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왕이 침전에서 부르는 ‘아내’라는 호칭은 오직 그의 애첩, 레위시아의 어미를 부를 때만 쓰는 말이었다. 왕의 곁에는 측근 시녀가 하나뿐이었는데, 그 측근 시녀조차 침전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애첩을 보살폈다.
왕이 서둘러 안쪽 응접실로 향했다. 침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그곳엔 긴 소파에 옆으로 누워 의사의 진료를 받는 애첩이 있었다.
왕이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의사를 불러야 할 정도로 안 좋았어? 어때, 괜찮은가?”
“만성적인 통증이라, 그저 잘 쉬고 마음을 편하게 하시는 수밖에는…….”
“매일 똑같은 소리도 지겹군. 나가 보게.”
왕이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의사는 진료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소파에 누워 있던 애첩의 눈가엔 물기가 축축했다. 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제가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지겨우세요?”
“또 왜 그러느냐. 그런 소리가 아닌 걸 알면서.”
“전하께서 마음이 좋지 않아 저녁을 거르셨다고 들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저 혼자 뭘 먹을 수가 없어서…….”
“너는 도대체!”
왕이 언성을 높이려다 서둘러 말을 삼켰다. 그는 애첩의 곁으로 빠르게 걸어와 그녀가 누운 소파 끝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내가 없으면 잠도 못 자고, 내가 밥을 안 먹으면 물도 못 삼키고, 내 기분이 안 좋다고 네가 우울증에 걸려서는…… 어쩌자는 것이냐. 응? 내가 너보다 먼저 죽으면 도대체 어찌 살아가려고 그래!”
“죽을 거예요.”
“뭐?”
“전하가 안 계시는 궁에서 어떻게 살아요. 저도 같이 죽어요.”
애첩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떨리는 목소리는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수치와 분노로 부글거리던 왕의 마음이 설탕처럼 녹았다. 그가 없으면 숨도 못 쉬겠다는 여자 앞에선 왕 역시 한 사람의 남자일 뿐이었다.
하물며 그의 애첩은 한때 바다의 세이렌이라고 불렸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눈빛은 넘치기 직전의 샘처럼 찰랑거리고, 목소리는 새처럼 맑았다. 나이를 먹은 지금도 자잘하게 주름이 지고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자라긴 했으나 구석구석 곱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리 와.”
왕이 두 팔을 벌려 애첩을 품에 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눈물 젖은 뺨을 비비며 애첩이 울음 섞인 고백을 속삭였다. 너무 보고 싶었다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전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왕은 천천히 그녀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달랬다.
“내가 없어도 잘 자고, 잘 먹어야지. 네가 이렇게 아파하면 너무 걱정되어서 내가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잖으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지극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애첩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품이 아니면 죽을 것처럼 애처롭게 울면서도 그녀의 심장만은 메마른 사막처럼 쩍쩍 갈라져 끝없는 갈증에 시달렸다. 왕의 사랑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사막의 모래와도 같았다.
왕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난 역시 왕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
“전하…….”
“너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었을 것을.”
지난 지 수십 년이 된 이야기인데도 왕은 종종 이렇게 왕좌에 오른 걸 후회하는 것 같은 말을 흘렸다. 꼭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별거 아니다. 마조람 후작이 하는 짓이 너무 괘씸해. 동맹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적당히 혼내 줄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구나.”
“저는 그런 거 잘 몰라요. 그냥 전하께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제 곁에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어요.”
“네 마음이야 내가 제일 잘 알지.”
국왕의 애첩은 그의 침전에서 절대 정치적인 충고나 조언을 건네지 않았다. 그녀의 역할은 오직 왕을 달래고 쉬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좀 나아졌지? 어서 뭐라도 먹어야지.”
“네, 전하.”
우울하고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다던 사람이 왕의 품에선 조금이나마 생기 있는 얼굴로 웃었다.
늦게나마 식사를 해야겠다는 왕을 위해 시녀가 바깥에 대기 중인 하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시중을 들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왕은 시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자네에겐 늘 고맙게 생각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당연한 일인 것을요.”
“아내에게 잘해 줘. 약한 사람이잖아.”
“그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왕과 시녀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애첩은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왕은 시녀가 고른 긴 가운을 걸치면서 중얼거렸다.
“파혼시키는 건 어려울 것 같고, 후작에게서 뭐라도 빼앗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전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뭐가 좋을까. 너무 큰 걸 달라고 하면 반발할 테고, 너무 작은 걸 달라고 하면 내 체면이 서질 않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명분만 가져오세요, 전하.”
“명분?”
“유명무실한 것들 있잖아요.”
“그래? 뭐가 좋을까.”
“요즘 상인연합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의 사령관이 비자금을 착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해적들의 금화가 유통된 것도 어쩌면…….”
왕의 측근 시녀는 왕의 은밀한 보좌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가 일하는 곳이 대전이 아니라 침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시녀의 말을 듣던 왕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마조람 후작이 상인연합을 손에 쥐고 있었지.”
침대에 누운 애첩이 손짓으로 하녀를 불렀다. 식사 후에 먹고 싶은 디저트를 말해 주려는 것이었다. 이제야 입맛이 도는 모양이라며, 왕이 기꺼운 듯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그만 쉬어.”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왕과 애첩이 침대에 앉아 하녀들이 가져온 호화로운 음식을 맛보는 동안, 왕의 측근 시녀는 침전 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응접실을 찾았다.
레위시아 2왕자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왕께서 오셨어요.”
“또 열심히 꾀병 부리고 계시겠네.”
레위시아가 습관처럼 웃었다. 무게가 없어 허망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한결같은 차분함으로 왕을 모시던 시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안쓰러움이었다. 그녀는 레위시아를 버림받은 어린애 보듯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몇 번을 말해?”
“왕자님.”
“그대는 내 유모였지, 어머니가 아니잖아.”
“제가 감히 왕자 전하를…….”
“그대가 내 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야 많지만.”
레위시아가 하하 웃었다.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나 남은 왕의 측근 시녀는 한때 레위시아의 유모였고, 성장기에 가장 오랫동안 그를 보살핀 사람이기도 했다.
“왕께는 잘 말씀드렸어요.”
“고마워, 유모.”
레위시아가 시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자잘한 주름으로 가득한 손이었다. 장성한 아들이 있는데도 소녀처럼 부드럽기만 한 어머니와는 다른, 그를 직접 어르고 달래던 손이기도 했다.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설마 왕이 되려 하세요?”
“어떨 것 같은데?”
“너무 위험해요. 저는 전하께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는데…….”
“그럼 왕이 되어야겠네.”
시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레위시아가 오래오래 살 방법은 사실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왕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내밀었다가 흠칫 놀라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레위시아는 아무도 보살피지 않았는데 혼자 잘 자란 아이였다. 그의 외로움은 한때 유모였던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어머니의 행복 말고는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아이. 레위시아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바라보는 어른을 슬프게 하는 아이였다.
“전하.”
시녀가 레위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볼일이 끝난 그가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왜?”
“왕께 사랑받는 아들이 되세요.”
“미쳤어?”
“거짓으로라도 해 보세요. 왕을 존경하고, 위하는 척이라도…….”
“유모, 그만둬.”
“자존심을 조금만 버리면 아주 큰 보답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이 늙은 유모의 말을 명심하세요. 왕께서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어요. 그분은 그저 왕좌에 앉아 계실 뿐이지, 여느 평범한 아비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걸 항상 기억하세요.”
레위시아는 유모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유모를 어깨를 살짝 끌어안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왕의 침전을 떠났다.
1왕자의 약혼식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한동안 마조람 후작의 알현을 거절했던 왕이 드디어 그를 불러들였다. 그러곤 선대부터 후작가에 일임되어 있던 상인연합 대표 임명권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후작은 당황했다. 에둘러 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이 파혼을 입에 담자, 한참 고민한 끝에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