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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83/319)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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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이스 백작이 가져온 건 카루스 란케아를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으로 임명한다는 서한이었다. 국왕은 백작이 내민 황제의 서한을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고 전해졌다.

사절의 등장과 함께 치러지기로 했던 남부 함대 출정식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오르테가에도 황비와 무혈 제독이 원수지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많았다. 블라이스 백작은 황비의 수족이었기에 황제의 서한을 전달하기만 했을 뿐, 카루스의 출정식을 화려하게 치러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1왕자의 약혼식이 취소된 뒤부터 국왕은 여전히 마조람 후작의 알현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황제의 사절이 방문한 날 하필이면 해방군이 무력시위를 했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오르테가에 망조가 들었다.

노인들 사이에서 슬슬 그런 소문이 나돌았다.

“부왕께서 미쳐 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레위시아가 얇은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는 언젠가부터 예전의 화려했던 차림새를 때려치우고 깔끔하고 남자다운 디자인의 옷을 즐겨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녀들이 모여 있는 응접실에 나타나더니 코코의 분홍색 부채를 빼앗아 제 얼굴에다 대고 부쳐서 그녀의 비웃음을 샀다.

“미쳐 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손을 놓고 계신 것 같던데요. 국왕께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여기서 마조람 후작에게 져 주기는 싫고.”

“후작도 참 대단하단 말이야. 부왕이 뭘 요구하는지는 몰라도, 그냥 줘 버리면 될 것을.”

“해방군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텐데.”

“손대기 어려울걸. 태풍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 폭동 얘기가 나온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듣던 알렉사가 율리아를 흘깃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녀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상황을 분석했을 텐데, 어쩐 일인지 너무 조용했다.

율리아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흘러내렸다. 도도해 보일 만큼 단정했던 얼굴이 살짝 풀려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혹 입술을 오므리거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알렉사가 불쑥 말을 걸었다.

“무슨 고민 있습니까?”

알렉사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 안에 깃든 염려를 느꼈는지 창밖을 바라보던 율리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사와 코코, 레위시아가 모두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루스와의 대화 이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그녀는 이렇게 종종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과거를 곱씹었다.

지난 삶의 코코, 지난 삶의 알렉사.

죽지도 못한 채 계속 살고 있으면서 자꾸만 과거에 매달리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그녀 역시 사람인지라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냥 다 말해 버릴까.’

이번 삶을 실패하게 되더라도 한 번쯤은 시도해 볼까.

코코는 정이 많으니까, 알렉사는 율리아를 은인이라 여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믿어 주지 않을까.

하지만 율리아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번 삶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던 카루스의 말이 떠올랐다. 잔인하게 느껴지는 한편, 절절하도록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율리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코코가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혀를 쯧 차고 말했다.

“별일이네. 이렇게 중요한 대화 중에 네가 딴청을 다 부리고.”

“제가 그랬어요? 죄송해요.”

“사과하라고 하는 말 아니야. 신기해서 그러는 거지. 우린 그냥 국왕이 마조람 후작에게 뭘 요구할지, 그걸 궁금해하는 중이었어.”

레위시아가 코코와 알렉사 사이에 의자를 가져와 끼어 앉았다. 율리아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땅이나 돈 같은 걸 원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지? 후작이 가진 것 중에서 부왕이 탐낼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많았다. 여기서 하나씩 말하라고 하면 열 손가락을 다 쓸 수도 있었다. 창밖을 향해 있던 율리아의 몸이 완전히 이쪽으로 향했다.

“마조람 후작을 직접 건드리지 않으면서 국왕 전하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거겠죠.”

“넌 부왕이 후작에게 뭘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마조람 후작 가문이 대대로 소유하고 있던 권리요. 예를 들면…… 상인연합 대표 임명권 같은 거죠.”

레위시아가 들고 있던 분홍색 부채를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놓았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알렉사가 코코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코코의 입술이 비뚤어지더니 한쪽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마조람의 돈줄을 왕가에서 쥐겠다는 이야기지.”

“상인연합이 그렇게 대단한 곳입니까?”

알렉사는 그곳에 관심이 많았다. 과거 그녀의 부모님도 상인연합과 얽히면서 그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알렉사에게 용병 짓을 시키면서 이자를 불리던 못된 고리대금업자도 상인연합과 관련된 자들이었다.

이번에는 율리아가 코코를 대신해서 설명해 주었다.

“남부상인연합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상회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런 곳의 대표를 그토록 오랫동안 마조람 후작이 입맛대로 꽂아 넣었다는 건, 후작이 연합에 대한 지배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죠.”

“아…….”

“마조람 후작이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면서 비자금을 쌓았던 것도 상인연합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만약 국왕께서 그 권한을 회수하신다면, 후작은 장기적인 자금난에 시달리게 될 거고요.”

“와, 카루스 란케아가 아주 큰일을 했네. 그자가 전임 사령관을 황제한테 고발하는 바람에 해적 놈들이 먼바다로 숨어 버렸으니.”

레위시아가 감탄하며 꺼낸 말에 율리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왕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카루스의 이름이 낯설면서도 간지러웠다.

율리아가 카루스를 떠올리는 사이, 레위시아가 코코와 한 차례 눈을 맞추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부왕께는 내가 전달하도록 할게.”

“네? 전하께서요?”

“걱정하지 마. 이 이야기가 우리 궁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절대 들키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하시게요?”

“다 방법이 있어.”

레위시아의 시선이 왕의 침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골이 난 얼굴이었다.

“이럴 때는 내가 부왕의 친자라는 게 참…….”

“그럼 주워 온 자식이었으면 좋겠어요?”

코코가 쌀쌀맞게 물었다. 하지만 레위시아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어딘가 먼 곳에 친아버지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그녀를 허탈하게 했다.

“부왕의 침전에 마구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사적인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라서. 다행히 내 어머니가 그곳에서 거주하고 계시지.”

“그것참 다행이네요.”

코코가 그의 손에서 분홍색 부채를 빼앗았다. 그러곤 힘내라는 뜻에서 요란하게 바람을 부쳐댔다.

오르테가의 국왕이 황제의 사절에게 무릎 꿇었단 소식이 온 나라에 퍼졌다. 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에서 온갖 자극적인 말로 부풀려졌다.

왕이 네발로 기어 나와 사절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다더라. 사절이 왕좌에 앉아 왕의 문안을 받았다더라. 황제가 오르테가를 침략하기 위해 의도적인 도발을 하고 있다더라.

사람들은 왕을 욕했고, 창피해했으며, 안쓰럽게 여기기도 했다.

“난 왕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국왕도 실은 블라이스 백작에게 무릎 꿇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무릎이 아니라 아예 배를 까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한 행동일 뿐이었다.

피해의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가까운 곳으로 흘렀다. 왕의 분노는 놀랍게도 제국이 아니라 마조람 후작을 향하고 있었다.

“요즘 후작이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바실리의 일까지는 젊은 애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특별히 관대하게 넘어가 준 거였는데…….”

왕은 침전에 있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자 중년의 시녀가 다가와 화려한 재킷을 벗겼다. 그러곤 셔츠 단추까지 빠르게 풀었다. 공손하면서도 노련한 솜씨였다.

“후작은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나 참, 약혼식에서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애들끼리 싸우는 것도 피곤해 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써야겠어?”

왕이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시녀는 왕의 몸에 좀 더 편안하고 품이 넉넉한 셔츠를 입힌 뒤에 장신구까지 떼어 냈다.

“파혼은 무리겠지?”

왕이 혀를 차며 물었다. 입을 다문 채 그의 시중만 들던 중년의 시녀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큰 왕자께서 파혼을 원하시는 건가요?”

“어린애가 아니니 떼를 써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은근슬쩍 마조람 영애가 왕자비가 되면 왕실 역사에 수치스러운 혼사로 기록될 거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네 번이나 하고 갔어.”

“큰 왕자께서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지요.”

“왕이 될 놈이 자존심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왕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굴한 자가 앉아야 하는 자리이거늘.”

왕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시녀는 감히 왕의 그런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숙인 채 그가 웃음을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아내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떻던가?”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내내 우울하셨습니다. 온종일 전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셨지요.”

“허…… 그 마음의 병은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질 않는구나.”

왕이 탄식하며 말했다. 시녀는 그저 애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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