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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82/319)

75화

왕자궁은 왕궁 입구에서 꽤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지 않고도 산책하듯 걸어서 정문이 보이는 곳으로 왔다.

“이게 바로 명당이지.”

코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왕궁에서 가장 지대가 높아 정문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캄캄한 밤이라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코코가 까치발을 들고 블라이스 백작을 구경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율리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저렇게 사람이 많지.”

“왜긴? 제국에서 사절이 왔으니까 그렇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구경하고 싶지 않겠니?”

“그게 아니라, 정문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사람이 많아요.”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유난히 횃불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코코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벌써 마중 나왔나? 근데 분위기가 왜 저래?”

오르테가는 20년 전 국왕의 항복 선언 이후 곧바로 바이칸 제국의 군사적 지배를 받게 되었고, 국왕은 황제가 보낸 사절을 극진히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정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한 무리의 청년들에게선 환대는커녕 당장 칼이라도 빼 들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코코, 저 사람들 누구예요?”

“누구? 안 보여.”

“자세히 좀 봐요.”

“이게 진짜.”

코코는 짜증을 내면서도 궁금하긴 했던지, 발판까지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 갑자기 율리아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숙여.”

“왜 그래요?”

“숙이라고!”

코코가 율리아를 붙잡고 몸을 낮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밌는 구경거리가 났다면서 흥미로 가득하던 코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우리 그냥 돌아가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코코는 율리아에게 왕자궁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율리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면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그녀가 겪었던 과거에서는 단 한 번도 블라이스 백작이 사절이 되어 오르테가를 방문한 일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카루스 란케아가 티타니아에서 죽은 부하들의 복수에 성공했을 때, 가장 먼저 숙청된 자였다.

이건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단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전 안 돌아가요.”

“이 미친 것아. 우리 이러다 큰일 나! 저 사람들 해방군이란 말이야.”

“네?”

율리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여기서 해방군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요새 좀 조용해졌나 싶었는데, 황제의 사절이 온다고 하니까 또 어디서 튀어나왔나 보다.”

“먼저 들어가요. 저는 끝까지 보고 갈 테니까.”

“여기서 누가 칼이라도 뽑아 들면 진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 넌 진짜 무서운 게 없니?”

전쟁이라면 과거에 몇 번 겪었다. 하지만 그건 꽤 먼 미래의 일이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요. 지금 오르테가에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들 만큼 용감한 왕족이 있을 것 같아요?”

율리아가 되묻자, 코코가 멈칫하더니 그건 그렇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왕궁 입구에서 황제의 사절을 막아서고 있던 해방군 중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바이칸의 개새끼들아!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다! 오르테가는 독립 왕국이야!”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주위가 고요했다. 그래서 그 해방군 전사의 목소리가 왕궁 앞을 우렁우렁 울리고도 남았다.

“물러서지 않으면 베겠다.”

제국군 사이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블라이스 백작을 호위하던 기사였다.

그러자 해방군 전사가 더욱 분개하며 소리쳤다.

“너희가 그러고도 기사란 말이냐! 어찌 약자를 죽이고 괴롭히면서 명예를 논하는가! 너희는 기사가 아니야! 살인자, 약탈자라 불러야 한다!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너희 황제의 정복 전쟁은 끔찍한 대량 학살로 기록될 것이다!”

가슴 절절한 분노가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그들 중엔 귀족도 있었고, 학생도 있었다. 무기에 익숙해 보이는 자도 있었고, 칼을 쥐는 것조차 어설프고 버거워 보이는 자도 있었다.

“천하에 무도한 놈들! 우리가 너희를 목숨으로 막을 것이다!”

“당장 꺼져라! 오르테가는 오르테가의 것이야!”

이쯤 되자 블라이스 백작도 더는 참아 주기 어려웠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손짓하자, 제국군 기사들이 무기에 손을 댔다.

왕궁 입구를 지키는 오르테가의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왕이 나타나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기만을 바랐다.

긴장의 끈이 끊어질 듯 팽팽했다. 모두가 심각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그때, 블라이스 백작만은 혼자 웃고 있었다.

“다 죽고 싶은가 봐.”

백작이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감히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들다니. 건방진 게 아니라, 무식한 거라고 해야 하나? 이봐, 너희들. 잘 들어. 우리는 이 쪼그만 나라를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짓밟을 수도 있었어.”

백작이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율리아도 그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왕이 나올 때까지 한 놈씩 죽여라.”

백작이 품에서 화려한 인장을 꺼내 들었다. 황제의 사절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인장이었다.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 겁쟁이들이라고 들었는데, 어디 한번 볼까. 주둥이만 살아 있는 놈들인지, 아니면 진짜 배짱인지.”

바이칸의 기사들이 칼을 뽑아 들어 올렸다. 시퍼런 칼날이 차가운 빛을 머금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불안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해방군이 먼저 움직였다.

“놈의 사지를 찢어라!”

그들은 한꺼번에 블라이스 백작을 향해 움직였다. 제국군 기사들도, 왕궁의 병사들도 모두 무기를 꺼내 들었다.

국왕은 그때 나타났다.

“국왕 전하!”

화려한 중년의 남자가 빠르고 우아하게 걸었다. 왕은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가 정문 앞에 바로 섰다.

그러곤 황제가 보낸 사절 앞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만세!”

왕이 먼저 외치자, 왕의 뒤를 따르던 수십 명의 보좌진과 시녀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바이칸 제국 만세!”

왕국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인간의 파도였다. 전투 마차를 타고 나타난 황제의 사절 앞에 오르테가는 잘 길들인 개처럼 엎드렸다.

“미욱한 신하가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오르테가는 위대한 제국의 작은 이웃으로서, 영원히 충성스러운 벗이 되겠노라 약속합니다.”

왕은 꼭 미리 준비라고 한 것처럼 자연스레 말했다. 극진하다 못해 비굴한 환대였다.

왕의 두 손은 흙바닥을 짚고 있었으며, 왕의 무릎은 땅에 완전히 밀착되어 그를 더욱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둥글게 구부러진 등에서 속국 국왕의 두려움이 엿보였다.

율리아와 코코는 할 말을 잃은 채 그 장면을 노려보았다.

오르테가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달려 나왔던 해방군도 마찬가지였다.

전의는 사라졌다. 왕의 무릎이 땅에 닿은 순간, 그들은 벌건 눈을 하고 그 자리에 서서 침통한 신음을 삼키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블라이스 백작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옳은 왕이십니다.”

그의 목소리엔 가벼운 웃음기마저 묻어나 있었다.

왕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감히 황제 폐하를 욕보인 자들이다. 이 자리에서 전부 목을 쳐라!”

제국을 증오하는 해방군은 제국에 충성하는 왕에게 적과 다를 바 없었다.

“저, 전하…… 그것은.”

당황한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해방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무모하게 군다고 해도, 그들도 결국은 오르테가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왕의 입에서 그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노한 해방군이 이번에는 국왕을 향해 소리쳤다.

“국왕! 당신이 그러고도 오르테가의 왕이란 말인가!”

“놔라! 왕이 개가 되었다. 버러지가 되었어! 우리의 왕이 황제의 가랑이 사이에서 쓰레기나 주워 먹는 자라니!”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오르테가는 당신 때문에 멸망할 거야!”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병사들이 해방군의 목을 자르기 위해 움직였다. 병사들의 얼굴에도 핏기가 없었다. 누구도 이 비극 앞에서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블라이스 백작만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가 성큼성큼 걸어 네 발로 엎드린 국왕에게 왔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꿇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려 왕을 끌어안아 일으켰다.

“제가 아주 큰 착각을 했지 뭡니까. 오르테가의 국왕께서 감히 황제 폐하께 반기라도 들려 하는 줄 알고!”

“그럴 리가…….”

“그럼요. 그럴 리가 없지요! 하하하!”

블라이스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놈들을 처형 하려거든 내가 없을 때 해. 피는 질색이니까. 그 뻘겋고 비린내 나는 건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병사들이 칼을 집어넣었다. 제국군 기사들도 칼을 집어넣었다.

무력으로 시위하려던 해방군은 모두 감옥에 갇히고, 블라이스 백작은 국왕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귀빈궁으로 안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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