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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6/319)

70화

그냥 싫어하는 정도라면 괜찮았을 텐데, 아예 왕자비가 되지 못하게 꿍꿍이를 짜는 지경에 이르렀다.

“1왕자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순서대로 크리스틴을 욕한대. 오르테가 역사에 그런 비리를 저지르고도 왕자비가 된 사람이 있었느냐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징징거리고.”

1왕자는 귀가 얇다. 그리고 그의 시녀들은 오르테가 최고의 가문에서 뽑아 올린 영애들이다. 이러다 정말 이 약혼까지 파탄 나는 거 아니냐면서, 코코가 깔깔 웃었다.

“그렇다고 임신한 애인을 왕자비로 들일 것도 아니잖아요?”

“미쳤니? 그 여자는 임신했다고 말한 순간 왕궁에 감금 확정이야.”

“그편이 나아요. 왕궁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 우리 모두 알잖아요.”

1왕자는 그 여자를 지킬 수 없다. 왕비도 그 사실을 알기에 그 여자를 왕궁에 가두려는 것이리라.

내연녀의 존재로 잠시나마 후작가에 기울었던 권력의 추가 크리스틴 때문에 왕가 쪽으로 확고하게 기울었다.

코코가 그 사실을 지적하며 이죽거렸다.

“우리 국왕 전하, 기분 좋으시겠네.”

“그러게요. 침전에서 남몰래 춤이라도 추고 계신 건 아닐지.”

“아무리 탄탄한 동맹 관계라 해도 파고 들어갈 틈은 있지.”

국왕은 후작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되찾았다. 화가 나서 앓아누웠다고 전해졌지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웃음을 질질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율리아가 이간질이라 명명했던 작전, 그 목적지가 한층 가까워졌다. 자식들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데 부모가 아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알렉사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정말 그 약혼은 취소되는 겁니까? 그러면 앞으로 왕가와 후작가가 혈연으로 맺어지는 일은 없겠네요?”

오르테가의 모든 귀족이 그걸 궁금해하느라 밤잠을 설쳤으리라. 율리아와 코코가 짧게 시선을 마주치곤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약혼식은 취소되었어도 약혼은 유지될 거예요.”

“그 지경이 되고도 말입니까?”

“두 사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귀족들의 반응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마조람 후작이 국왕에게 뭘 내놓느냐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 주도권을 왕가에 빼앗기는 수준에서 약혼은 성사될 거로 보여요.”

율리아의 말에 코코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만약 자식을 맺어 주지 못하게 되면 자기들이 이혼을 해서라도 가족이 되려고 할걸. 어쩌면 기르는 개라도 짝지어 주려고 할지도 몰라.”

대단한 집착이었다. 알렉사는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파혼까지 했으면 일이 더 재밌어졌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날 밤 율리아는 트루디에게서 레위시아가 자신을 부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하께서?”

“네, 호위 기사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밖으로 나갔더니 정말로 레위시아의 호위 기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아가 살짝 묵례하자, 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밖으로 나갈 예정이신 듯합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복도로 나오세요.”

그냥 왕자궁 안에서 봐도 될 텐데, 아무래도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의아했지만 반문하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평범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얇은 장갑을 끼고 모자를 썼다.

레위시아는 마차 안에서 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를 마친 그녀가 호위 기사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랐다.

“전하, 무슨 일…….”

레위시아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주 강렬한 색감의 보라색 드레스였다. 우아한 향수 냄새가 마차 안에 가득했다. 코코가 선물이라며 던져 준 검은 레이스 부채까지 한 손에 든 레위시아가 놀라는 율리아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나랑 데이트할래?”

“어디 가시게요?”

“바다 보러.”

“이 날씨에요?”

태풍이 많이 잦아들었다 해도 아직 날씨가 궂었다. 바람이 세서 흉흉한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도 모자가 바람에 날아갈까 봐 끈으로 단단히 묶고 나온 참이었다.

“이 날씨에만 볼 수 있는 게 있다고 들었거든.”

레위시아가 신호하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맞은편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율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태풍 때문에 사나워진 바다를 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수수께끼인가. 율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눈앞에 문제가 놓이면 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다운 표정이었다.

레위시아는 속으로만 웃으면서 율리아의 얼굴을 구경했다.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혼란스럽고?”

“심란하고 복잡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무력감을 느낄 것도 같고요. 전하, 태풍 부는 바다에 가 보신 적 있나요?”

“처음이야.”

“저는 그랬어요.”

정답 같은 건 없는 문제였는데, 율리아는 기어이 정답을 찾아내고 말았다. 레위시아의 심정이 딱 그랬다. 그는 바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를 본 기분이었다.

부채를 만지작거리던 레위시아가 다시 물었다.

“너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런 심정이었는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야?”

“너무 많아서 뭘 말씀드려야 할지…….”

“너처럼 완벽한 애가 그렇게 무력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고?”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전부 레위시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자신이 아홉 번째를 살고 있다는 말을 왕자에게 어떻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율리아가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입을 다물어 버리자, 레위시아가 속삭이듯 물었다.

“넌 왜 날 선택했어, 율리아?”

“네?”

“왜 하필 내 시녀가 되기로 했냐고 묻는 거야. 1왕자도 있고, 샤트린도 있잖아.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면 측근 시녀까진 아니어도 수습 시녀 정도는 될 수 있었을 텐데.”

“전하께서 마조람 후작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걸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어. 네 복수를 완성하려면 권력이 필요한데, 나는 왕궁에서 가장 보잘것없잖아. 왜 나였어? 혹시 그 졸업식장에 나타난 왕족이 나 하나라서 우연히 그렇게 된 건가?”

이것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지난 삶에서 코코와 했던 약속이었으니까.

율리아가 이번에도 입을 다물자, 레위시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넌 나한테 비밀이 많네.”

“전하, 죄송해요.”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야. 강요할 생각도 없고. 네가 날 못 미더워하는 것도 당연하고.”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이건 대답할 수 있겠지.”

레위시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율리아, 너는 내가 정말로 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말끝으로 가면서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의연하게 묻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레위시아는 질문을 꺼내 놓고 금세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는 율리아의 얼굴을 잘 바라보고 있었는데, 뒤늦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율리아가 그에게 되물었다.

“왕이 되고 싶으세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저는 전하께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

“불가능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전하께서 진심으로 왕이 되려 한다면 왕좌에 앉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할 거라는 말이었어요.”

말장난 같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율리아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비록 이번 삶에서 실패하더라도 다음, 그다음 삶에서 성공하면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도 했다.

레위시아는 계속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경멸하는 자식이었고, 왕좌를 업신여기는 왕족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오랫동안 저주해 왔다.

마조람 후작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의 곁에 코코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어느 날 빈손으로 왕궁을 빠져나가 가장 먼저 뭍을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마차 밖에서 바람이 세게 불었다. 레위시아는 바닷가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율리아도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캐묻지 않았다.

따끔따끔한 긴장감을 품고 달리던 마차가 마침내 인적 없는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레위시아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아…….”

그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바다가 짐승이 되어 미쳐 날뛰고 있었다. 피부가 아플 만큼 센 바람이 불었다. 밤사이 태풍이 물러갔다고 들었는데, 태풍의 끝자락에 짐승이 남았다.

레위시아가 휘청거리자 호위 기사가 그의 손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어 거부하곤 마차에서 내리는 율리아에게 직접 손을 내밀었다.

“드레스 입고 있으니까 손잡고 걸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겠지?”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전하.”

“그래,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레위시아는 율리아가 마차에서 내릴 때만 살짝 잡아 주고 손을 거두었다. 그러곤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호위 기사의 말에 따라 해안가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바다를 구경했다.

두 사람의 드레스가 펄럭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율리아는 그가 왜 드레스를 입고 바깥에 나왔는지 궁금했다.

“전하, 설마 오늘도 암행 나가시려고요?”

“그래야지.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귀족들이 모여 온갖 추문을 떠들어 대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자가 주목받을 것이기에, 이럴 때일수록 감춰진 정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맥스웰에겐 클럽 앞에서 만나자고 했어.”

레위시아는 집채만 하게 솟아올랐다가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파도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파도가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처럼 무시무시한 입질을 해 댔다. 뱃사람들이 강한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를 보고 왜 짐승의 아가리를 닮았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율리아.”

“네, 전하.”

“샤트린이 너를 공주궁의 측근 시녀로 데려가고 싶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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