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샤트린은 그게 정해진 사실인 것처럼 말했다. 레위시아는 절대 율리아를 지킬 수 없다며, 조만간 둘 다 크게 다칠 거라고 단정 지었다.
울컥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는 측근 시녀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영향력이 부족한 왕족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왕의 사랑을 받았고 아들까지 낳았으나,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다.
레위시아가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줬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샤트린이 왜 이렇게 율리아를 물고 늘어지는지 안다. 그녀가 부른다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했다. 처지를 바꿔 자신이 샤트린의 입장이었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한테 넘겨.”
샤트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답지 않게 분위기가 심각했다.
“내 궁으로 데려와서 측근 시녀로 삼을 거야. 수습 시녀가 아니라, 측근 시녀. 알아들었지? 그러면 마조람 후작도 그 애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거고.”
“괜찮아.”
“괜찮지 않아. 지금 당장이야 마조람 후작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달래고, 귀족들을 포섭하고, 아카데미 일을 수습하느라 바쁘겠지. 그런데 그걸 다 끝내고 나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율리아를 처리할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앨 거야. 마조람 후작이 우리 왕국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지, 너도 알고 나도 알아. 마조람은 하나의 가문이 아니야. 세력이라고, 레위시아.”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율리아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반항? 웃기지 말라 그래. 그 애가 바실리와 크리스틴한테 그동안 억울한 일을 많이 겪어 왔다는 건 알겠는데, 발악은 그쯤 해 두고 몸을 사려야 할 때야.”
샤트린의 말이 길어질수록 레위시아의 마음도 혼잡해졌다. 그는 결국 율리아가 절대 원하지 않을 것 같은 해결책을 입에 담았다.
“당분간 멀리 가 있으라고 하면…….”
그러곤 금세 후회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걸 원할 리 없지.”
“그래, 그 방법은 틀렸어. 도망치면 당연히 쫓아가겠지. 여론은 크리스틴 그 계집애한테 유리한 쪽으로 바뀔 거고.”
그래서 샤트린은 자신이 직접 율리아의 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
“난 할 수 있어. 마조람 후작이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라고 해도 하나뿐인 공주가 애지중지하는 시녀를 손대진 못하겠지. 율리아가 내 시녀가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3년 안에 그 애를 귀족으로 만들어 보이겠어.”
레위시아의 입에서 마른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어쩌면 샤트린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율리아를 놓아주고 공주궁의 시녀가 되어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진정 그녀를 위하는 결정일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위시아가 샤트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나만 대답해 줘.”
“뭔데.”
“마조람 후작이 1왕자를 버리고 너를 다음 대의 국왕으로 선택한다면, 그래도 율리아를 지킬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물으려던 샤트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
마조람 후작과 그의 세력이 1왕자를 버리고 샤트린을 지지한다면 그녀가 왕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힘들게 싸울 필요도 없었다. 지금 1왕자가 그러는 것처럼 거만하게 앉아서 입에 넣어 주는 권력을 야금야금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바실리의 일이 괘씸하고 짜증 나긴 하지만, 그게 왕좌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샤트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위시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대답해, 샤트린.”
“레위시아.”
“대답하라고.”
“못 해. 왕좌와 시녀 하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이잖아. 너 같으면 거기서 시녀를 고르겠어? 왜 그런 극단적인 질문을 하는 거야?”
“난 율리아를 택할 거니까.”
레위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왕좌와 율리아 둘 중 하나라면 당연히 율리아였다.
샤트린은 그의 말을 어린애 투정이라고 여겼다.
“너야 왕좌에 욕심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어릴 때부터 그랬잖아. 왕이 되느니 떠돌이 소금 장수가 되겠다고. 너와 내가 같아?”
“뭐가 달라.”
“레위시아!”
“왕이 되지 못하면 죽을 게 뻔하다는 점에서 비슷하잖아. 아, 다르긴 한가. 나는 처참하게 살해당할 거고, 너는 그래도 유폐되거나 타국에 팔리거나, 뭐 그렇게 되려나.”
절박하다는 점에서는 레위시아가 우위였다. 그는 샤트린이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뭐야, 너? 그걸 알면서도 율리아를 택하겠다는 거야? 고작 시녀 한 명일 뿐인데, 그 애를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니?”
“샤트린, 내 말은…….”
“차라리 나한테 보내기 싫다고 말해.”
“싫어.”
물이 쏟아지듯 진심이 흘러나왔다. 레위시아가 더는 할 말 없다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샤트린이 레위시아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레위시아, 오기 부리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언뜻 다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레위시아가 왕자궁으로 돌아간 뒤, 샤트린은 시녀들이 권하는 간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꼭 바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눈꺼풀이 조였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공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던 시녀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공주님, 고민 있으세요?”
“고민?”
“아까부터 계속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혹시 2왕자 전하 때문인가요?”
레위시아 때문인가? 샤트린이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아니.”
아니었다. 그녀는 율리아 아르테를 생각하고 있었다.
평민 주제에, 대귀족 가문의 영애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 그 거대한 약혼식장을 개인적인 복수극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 여자.
아무것도 안 했다던 말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아카데미에 크리스틴의 부정행위를 고발한 건 어느 익명의 제보자라고 밝혀졌지만, 그가 제출한 증거는 모두 율리아 아르테가 어릴 때부터 종이가 닳도록 공부했던 책과 노트였다.
“내 시녀로 삼아야겠어.”
샤트린이 중얼거렸다.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그녀는 아카데미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레위시아가 아닌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율리아 아르테는 지금쯤 공주궁의 시녀가 되어 있을 텐데.
욕심이 났다. 그 얌전해 보이는 평민 시녀가 자신의 곁에서 야망을 키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짜릿했다. 왕좌에 앉은 자신과 그 곁을 지키는 평민 시녀라니.
“율리아 아르테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
“전하, 율리아 시녀요?”
“돈을 좋아하면 뇌물을 쥐여 주고, 땅을 좋아하면 집을 사 줘. 귀족이 되고 싶어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귀족으로 만들어 줘야겠어.”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왕족의 목숨이라도 구해 주지 않는 한, 평민이 귀족이 될 수는 없었다. 귀족 남자와 결혼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작위라고 할 수 없었다.
샤트린은 편법을 떠올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작위가 있는지 알아봐. 몰락한 귀족 중에 자식이 없는 가문이 있는지도 알아봐. 양녀로 들이면 되겠지. 그것도 아니면, 타국의 귀족 작위라도 괜찮아.”
“알아보겠습니다.”
“친하게 지내면서 잘 구슬려 봐. 레위시아는 힘이 없어서 할 수 없지만, 나는 다르다는 걸 너희가 알려 줘.”
율리아를 손에 넣으면 마조람 후작을 상대할 때 조금이나마 우위에 설 수 있다. 적어도 크리스틴 마조람이 세간의 비난을 받는 동안에는 그 평민 시녀에게 명분이 있었다.
게다가 뜻밖의 사실까지 알았으니.
“레위시아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했어.”
샤트린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자리 잡았다.
“율리아를 손에 넣으면 레위시아는 절대 날 배신하지 못해.”
그 아이는 보석이다. 어쩌면 무기일 수도 있다.
보잘것없는 평민 하나가 고요했던 왕궁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 * *
율리아는 늦게까지 잠을 잤다. 어쩐지 너무 졸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리스틴이 무너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일까. 복수가 아무리 허무하다고 해도 그 짜릿한 쾌감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긴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이미 저녁이었다.
코코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약혼식 이후 하루 동안 왕궁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주었다.
“국왕 전하가 귀족들의 알현을 전부 거절했어. 침전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나. 마조람 후작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만나 달라고 요청을 넣고 있는데,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대. 지난번에는 왕의 부름을 후작이 계속 무시하더니, 이제 반대가 됐어.”
귀족들은 왕이 일부러 후작을 만나 주지 않는 거라고 입을 모았다. 일을 해결하기에 앞서, 후작에게 느꼈던 괘씸함을 갚아 주려 한다는 것이다.
“또 있어. 1왕자궁에서 흘러나온 얘기인데, 거기 시녀들이 마조람 영애를 싫어하다 못해 끔찍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