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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86/319)

79화

트루디는 왕궁에 사는 비둘기처럼 매일 소식을 물어다 날랐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고, 하녀 언니들이 매일 울상이에요. 오늘만 벌써 세 명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대요. 그런데 그것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나 봐요.”

코코가 빠르게 물었다.

“시녀들은 뭐라고 한다던?”

그녀는 1왕자궁의 시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게 제일 궁금했다. 율리아와 알렉사도 고개를 들고 트루디를 바라보았다. 시녀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자, 트루디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주워 모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쪽 시녀님들이 매일 싸운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녀들이 그러는데, 마조람 후작을 옹호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뉘어서 머리채를 잡을 기세라고 했어요.”

1왕자의 지지 세력은 두 부류였다. 마조람 후작에게 충성하는 쪽과 왕가에 충성하는 쪽. 둘 다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왕족의 시녀는 그의 지지 세력을 대변하기에, 코코는 1왕자궁의 시녀들이 어떤 반응을 내보이는지 그걸 잘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영애가 왕자비가 된다고 했을 때는 다 함께 미워했으면서…….”

“그야 당연하지. 저들도 다 왕자비가 되고 싶었을 텐데. 원래 경쟁자가 강력할 때는 함께 싸우고, 하찮을 때는 이용하는 거야.”

코코가 웃으며 이죽거렸다. 트루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굳이 되물어 그녀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코코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율리아가 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 그늘을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코코와 알렉사의 시선을 느끼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두세요.”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란 둑과 같아서 아주 작은 구멍도 붕괴의 징조가 될 수 있다. 특히 마조람 후작과 국왕처럼 한 나라의 권력을 나눠 가진 사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불신은 깊어지고, 믿음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코코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내버려 두라고?”

“네.”

장작은 충분히 넣었고, 불씨는 뜨거웠다. 이제는 시간조차 그녀의 편이었다. 원수처럼 틀어진 바실리와 샤트린 공주, 그리고 크리스틴과 1왕자.

국왕은 상인연합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고, 마조람 후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손을 손에 넣었다.

“이제 마조람과 왕가의 싸움이 시작될 거예요.”

촘촘하게 심어 둔 가시들이 칼이 되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마조람은 왕가를 길들이기 위해 더 큰 무기를 꺼내 들고,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겁 많은 왕은 마조람을 경계한 나머지 더 든든한 다른 동맹을 찾으리라.

“권력이란 게 공평하게 나눠질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영원한 동맹이란 없다. 역사도 말하고 있잖은가.

* * *

여름 노을이 아름다웠다. 태풍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인지 구름에서 달콤한 향기가 날 것 같았다. 율리아는 트루디가 받아 놓은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작은 욕실 창문에 가득 찬 노을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 이전의 삶에서도 이때쯤 하늘이 저랬던가. 율리아는 기억력이 좋아 쓸데없는 것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려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만약 그때도 오늘과 똑같은 하늘이었다면, 자신은 매번 무얼 하고 있었나.

죽지 않으려고 발악하고 있었을까. 그게 아니면 누군가를 죽이려고 발악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죽으려고 발악하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평화로웠다. 미지근한 온도에 은은한 꽃향기도 우스웠다.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았는데, 왕궁 시녀가 된 뒤로는 유독 몸이 편한 날이 많았다.

“시녀님, 실은 정오쯤에 공주궁에서 사람이 다녀갔었어요.”

트루디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요즘 율리아에게 말을 걸 때마다 심호흡하는 버릇이 생겼다. 무슨 일을 시킬지 몰라 절로 긴장이 되어서였다.

창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율리아가 무심히 물었다.

“왜?”

“시녀님이 좋아하는 게 뭔지, 원하는 게 뭔지…… 그런 걸 꼬치꼬치 물어보더라고요.”

“왜?”

“저한테…… 왕자궁을 떠나 공주궁에서 일하면 어떨 것 같냐고도 물어봤어요.”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멎었다. 시선을 돌리자, 트루디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녀님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

“군것질을 좋아하신다고, 하녀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말했어요.”

“그게 다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역시 영리한 아이였다. 율리아는 트루디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 말해도 돼.”

“네?”

“네가 아는 건 다 말해도 된다고.”

어떻게 그래요. 트루디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율리아는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트루디의 눈에는 그리 조심성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율리아는 애초에 트루디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트루디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지껄이건 상관치 않는 것이다.

또 있었다.

율리아는 트루디가 만약 왕자궁의 시녀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밖에서 떠들고 다닌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것까지 전부 계획해 두고 있었다.

“저는…… 시녀님을 배신하지 않아요.”

“그러니?”

“조금 있으면 궁내부 관리님께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날이 올 거예요. 저는, 저는 그냥 시녀님들이 의외로 사이가 좋다고만 말할 거예요. 공주궁의 시녀님들과 조금씩 친해지고는 있는데, 아직 서먹하다고도.”

“또?”

“코코 시녀님은 보석과 책을 좋아하고, 왕자 전하께서는 매일 공주궁에 다녀오신다고. 여긴 그냥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

트루디의 긴장이 욕조 안에 있는 율리아에게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쓸어 올리고, 겁에 질린 하녀에게 충고해 주었다.

“쓸모 있는 정보를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으면 궁내부 관리가 널 소모품처럼 생각할 수도 있어.”

“그, 그럼 어떡해요? 전 여기서 쫓겨나고 싶지 않아요.”

“가서 샤트린 공주께서 율리아 시녀를 공주궁으로 데려가려 한다고 말해.”

“그런 걸…… 말하라고요?”

“그래.”

율리아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긴 가운을 몸에 걸친 그녀가 트루디에게 말했다.

“공주께서 율리아 아르테를 귀족으로 만들어 곁에 두려고 한다고. 그렇게 말해.”

트루디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하면 뭐든지 일이 잘 풀릴 거라 믿으며, 꼭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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