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환영하는 의미로 연회를 열겠다고 하더군.”
“그 전에 한번 만나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
“국왕에게 겁을 주세요. 황제가 오르테가를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보호 동맹이란 어중간한 상태로 놔두는 것보단 이제라도 정복해서 바이칸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세요.”
카루스는 율리아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황제에게 맹세한 기사로서, 그분의 마음을 거짓으로 떠벌릴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게 거짓이 아니라고 믿었다.
“거짓이 아닌 걸 알잖아요. 오르테가의 귀족이라면 어린애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국왕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수긍하지 못해서 여태 외면하고 살았고요. 그러니까 상기시켜 주세요.”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왕이 카루스 님께 의지하게 만드는 거예요.”
블라이스는 불쾌한 등장을 할 게 뻔하다. 황제가 그를 사절단 대표로 임명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블라이스 백작은 바이칸 제국에서도 악명이 높을 만큼 잔혹한 쾌락주의자였다. 오르테가를 시험대에 올리기에 최적의 인물인 것이다.
국왕은 블라이스 백작에게 온갖 수모와 모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 카루스가 뒤에서 은밀하게 국왕을 도와주며 블라이스와 대립각을 세운다면 어떨까.
“국왕은 마조람 후작이 아니라, 카루스 님의 손을 잡으려고 하겠죠.”
카루스 란케아는 바이칸 황제의 두 번째 기사이니까 친제국파 따위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그 한 사람만 못하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왕가와 마조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면서 카루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쥐여 줄 수 있다고, 율리아가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엔 함께 차를 마셨다. 카루스는 작은 잔에 담긴 차를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는 바바슬로프를 보고 말했다.
“왜 계속 여기 있는 거냐.”
“예? 저 여기 있으면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는데, 이유는 좀 알고 싶어.”
“율리아가 체할까 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카루스가 이번에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바바슬로프가 전에 그랬어요. 카루스 님이랑 겸상하면 체한다고요.”
“네가?”
카루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바바슬로프에게 꺼지라는 말로 짧은 명령을 내렸다.
“당장 꺼져.”
“가지 말라고 하셔도 갈 겁니다.”
바바슬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어린 여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손길이었다. 율리아는 그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면서 푹 쉬라는 인사를 건넸다.
카루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아니꼽다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넌 타인에게 벽이 높은 편인데 유독 바바슬로프 저놈에겐 관대하네.”
“그렇게 보여요?”
“그렇게 보여.”
“카루스 님한테는 더 관대한 것 같은데요.”
율리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늘따라 유독 웃음이 많은 그녀였다. 카루스와 손을 잡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을 믿어 주려 노력한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는, 꼭 이전 생의 코코와 함께일 때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세요.”
“네 이전 생의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듣고 싶은데.”
카루스는 율리아가 저주에 걸려 있다는 걸 믿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녀의 기억에만 남은 이야기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려워. 그래도 듣고 싶다고 말하면, 거절할 건가?”
“아뇨.”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꼭 들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한 걸음 다가왔으니, 이제 자신이 두 걸음 다가갈 차례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율리아가 몰래 심호흡하며 카루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카루스 님, 당신은 황제를 배신했어요.”
그의 검은 눈이 깊었다. 카루스는 율리아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카루스 란케아는 바이칸의 황제에게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황제에게 자식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카루스일 거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을 정도였다. 황제의 뜻이 향하는 곳엔 언제나 카루스가 있었다. 그가 황제의 두 번째 기사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나 카루스는 황제를 배신했다. 율리아가 너무 일찍 죽었던 초반의 몇 번을 제외하고, 카루스는 그녀의 과거에서 매번 황제를 배신했다.
“시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늘 같았어요.”
“티타니아에서 내 부하들이 모두 죽었다더니, 그 일 때문인가?”
“그것까진 알지 못해요. 제가 아는 건 그 이후 당신의 행보예요.”
“들려줘. 알고 싶군.”
카루스의 눈빛이 어두웠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부하들에게 주위를 물리라고 명령했다. 그러곤 창문까지 모두 닫은 뒤에야 율리아 앞에 앉았다.
찻잔에 물 따르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릴 만큼 조용해진 뒤에야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산맥에서 부하들이 모두 죽은 뒤, 당신은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곧바로 제국으로 돌아갔어요. 리바이어던 기사단과 함께 복수자가 되어 데네브라 황비와 맞섰죠. 긴 싸움이었고, 황제는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았어요.”
작위와 재산, 권리까지. 황제는 카루스에게 복수를 그만두지 않으면 네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경고했다.
카루스는 율리아가 말하는 동안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앉아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당신의 영웅담은 더럽혀졌어요. 사람들은 카루스 란케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늙은 황제 몰래 황비와 정을 통하더니, 그 황비마저 버린 배신자라고요.”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자들의 추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카루스 란케아는 언제부터인가 무혈 제독이 아니라 배신자, 혹은 복수자라고 불렸다.
“복수에는 성공했어요.”
데네브라 황비는 결국 카루스의 손에 죽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의 전쟁을 부추기며 이득만 취하던 황제는 그제야 분노를 드러냈고, 당신을 오르테가 남부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했어요. 유배였죠. 황제의 두 번째 기사라는 이름도, 리바이어던 함대의 지휘관이란 자리도 모두 빼앗긴 뒤였어요.”
그때 카루스의 곁에 남은 건 끈질기게 살아남은 리바이어던 기사단뿐이었다.
“그게 언제지?”
“내년 봄에 일어날 일이었어요.”
카루스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율리아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불행이었어요. 황제만 이득을 본 싸움이었죠.”
“나는 순순히 황제의 명에 따라 남부 함대의 제독이 되었나?”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어요.”
카루스 란케아는 복수자였다. 율리아는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배포가 컸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을 꾸몄다.
“당신은 남부를 통일하려고 했어요.”
“뭐?”
“오르테가와 남부 해안 세력, 그리고 제국에 반기를 든 모든 국가를 통합해서 연합을 만들려고 했어요.”
“성공했어?”
“몰라요. 언제나 제가 먼저 죽었거든요.”
율리아가 살짝 웃었다. 그녀 역시 그게 못내 궁금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카루스 란케아는 정말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나. 남부 연합이라는 거대한 짐승을 키우는 데 성공했을까.
“오르테가의 역사는 매번 조금씩 달라졌는데, 당신은 항상 같았어요.”
“왜 내게 접근하지 않았지?”
“너무 멀었거든요.”
당신은 내게 너무 먼 사람이었다. 매번 내 목숨을 살려 주었지만, 그 추운 산속에 나를 두고 떠난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엔 살고 싶은 마음에 당신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어요. 하이에나에게 세 번이나 죽은 뒤에는 복수에 미쳐서 시야가 좁아졌죠. 제 세상에는 저와 마조람 후작뿐이었어요. 그를 죽일 생각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이해해.”
“그래도 여덟 번째는 꽤 오래 살았어요. 당신은 남부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고, 저는 복수에 거의 성공할 뻔했고요.”
“왜 실패했지?”
카루스가 물었다. 그는 율리아가 그렇게 여러 번 실패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공허하게 웃었다.
“마조람 후작이 당신과 손을 잡았거든요.”
오르테가는 내전 중이었다. 후작은 그때 남부의 거물이 된 카루스를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카루스는 남부를 통일해 제국에 맞설 생각이었기에, 그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무너뜨릴 수 있었는데.”
율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여러 번의 삶을 살고도 여전히 온몸이 떨릴 만큼 분하고 억울했다.
“사형당했어요.”
죽는 순간은 언제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중앙광장이었다. 왕국에 내란을 일으키고 폭동을 유도한 죄로, 율리아는 세 번의 사형을 선고받았다.
“죽은 뒤에도 무덤을 남기지 말고, 율리아 아르테라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게 하라는 명령이었어요.”
그래서 세 번의 사형이라고 불렀다.
카루스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면서,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어떻게…….”
“그때 맹세했어요. 다시 시작하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야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