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런 일을 겪고도 내 손을 잡을 수가 있지?”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당신의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있어요?”
“내가 원망스럽지 않았어?”
“제가 어떻게 당신을 원망해요. 카루스 님은 매번 저를 살려 주시는데요.”
“그건…….”
정말 우연이었다. 이전 생의 카루스에게는 아마 기억으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율리아는 그걸 알면서도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계속 되새겼다.
“이번 삶에서는 제가 당신의 손을 잡았으니까, 또 한 가지 불행을 미리 피한 셈이에요.”
“이번 삶에서는.”
카루스가 그녀의 말을 가만히 따라서 했다.
이쯤 되자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티타니아 산맥에서 마주쳤던 자들은 정말로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숙련된 레인저 부대였고, 데네브라 황비의 명령을 받고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부하들이 모두 죽었다면 카루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발길을 돌려 제국으로 돌아갔으리라. 확실했다. 데네브라 황비와 그녀의 수족을 모두 제거하고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말이 맞아.”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황제는 나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는다.”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황제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이칸에 영웅은 황제 한 사람으로 족해요. 황제는 카루스 님의 명성이 더럽혀지길 원해요. 당신이 실수하고 무능해질수록 당신을 신임할 거예요.”
카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능하고 모자란 부하일수록 신임할 거라니. 그가 황제의 지독한 의심병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웃음을 멈추기만을 말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다음 삶이란 건 없어.”
“……네?”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불행을 한 가지 피했으니 다음 삶을 기약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처럼 죽은 뒤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저 끝이라는 생각으로 살아.”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세 번 죽었을 때부터 그녀에게 불가능해진 일이었다. 카루스는 그렇게 어려운 걸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카루스 님.”
“네가 삶을 반복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까지 소모하면서 살지 말라는 말이다.”
숨이 콱 막혔다. 다른 사람을 소모하다니.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죽고, 죽고…… 또 죽고. 배신당하고 버려지고. 자신을 학대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겠지.”
카루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는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불쑥불쑥 치솟는 격정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카루스의 감정이 낯설었다. 그는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오직 율리아를 생각했다.
“나는 네 말을 믿기로 했어.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저는…….”
“네가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이야.”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카루스는 말재주 없는 자신을 탓하듯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까부터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붙잡고 있는 율리아의 손을 힘주어 풀어냈다.
그녀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너를 믿어.”
그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이제는 의심 섞인 명령조가 아니었다. 믿어 보려고 노력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믿는다고 했다. 이전 삶의 코코처럼.
손가락 끝에 닿은 온기가 간지러웠다. 경련하듯 살짝 손을 떨었던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크고 거친 손에 그녀에게 없는 온기가 가득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인 자신과 매 순간 뜨겁게 투쟁하며 살아온 그의 온도 차였다.
너무 부러웠다. 너무 억울했다. 나는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토록 고통스럽게 삶을 반복하고 있는가. 차라리 첫 번째 삶에서 눈 속에 파묻혀 얼어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두 번째에서라도. 혹은 세 번째라도 좋으니까.
죽어서 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이렇게 증오와 집착만 남아 미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을 텐데.
매번 나를 살려 주는 당신에게 감사하지만, 매번 나를 살려 주는 당신을 증오한 적도 많다는 걸.
어떻게 말할까.
율리아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았다. 그러곤 꽉 잠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어둠에 잠긴 오르테가 중앙광장에 수십 대의 전투 마차가 나타났다. 철갑을 두른 말들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달리고, 굉음과 함께 등장한 그들을 바라보며 행인들이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멈춰! 여기서 멈춰라!”
선두에서 달리던 기수가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한 마차에 다가와 말했다.
“사절께 보고 드립니다.”
마차 안에는 바이칸 제국의 황제가 오르테가에 보내는 사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기수의 목소리를 듣고도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부관의 재촉을 받은 뒤에야 느긋하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앞에 오르테가 왕궁이 보입니다. 이대로 진격하실 겁니까?”
보고하는 기수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사절은 기사들의 예우를 당연하게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 코트를 입은 잘생긴 남자였다. 처진 눈꼬리에 짙은 화장, 코트 사이로 드러난 육감적인 몸에서 짙은 사향이 흘러나왔다.
데네브라 황비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블라이스 백작. 그는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남쪽 변방 오르테가 왕국에 도착했다.
“시골이로군.”
블라이스 백작은 중앙광장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곧장 왕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짠 내 섞인 바람이 불어.”
백작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 굉음을 내던 전투 마차들이 조용해졌다.
“촌스러운 냄새지.”
그가 중얼거렸다. 초콜릿을 채운 듯 진득한 눈동자에 실낱같은 흥미가 깃들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수가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다시 보고를 올렸다.
블라이스 백작은 오르테가 왕궁을 향해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어이 덩치들, 우리는 정복 전쟁을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렇습니까?”
“이미 정복된 나라에 진격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지.”
그의 말에 몇몇 기사들이 흉흉한 웃음을 흘렸다. 백작은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며 감정 없는 말투로 명령했다.
“마중 나오는 자가 왕이면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멈춰.”
“알겠습니다.”
“나는 폐하의 대리인이다. 속국의 왕은 나를 맞이할 때 감히 두 발로 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자정도 지난 새벽, 바이칸 제국의 황제가 보낸 사절이 오르테가 왕궁에 도착했다.
황비 데네브라의 오른팔이자 정부라 소문난 블라이스 백작은 왕궁 입구에 버티고 서서 왕의 마중을 요구했다. 두 손과 발이 모두 땅에 닿아 있어야만 마중으로 인정하겠다는, 실로 오만한 명령과 함께였다.
이것은 바이칸 제국의 황제가 속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작한 굴욕적인 행사였으며, 아직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는 오르테가의 일부 귀족들에게 던진 경고이기도 했다.
사절 방문과 무혈 제독에 대한 소문으로 온 왕궁이 들썩거릴 때, 2왕자궁은 그 풍파로부터 유일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왕국의 권력자들이 레위시아 오르테가를 진짜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율리아는 트루디가 챙겨 준 부드러운 빵과 차가운 우유를 손에 들고 침대에 눕듯이 기대앉았다.
“야, 율리아.”
그런데 코코가 그녀의 평화를 단번에 깨뜨리며 나타났다.
“둔한 건지, 대담한 건지. 온 나라가 이리 들썩, 저리 들썩 난리인데 빵이 목으로 넘어가니?”
“안 넘어갈 건 뭐예요. 전쟁이 나고 사람이 죽어도 빵은 먹어야죠.”
“그건…… 그래.”
코코가 피식 웃더니 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구경이나 하러 가게.”
“네?”
“알렉사는 일찍 잠들어서 깨우기 좀 그래. 너라도 일어나.”
“구경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절이 도착했대. 왕궁이 온통 난리야. 소문 무성한 황비의 정부를 눈앞에서 볼 기회라고!”
코코는 바이칸 제국의 황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황실의 실세라는 데네브라 황비의 정부이자,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오르테가에 방문한 블라이스 백작에 대해서도 대충 알고 있었다.
“적국의 포로였고, 천출 사생아였는데, 잘생긴 얼굴 하나로 황비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단번에 백작위를 계승한 남자라며.”
“코코, 지금 자정도 넘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정문 앞에 도착할 때쯤이면 사절을 귀빈 궁으로 모시고도 남았겠죠.”
“아냐, 멍청하긴.”
코코가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왕이 마중 나와서 네 발로 엎드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대. 지금 바이칸의 전투 마차들이 왕궁 입구를 막고 있어.”
“네?”
율리아가 우물거리던 입을 우뚝 멈추고 코코를 바라보았다.
“넌 구경하고 싶지 않아? 우리 국왕 전하가 얼마나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 나올지.”
코코가 진짜 보고 싶은 건 황비의 정부라는 블라이스 백작의 얼굴일까, 아니면 네 발로 마중 나오는 왕의 모습일까.
율리아는 차마 그것까진 묻지 못한 채 코코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