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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74/319)

68화

* * *

레위시아가 율리아를 대신해 손찌검을 당했다.

코코는 괜찮으니 율리아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그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틴 마조람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율리아를 잡아당겨 뒤로 보내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레위시아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크리스틴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의 머릿속엔 율리아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충격적인 사건이 쌓이고 쌓여 풍선 터지듯이 터진 느낌이었다.

바깥에선 미친 듯이 태풍이 불고 있고, 브레웨 아카데미 교수들은 크리스틴 마조람의 졸업 자격을 시험하기 위한 검증에 들어갔고, 왕궁 안에선 1왕자의 약혼식이 난장판이 된 데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그에 더해 크리스틴이 감히 왕족의 얼굴을 후려쳤으니, 왕실 모독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아무리 마조람 후작이라도 이번 일을 두리뭉실하게 넘길 수는 없었다.

“여러 사람이 앓아누웠어.”

“네?”

“국왕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앓아누웠고, 왕비는 왕자비 간택을 취소하라는 귀족들의 성화를 못 이겨서 앓아누웠고, 1왕자는 크리스틴이 감히 제 얼굴에 먹칠했다고 앓아누웠고.”

왕자궁 응접실에 코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보다 톤이 더 높았다.

“마조람 후작 부부는 국왕 부부를 달래려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왕궁에서 앓아누웠고, 크리스틴 그 계집애는 후작 저택에 앓아누운 채로 감금되었고.”

알렉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정도면 양호한 거 아닙니까? 앓아누워야 할 사람들이 앓아누웠다는 느낌인데요.”

“그게 끝이겠니? 크리스틴의 졸업 논문을 심사했던 교수들은 마조람 후작한테 받아먹은 돈을 뱉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앓아누웠고, 학장은 감히 신성한 상아탑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노발대발하다가 화병으로 앓아누웠고.”

이게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말하는 코코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더니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코코는 아주 재밌어 죽겠다면서, 최근 들어 어제처럼 깊은 잠을 잔 날이 없다고 흥얼거렸다.

“세상이 조금 살 만해졌어.”

오늘따라 구름 낀 하늘도 예뻤다.

이날 크리스틴 마조람이 율리아 아르테의 논문을 베꼈다는 증거들이 세간에 공개되었다.

졸업 논문뿐만이 아니었다. 4년 동안 크리스틴의 성적을 책임졌던 과제까지 전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건 모두 어느 용감한 익명의 제보자가 제출한 것이었다. 그러자 두 사람과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던 학생들이 앞다투어 증거와 증언을 쏟아 내었다.

이쯤 되자 대리 시험도 모자라 과제와 논문까지 베껴 쓴 크리스틴을 향한 브레웨 아카데미 졸업생들의 분노가 어마어마했다.

“그자들이 딱히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평생 자랑으로 삼았던 제 모교가 똥통이 되는 게 자존심 상해서 들고 일어나는 거겠지. 어차피 마조람 후작을 제대로 물고 늘어지는 놈은 없겠지만.”

“음.”

듣다 보니 여러 사람이 앓아눕긴 했다. 알렉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코코에게 물었다.

“율리아와 왕자님은요?”

아침부터 두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약혼식이 흐지부지된 뒤, 레위시아는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긴 손톱자국이 남은 걸 본 율리아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큰 상처가 아니니 흉터는 남지 않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지만, 그녀는 레위시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님은 샤트린 공주님의 궁에 불려갔고, 율리아는 아직 자고 있어.”

“잔다고요? 율리아가 이 시간까지 자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알렉사가 걱정스레 율리아의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찾아가서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피곤한 사람을 깨우게 될까 봐 그러지 못했다.

“코코.”

“왜 그러니?”

“율리아는 마조람 후작가에 복수하기 위해 왕자궁에 들어온 거라고 했잖습니까.”

알렉사는 그동안 율리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상태였다. 은혜를 갚고자 왕자궁에 들어왔으니 그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율리아가 있을 때는 그녀를 따라다녔고, 그렇지 않을 때는 코코를 따라다니며 율리아에 관해 물었다.

코코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와 레위시아 전하는 마조람 후작가를 원수로 여기니까. 아군을 잘 골랐다고 봐야지.”

“율리아는 코코와 왕자 전하가 그런 원한을 갖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건…….”

잘 모른다. 코코도 율리아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뭔가를 묻기만 하면 자꾸 그 애의 슬픈 과거가 튀어나와,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디서 주워들었겠지. 아카데미엔 죄다 귀족들뿐인데, 누가 떠들었는지 알 게 뭐야.”

“제가 부모님의 빚을 갚기 위해 노예처럼 용병 짓을 하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건…….”

그것도 잘 모른다. 코코는 율리아에게 알렉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앞뒤 잴 것 없이 상인연합으로 달려가 일을 해결하기 바빴다.

“그러게. 어떻게 알았지? 네 이야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니? 고리대금업자가 입이 가벼워?”

“아뇨. 그들도 철저히 숨겼을 겁니다. 귀족의 딸을 그런 식으로 부려먹고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네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만한, 친하게 지내던 용병이 있었다거나. 소문이란 건 이리저리 흐르기만 하지, 고이지 않으니까.”

“제 부모님 이야기는 연인이었던 자에게도 한 적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율리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뭐라고 했는데요?”

“널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던데.”

코코가 알렉사를 데려오기 전에 율리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알렉사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저는 율리아를 그때 처음 봤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니…… 제가요? 그 반대가 아니고요?”

“뭐야.”

걘 그럼 널 어떻게 안 거야. 불행한 사연을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거야 뭐야. 코코가 그렇게 우물거리자, 알렉사가 두 눈을 무겁게 내리깔고 말했다.

“율리아는 비밀이 많은 것 같아요.”

“걘 자기 얘기를 더럽게 안 해.”

“물어보셨습니까?”

“딱히.”

“왜요?”

“하고 싶은 얘기면 하겠지. 하기 싫은 얘기를 굳이 캐내서 알아야만 친구가 되는 건 아니잖아. 물론 걔는 너무 말을 안 해서 짜증 나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율리아는 말입니다. 힘들고 슬픈 일은 혼자 알려고 하고, 코코와 제게는 그 반대의 말만 하는 게 아닐까.”

꼭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사람처럼.

언젠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거라던 율리아의 말이 떠올라, 코코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알렉사에게 물었다.

“너도 걔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니?”

“아니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알렉사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대단하다니. 코코가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렉사는 율리아가 보육원에서 착취당하며 자랐고, 마조람 후작가의 후원에 묶여 노예처럼 살다가 바실리와 크리스틴에게 엄청난 배신까지 당했다는 걸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은 게 아니라,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 불쌍하다고? 코코가 다시 물어보았다.

“안 불쌍해? 진짜?”

“아무도 없이 혼자서 그 많은 불행을 딛고 일어선 거잖아요. 심지어 절 구원하기까지 했어요. 그런 사람을 왜 불쌍하다고 합니까. 율리아는 대단한 겁니다.”

“그렇구나.”

코코가 살짝 웃었다. 새초롬한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대단한 거였네.”

그걸 그렇게 생각해 주는 너도 대단한 아이라고, 코코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율리아가 깊이 잠들어 있는 사이, 레위시아는 또 샤트린의 궁에 불려가 있었다. 이런 날은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아무리 투덜거려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샤트린은 레위시아를 제 앞에 앉혀 놓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당장 튀어오라고 부를 때는 언제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레위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그러다 입에서 피난다.”

“레위시아.”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

“율리아 나한테 넘겨.”

“뭐?”

레위시아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서 나왔다.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짜증스레 되물었다.

“뭔 소리야. 율리아 이름이 네 입에서 왜 나와. 할 말이라는 게 이거야?”

“내 시녀로 들일 테니까 이쪽으로 보내라고.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 어제 그 사달을 보고도 그래?”

레위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넌 걔를 지킬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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