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맥스웰은 레위시아의 진짜 무기는 왕족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외모일 거라고 떠들어 댔다. 성별을 떠나 그의 외모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침대를 빠져나온 카루스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은 셔츠를 찾아 입었다. 그는 레위시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맥스웰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율리아 시녀님이 그동안 마조람 후작의 딸에게 실력을 착취당해 왔다는 게 들통났습니다. 그게 하필이면 1왕자와의 약혼식장에서 알려졌대요. 그래서 약혼식은 취소되고, 왕궁 전체가 충격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
“잘했죠?”
맥스웰이 또 히죽 웃었다. 이번에는 카루스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 일이 하필이면 크리스틴과 1왕자의 약혼식이 치러지는 도중에 알려진 건 전적으로 카루스와 맥스웰의 작품이었다.
율리아가 살던 보육원 공부방을 뒤져 그녀의 노트를 전부 빼돌리는 데 성공한 맥스웰은 익명의 제보자가 되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고, 카루스는 사람을 풀어 그 소식이 약혼식 날 왕궁에 흘러들도록 유도했다.
“율리아 시녀님은 이제 우리 편이니까요. 최선을 다해야죠. 가만, 그러면…… 우리도 2왕자 레위시아 오르테가가 권력을 쥘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겁니까?”
“그 문제는 율리아와 상의해 봐야지.”
카루스는 오르테가 왕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이 작은 나라의 왕족들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율리아의 존재가 무척 중요했다.
맥스웰이 카루스의 어깨에 망토를 고정해 주며 말했다.
“태풍에 대비하게 해 줬으니 선물이라도 보내시죠.”
“선물?”
“꽃이나 보석이나 뭐, 그런 거 말입니다. 율리아 시녀님은 왠지 현찰을 더 좋아하실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전에 드렸던 금화는 다 쓰셨으려나.”
돈은 넘치도록 많았다. 전의 사령관이 착복했던 비자금이 고스란히 카루스의 손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더해 해적의 금화까지 빼앗았으니 양이 어마어마했다.
카루스는 그 돈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율리아의 정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기에, 그녀에게 다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돈 주면 좋아하시겠죠? 보육원은 멀끔하던데, 애들은 죄다 비쩍 말랐더라고요. 굶지 않으려고 도둑질을 했다니, 뭐…….”
“원장은 만나 봤어?”
“당연하지요. 그런데 율리아 시녀님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원래는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하루아침에 변해 버렸다고 했어요. 꼭 유령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다고,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던데요.”
“다른 사람이라.”
카루스는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은 삶을 반복하기 이전의 율리아만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원장의 그 태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때 일에 대해선 물어봤고?”
“그게, 음.”
맥스웰이 더듬거리며 말을 골랐다. 카루스가 왜 그러냐며 그를 노려보았다.
“오르테가 국법상 해적은 사형이거든요. 죄수들의 시체는 바다에 버린다는데, 그 과정에서 굶주린 애들이 주머니를 털곤 했답니다.”
카루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열두 살이었나. 보석을 훔친 적이 있대요. 크고 아름다워서 누가 봐도 값비싼 물건이었다는데, 원장이 빼앗으려고 하는 찰나에 경비병들이 들이닥친 모양입니다. 그런데 율리아 시녀님이 그걸 냅다 삼켰대요.”
“그래서?”
“당연히 나쁜 어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강탈하려 했겠죠. 그런데 그게 사탕처럼 녹아서 사라졌다고, 혀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우겼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기까지 말하던 카루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맥스웰은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하하 웃었다.
“어린애를 한 달 동안 감옥에 가둬 놓고 보석을 토해 내라고 때렸는데,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애초에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 기록으로 남지 않았던 것 같고요.”
분위기가 도도해서 귀하게만 자랐을 것 같은 여자가 과거를 캐면 캘수록 안쓰러운 사연만 나왔다.
맥스웰은 카루스보다 더 정이 없는 편이었는데, 율리아 시녀님을 바라볼 때면 자꾸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중얼거렸다.
“맥스웰, 율리아에게 연락을 넣어.”
“예? 밖으로 나오라고 할까요?”
“아니, 내가 데리러 가겠다고.”
일과를 마친 뒤에 저녁을 함께하면 될 것 같다.
카루스는 식사할 때 장소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음식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유독 율리아와 함께일 때는 음식이 아니라 상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그녀가 그 얌전해 보이는 얼굴로 생각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해치울 때는 저도 모르게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하루를 시작하러 방을 떠나는 카루스의 발걸음이 성급했다.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복도에 나타나자, 그의 부하들이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율리아는 저녁을 함께 먹자는 카루스의 연락을 받고 코코에게 외출 허락을 받았다.
“어디 나가려고? 너 혼자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또 하이에나라도 마주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하이에나는 이제 저를 노리지 않을 거예요. 마조람 후작이 다른 곳에 다시 의뢰를 넣는다면 모르겠지만. 당장은 후작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정신없을걸요.”
“나 참, 갈 데도 없는 애가 웬 외출이 이렇게 잦아?”
“후원자님이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코코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외출 준비까지 완벽하게 마친 율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쯧쯧 혀를 찼다.
“코코, 제가 밖에 나가는 게 싫어요?”
“싫어.”
“왜요.”
“네가 없으면 레위시아 왕자님이랑 알렉사가 엄마 잃은 오리 새끼처럼 꽥꽥거리면서 널 찾는단 말이야. 그러면 두 사람은 결국 내 차지가 되고, 나는 팔자에도 없는 다정한 보모 노릇을 하게 되고…….”
“에이, 다정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야!”
“다녀올게요. 올 때 맛있는 거 사 들고 올까요?”
“됐어. 외박할 거면 미리 말하고 나가.”
외박까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다리지 말라고는 말해 두었다. 코코는 남자 만나러 나가는 거냐고 비아냥거렸고, 율리아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어떻게 알았느냐고 맞받아쳤다.
그렇게 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마침 왕자궁 안으로 들어오는 레위시아와 마주쳤다.
“어디 가?”
“어서 오세요, 전하.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요.”
“그래? 남자 만나러 가나 봐?”
“어쩜 코코랑 똑같은 소릴 하세요?”
“같은 취급하지 마. 기분 나빠.”
레위시아가 눈썹을 확 찌푸렸다. 율리아는 그에게 후원자와 저녁 약속이 있어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녀올게요.”
이러다 알렉사까지 마주치면 약속에 늦을 수도 있었다. 율리아는 레위시아를 뒤로하고 종종걸음으로 왕자궁을 나섰다.
맥스웰의 마차가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율리아가 마차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카루스였다.
율리아가 그를 보고 살짝 웃었다. 데리러 오겠다더니 진짜였냐고 묻기도 했다. 카루스는 그럼 거짓말이라 생각했냐고 되물었다.
레위시아는 왕자궁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차 문에 가려져 카루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젊은 남자이고, 율리아의 부유한 후원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율리아는 미소가 귀한 편이었는데, 남자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는 내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가슴에 파도가 쳤다. 사납게 일어섰다가 속절없이 부서져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건 내가 아닐까. 레위시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