네.”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나도 보육원 출신인데.”
블라이스가 입맛을 다셨다. 그의 경우엔 아버지가 사생아로 태어난 그를 보육원에 갖다 버렸다가, 전쟁이 터지니까 다시 찾아와 장남의 대용품으로 삼았다.
“이름이 뭐래?”
“레위시아 2왕자요?”
“아니, 그 시녀.”
“무슨 아르테였는데…… 아! 율리아. 율리아 아르테였을 겁니다.”
“율리아 아르테.”
어쩐지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 블라이스가 2왕자궁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 후 블라이스는 오르테가 왕궁을 돌아다니며 2왕자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1왕자의 약혼식 사건이 하도 시끄러워서 그렇지, 2왕자궁도 만만치 않게 화제였다.
부하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은 그곳에 있는 세 명의 시녀에게 관심이 많았다. 코코와 레위시아가 둘이 살던 예전에는 악마 시녀와 아름다운 왕자님 정도로 불렸는데, 이제는 율리아와 알렉사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별명이 생겼을 만큼 유명해졌다.
“악마 시녀와 평민 시녀, 기사 시녀라고?”
블라이스가 더럽게 촌스러운 별명이라면서 크게 웃었다.
바이칸의 황궁이 떠올랐다. 그곳의 시녀들은 황족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수족에 가까웠는데, 오르테가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듯했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고작 시녀 따위가 왕족을 대변한다니.
“재밌을 것 같아. 가 봐야겠어.”
그는 코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차 따위는 죄다 무시한 채 2왕자궁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왕자궁 앞에 도착하자마자 레위시아를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