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약혼식 이후 저택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왕궁에 머물며 왕을 알현할 기회만 노리던 후작은 그제야 피곤한 얼굴로 집에 갈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집사가 복도에 있던 하인을 모두 내쫓았다. 후작의 얼굴에 깃든 노여움을 읽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을 보살피는 하녀들이 아가씨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며 걱정을 쏟아냈지만, 그 이야기도 나중에 하라며 내쫓았다.
후작은 후작 부인과 단둘이 된 뒤에야 왕과 나눴던 대화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제정신이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들어주지 않으면 크리스틴을 파혼시킬 기세더군.”
“상인연합 대표 임명권이 뭔지 몰라서 그걸 왕에게 양보한 거예요? 거절했어야지요. 차라리 땅이나 금화를 주고 왔어야지요.”
“봄부터 금화 수급에 문제가 있었어. 당신도 알잖소. 왕을 달래려면 한두 푼으론 어림도 없는데.”
후작 부인의 우아한 미소에 균열이 생겼다. 후작은 그런 아내를 달래려다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군. 다 잘되어 가고 있었는데…… 바실리 그놈의 자식이 샤트린 공주와 제때 혼사만 치렀어도.”
“아니죠. 당신 말대로 봄부터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지 못하게 된 게 시작이죠.”
비자금이 뚝 끊어진 것도 모자라, 가문의 수족이었던 상인연합까지 빼앗기게 생겼다. 오르테가에 있는 남부상인연합은 뒤로는 해적들의 금화를 유통하고, 앞에서는 바이칸 제국과의 무역을 주도하는 중요한 동맹이었다.
상인연합 대표는 언제나 마조람 후작가에서 추천한 자가 맡았다. 그런데 그 임명권을 왕가에 빼앗기면 연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후작 부인이 미소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
“수습하셔야 해요.”
“그래야지.”
“이게 다 당신이 무른 사람이라 벌어진 일들이에요. 비자금 경로를 진즉에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으로 나눴어야죠. 바실리가 샤트린 공주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못하게 확실히 교육했어야죠. 가주가 되어서 후계자 교육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게 말이 돼요?”
“그게 다 내 탓이란 말이오? 당신은 그동안 뭘 했기에?”
“가주가 할 일을 제대로 못했으니, 가주의 탓이지요.”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로가 쌓이고 쌓여 나무껍질처럼 갈라졌다. 그는 왕 앞에서도 내보인 적 없는 지친 얼굴로 화를 삼켰다.
후작 부인이 그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경고부터 하세요.”
“무슨 경고.”
“왕족을 하나 없애서라도 국왕이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셔야지요.”
“뭐요? 왕족을 없애?”
후작의 목소리가 확 커졌다가 이내 아주 작아졌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 부인의 우아한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섬뜩한 노기가 자리 잡았다.
“당신 진심이오? 아무리 그래도…… 왕족을 죽이라니.”
“그 겁쟁이 왕한테 알려 주세요. 이 오르테가에 마조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걸.”
“도대체 누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족이 있잖아요.”
후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 부인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지 눈치챈 까닭이었다.
“크리스틴은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바실리는 여전히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어요. 가신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와 손을 잡은 귀족들이 동요할 거예요. 그들에게 확실히 알려 줘야죠. 오르테가는 여전히 우리 손바닥 위에 있다는 걸.”
“알겠소.”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당신은 왕이 딴생각하지 못하게 잘 감시해요.”
크리스틴이나 1왕자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딸에게 방해가 되는 여자부터 치우는 게 순서였다.
그런 뒤엔 그 건방진 평민 계집도 확실히 손봐 줘야 할 것이다. 브레웨 아카데미에서 계속 크리스틴의 일을 물고 늘어진다면 그 평민 계집을 죽여서 전부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
후작 부부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후작이 종을 울려 집사를 불러들였다.
* * *
트루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종 신고가 들어왔대요.”
궁내부에 들른 김에 1왕자의 연인을 만나고 오려 했던 트루디는 그녀가 며칠째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서 집으로 찾아갔어요. 전에 놀러 오라고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집안이 난장판이었어요.”
사람이 없는 집에 문은 열려 있고, 가구와 유리는 박살 나 있었다. 치안대엔 이미 실종 신고가 들어온 상태였다고 했다.
잔뜩 겁에 질린 트루디는 곧장 왕자궁으로 돌아와 시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나쁜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죠? 너무 무서워요.”
코코와 율리아, 알렉사는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여름이 시작된 이후 급격하게 날씨가 더워져 시녀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웠다.
세 사람은 책과 과일, 간식 등 각자 좋아하는 걸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트루디가 나타나 1왕자의 연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코코가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야.”
코코는 확신했다. 의심되는 다른 사람도 많을 텐데, 그녀는 후작 부인이 그 여자를 처리했을 거라고 단정했다.
마조람 후작 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알렉사는 그게 정말이냐며 코코에게 물었다.
“도망친 걸 수도 있잖습니까. 협박을 받았다거나, 혹은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을 했는지 깨달았을 수도 있죠.”
“그 여자가? 아서라. 1왕자가 크리스틴이랑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짓이 크리스틴한테 돈을 요구하는 거였다고. 그때도 자기가 임신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건 쏙 빼놓고 말한 이유가 뭐겠어?”
코코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녀는 알렉사의 순진한 상상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
“최소한 한 번 더 돈을 요구할 셈이었던 거야. 나중에 크리스틴한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돌아올 명분도 되지. 왕가의 자손을 가진 여자를 누가 외면할 수 있겠어?”
“하아.”
“왕비께서 왕궁으로 들이려고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는데 거절했다잖아. 왕궁 밖에 저택을 사 달라고 했다면서? 도대체 얼마나 간이 부은 거야?”
트루디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그, 그…… 사람 살아 있겠죠?”
둥근 테이블이 침묵에 휩싸였다. 코코는 굳이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트루디의 말을 부정했고, 알렉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누군가를 처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라면 역시 그것뿐이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한데 율리아의 의견은 달랐다.
“마조람 후작이라면 모를까, 후작 부인이라면…….”
이들 중에 후작 부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단연 율리아였다. 만약 1왕자의 연인을 처리한 게 마조람 후작이 아니라 그의 부인이라면, 그 여자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죽은 것처럼 소문내긴 하겠죠. 마조람과 거리를 두려는 국왕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 하지만 그 여자는 살아 있는 편이 훨씬 더 큰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알렉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율리아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응접실엔 그녀를 포함한 세 명의 시녀와 트루디뿐이었다. 새어나갈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새어나간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감추지 않고 말했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라면 오르테가의 모든 왕족을 죽이고 살아남은 한 명의 왕손을 왕좌에 앉히는 선택지도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트루디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둥근 테이블은 조금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코코는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고, 알렉사는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율리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후작 부인에 대해 잘 모르는 그들로서도 부정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있는 왕족이 다 죽어 버리면 그 여자가 낳을 왕손이 유일한 후계자가 될 테니까.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워낙 유명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1왕자의 약혼식 전야제에 나타나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선포했으니, 오르테가 사교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녀의 실종 소식은 빠르게 왕가에 전달되었다.
국왕 부부는 침묵했다. 치안대 병사들에게 잘 조사해 보라는 말을 전하기는 했으나, 왕실 기사단을 풀어 찾는다거나 어떤 전언을 남기지는 않았다.
화가 난 건 1왕자였다.
1왕자의 분노가 어마어마했다. 애절하게 사랑한 관계가 아니라 해도 한때나마 그의 연인이었고, 그의 자식을 품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드러내 놓고 지목하진 않았어도 모두가 마조람의 짓이라 생각했다. 1왕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조람 후작이 왕족인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후작이 감히 왕족을 협박하고 조종하려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1왕자는 국왕을 찾아가 크리스틴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조람의 허수아비가 되지 않겠다면서, 그 여자를 찾아 데려오지 않는 한 결혼식장엔 한 걸음도 내딛지 않겠다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