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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7/319)

71화

레위시아는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번쩍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짙은 화장 때문인지, 레위시아의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마조람 후작에게서 지켜 주는 것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3년 안에 너를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도 했지.”

“전하.”

“나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샤트린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공주궁으로 가도 된다. 네가 원한다면 그래도 된다. 레위시아의 말은 그런 뜻인 것 같았다.

복수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았다. 샤트린은 단순하고 욕심이 많아 율리아가 다루기에도 좋았다. 국왕 부부의 사랑받는 딸이기도 하니, 마조람 후작과 왕가를 이간질하기에도 적격일 것이다.

샤트린이 왕위 후계자가 된다면 귀족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으리라. 공주는 왕비의 딸이니까.

하지만 레위시아는 달랐다.

그는 왕가의 가축이었다. 가진 거라곤 왕자라는 이름뿐, 아무리 사납게 입질을 해도 목줄에 묶여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는 짐승과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놓아주는 게 너를 위한 일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

성난 파도가 위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가 땅에 닿지 못하고 모래 위에서 허물어졌다. 그러곤 미련만 잔뜩 남기고 바닷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시도만 계속하면서 와르르 와르르 부서지기만 했다.

레위시아는 자신이 저 파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갖고 싶은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끊임없이 밀려오기만 하고 닿지는 못한다. 욕심은 저렇게 크고 거친데, 끝내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바다에 오길 잘했네.”

레위시아가 하하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의 마음을 꺼내어 보여 주면 율리아는 사라질 것이다. 물거품처럼 사라져 영원히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리라.

그러니까 감춰야만 했다. 그녀가 절대 알지 못하게 깊은 바닷속에 묻어 놓아야 한다. 혼자 앓는 사랑. 세상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해 본다는 그것. 그게 뭐 별건가. 말하지 않고, 티 내지 않고, 감추면 되는 거 아닌가.

율리아가 말했다.

“전하, 저는 샤트린 공주님의 궁으로 가지 않아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녀가 왕자궁에 남아 매일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위시아가 이번에도 하하 웃었다.

“거절했어.”

그것도 ‘싫어’라는 단호한 말로 거절했다. 샤트린은 레위시아의 마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상관없었다. 레위시아는 율리아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나는 왕이 될 거야.”

레위시아가 웃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미소였다. 능글거릴 줄만 알았지, 순한 편이던 그의 눈빛에 날이 섰다.

칼을 잡아야 한다면 잡을 것이고, 방패를 들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적을 산처럼 쌓아 두고 그 위에 앉으리라.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남아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겠다는 여자를 이 땅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세상 사람이 다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은 비틀리고 무너진 사람이니까.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니까.

짐승처럼 울부짖는 바다를 보며,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말했다.

“널 놓아줄 수 없어.”

너는 나를 왕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니까.

율리아는 알겠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려고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왕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한 그에게 칭찬의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상했다.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왕자가 낯설었다.

* * *

민심이 흉흉했다.

태풍 피해 복구가 우선이어야 하는데, 1왕자의 약혼식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충격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왕궁 때문이었다.

부두엔 반파된 고깃배들이 널려 있고, 거리엔 실종된 가족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번 태풍은 오르테가에 닥친 커다란 재난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 여러 번 경고했으나 오랫동안 이 정도로 심한 재난이 닥치지 않아 사람들이 안일해진 탓이 컸다. 태풍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해일까지 일어나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길 잃은 분노가 높은 곳을 향해 치솟았다.

“티타니아,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밤새 귀족들과 어울리다 돌아가려는 레위시아를 한 청년이 붙잡았다. 그는 티타니아로 분장한 레위시아와 꽤 자주 어울렸던 남자였다.

맥스웰이 넉살 좋게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저희 아가씨께서 바람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셔서 그렇습니다. 몸도 약하신 분이 불면증까지 있어서…… 아무래도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죠?”

“하긴, 태풍이 엄청나긴 했지. 그럴 땐 독한 술을 한잔하는 게 좋아. 잠이 잘 오거든. 어쩌면 하루가 날아갈 수도 있지만.”

“하하. 그렇지요.”

맥스웰이 맞장구를 치고, 레위시아도 피식 웃으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티타니아는 웃음이 귀했다. 청년은 헤어지기 전에 그녀에게서 미소를 끌어냈다는 자부심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바짝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였다.

“다음엔 우리 클럽으로 초대할게. 아주 재밌는 사람이 많아. 당신은 타국에서 왔다고 했지? 그러면 어울리기도 좋을 거야.”

초대를 받은 레위시아가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맥스웰이 어허허 웃더니 청년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십니다.”

“거절하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 아가씨께서 말씀을 자유로이 하실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지요. 초대하신 분께 누가 될까 걱정하시는 거겠죠.”

“나야말로 그럴 리가 있나! 티타니아를 데려가면 다들 날 부러워할걸? 꼭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고, 난 그런 사람이 좋아.”

맥스웰이 넉살 좋게 웃으며 청년에게 인사했다.

“아가씨께서 감동하신 듯하네요. 오르테가엔 좋은 분들이 많아 다행입니다.”

그러곤 그와 인사를 나눈 뒤 대기시켜 놓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한 뒤, 문이 꽉 닫혔다는 걸 두 번이나 확인한 맥스웰이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저 자식이 그 자식입니다. 술만 취하면 무능한 왕가를 욕하고, 해방군을 두둔하는 놈이죠. 그런데 저놈의 집안은 모두 친제국파거든요? 왕자님도 아시지요?”

레위시아가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알아. 부모가 알면 화병으로 쓰러지겠군.”

“한 번 거절했으니 다음엔 초대에 응하기로 하지요. 해방군과 어울리는 놈이 참석하는 은밀한 모임이라면 우리도 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리아 시녀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냐. 내가 말하지.”

“예?”

맥스웰이 의외라는 얼굴로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자잘한 보고는 아랫사람이 하기 마련인데, 왕자가 직접 하겠다고 하니 놀라웠다.

“자네도 바쁠 텐데 가까이에 있는 내가 하는 게 낫잖아. 일찍 들어가서 쉬어.”

“그……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왕자님.”

“별걸 다.”

레위시아는 맥스웰과 잘 지내는 편이었다. 둘 다 친화력이 좋은 성격이라 가능했다. 물론 레위시아는 맥스웰이 카루스 란케아의 부하라는 걸 몰랐고, 맥스웰은 레위시아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 외출 때 뵙지요.”

“고생 많았어.”

맥스웰은 레위시아가 왕자궁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 왕궁을 빠져나왔다.

율리아를 잠깐 보고 나오고 싶었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관뒀다. 그들이 아무리 한배를 탄 사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이른 새벽에 기별도 없이 방문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카루스를 찾아갔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전의 사령관이 쓰던 관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은 손봐야 할 곳이 거의 없을 만큼 넓고 호사스러운 저택이었다.

바이칸의 지휘관들은 대부분 요새나 성에 사는데, 오르테가는 그렇지 않았다. 이 나라가 정복 전쟁을 피하면서 얼마나 평화롭게 살았는지 곳곳에서 느껴졌다.

여름이라 일찍 해가 떴다.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태풍 피해 복구에 힘을 썼던 카루스는 드물게 늦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방에 맥스웰이 쳐들어왔다.

“대장! 아니, 제독님! 카루스 님!”

카루스가 번쩍 눈을 떴다가 맥스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날카로운 눈매를 콱 찡그렸다.

“나가.”

“보고드려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저 이래 봬도 바쁜 몸이라고요.”

맥스웰이 능글거리며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카루스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짧게 말해.”

“남부 함대 피해 복구가 끝났다고 합니다. 우리야 뭐, 율리아 시녀님 덕에 이틀 만에 출정 가능한 상태가 되었는데…… 문제는 오르테가입니다. 해군은 말할 것도 없고, 상선에 어선까지…… 부두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예요.”

“그걸 왜 네가 보고해.”

“라고 바바슬로프가 말했습니다.”

맥스웰이 히죽 웃었다. 그는 카루스가 자신을 창밖으로 집어 던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깐족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레위시아 2왕자가 젊은 귀족들의 더러운 그림자 속으로 잘 파고들었습니다. 암행이라기에 왕자님 소꿉놀이에 어울려 주라는 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치가 빠르고 연기를 잘합니다. 왕족은 왕족이던데요. 피는 못 속이나 봐요.”

“태생이 그런 사람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그렇게 자랐을 수도 있지.”

2왕자는 전자인가 후자인가. 아마도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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