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 여자를 위해 왕이 되겠다는 남자
“율리아 아르테-!”
크리스틴의 찢어지는 비명이 약혼식장을 뒤흔들었다.
위태롭고 절박한 비명이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늘 새침하게 도도하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지는 것도 모른 채, 크리스틴은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어서 이리 나와! 네가 한 짓일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곁에 있던 1왕자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크리스틴의 눈이 광기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를 말리는 걸 포기하고 재빨리 왕비와 국왕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율리아! 율리아, 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네가 한 짓이야! 너 따위가 감히……!”
크리스틴은 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당황한 마조람 후작이 딸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그녀는 베일을 쥐어뜯어 손에 쥐고는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크리스틴의 눈이 약혼식장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 모든 장면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차게 식은 손가락에 미지근하게 피가 돌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네가 이렇게 되길 바랐다.
‘크리스틴, 너는 누구보다 속이 시커먼 아이잖아. 그게 네 본모습이잖아. 그동안 왜 그렇게 착한 척, 정의로운 척, 고상한 척한 거야.’
크리스틴이 율리아의 이름을 부를수록 사람들의 관심도 늘어났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도대체 율리아가 누구야?”
그게 누구이기에 후작 영애를 이렇게 만들었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크리스틴의 부정을 고발한 건 아카데미인데, 왜 율리아 아르테를 원망하는가.
“혹시 그 평민 아니야?”
“누구?”
“브레웨 훈장! 레위시아 왕자님께 시녀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 말이야!”
귀족들이 율리아를 찾기 시작했다.
율리아를 찾으려면 레위시아를 찾아야 한다. 그는 국왕과 왕비 곁에 있지 않았다. 국왕 부부와 1왕자, 샤트린은 한데 모여 있는데 레위시아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귀족들 사이에 서 있었다.
“율리아,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렉사가 몸으로 율리아를 가렸다. 걱정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율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알렉사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레위시아도 알렉사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코코가 단호하게 두 사람을 막아섰다.
“내버려 둬요. 이번에는 진짜 괜찮으니까.”
“코코?”
“괜찮아요. 율리아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고, 그걸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알아요. 죄를 지은 건 마조람 후작과 크리스틴 저 계집애잖아. 율리아는 숨을 필요 없어요. 그렇지?”
“네.”
“고개 들어. 허리 펴고.”
그러니까 크리스틴이 발광하면 할수록,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격이 될 것이다.
레위시아와 알렉사가 율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코코의 말대로 율리아는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눈꼬리에 미묘한 만족감이 묻어나 있어, 그걸 본 두 사람이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레위시아가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귀족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레위시아는 그들의 비틀린 관심이 율리아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했다.
율리아가 레위시아의 뒤에서 옆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숨거나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 앳된 얼굴에 단정한 자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눈빛.
오르테가의 귀족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도 그들을 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었던 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
귀족으로 태어난 자와 평민으로 태어난 자는 왜 그렇게까지 다를 수밖에 없는가. 크리스틴과 자신을 비교할 때마다 그게 참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귀족이라고 다 마조람 같은 쓰레기가 아니고, 평민이라고 다 정직하고 선하지 않다는 것.
문제는 신분이 아니라 인간이고, 그렇다면 나도 너희와 다르지 않다.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율리아!”
크리스틴이 마침내 율리아를 발견했다.
“거기 있었구나.”
귀족들이 숨을 죽였다.
마조람의 금지옥엽이 저 평민 시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걸 지켜보는 1왕자와 2왕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장차 왕비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가 약혼식에서 이런 식으로 난동을 부린 과거가 있던가. 이것은 오르테가 왕실 역사에 길이 남을 추문이 아닌가.
“네가…… 한 짓이지, 네가! 네가 그랬잖아. 내가 미워서! 날 질투해서!”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크리스틴은 만류하는 마조람 후작을 뿌리치고 달리다시피 걸어서 율리아 앞에 섰다.
그녀의 두 눈이 붉었다. 여름의 첫날인데, 크리스틴은 한겨울처럼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비틀거렸다.
“원하는 건 다 해 줬잖아. 내 아버지가, 우리 가문이…… 너한테 못 해 준 게 뭔데!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말하자면 끝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율리아는 침묵을 지켰다. 이건 흥분하는 사람이 패배하는 싸움이었다. 그녀는 왕궁 시녀답게 단정한 자세로 서서, 크리스틴이 발광하는 걸 지켜보았다.
약혼식이 엉망이었다. 이제 이 연회는 절대 재개될 수 없다.
“은혜를 갚진 못할망정 배신을 해?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대답해, 율리아 아르테!”
크리스틴은 무너져 내렸다. 발광하고 윽박지르기를 한참, 마지막이 되어서야 지친 크리스틴의 입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내가, 내가 얼마나 너를 이기고 싶었는데…….”
내내 침묵하던 율리아가 그제야 입을 뗐다.
“보기 흉하네요, 아가씨.”
“뭐?”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담담하게 조롱하는 말투와 흔들림 없는 눈빛. 율리아는 크리스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건 아가씨지, 제가 아니잖아요. 알면서 왜 이러세요.”
크리스틴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차 있던 물기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저는 고발하지 않았어요. 제가 한 거라곤 정직하게 시험을 쳐서 브레웨 훈장을 받은 것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갖고 싶었으면, 더 열심히 공부하시지.”
율리아는 이제 참지 않았다. 판을 짤 때는 신중해야 하지만, 상대가 불에 타올라 무너질 때는 기름을 부어 줘야 한다.
“약혼식이 엉망이 됐네요.”
“너…….”
“그래도 축하해요. 곧 왕자비가 되실 텐데.”
율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주 천천히, 진심을 가득 담아 웃었다. 그 미소는 크리스틴이 본능적으로 쥐고 있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툭 끊어 버렸다.
“감히 네가!”
크리스틴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직접 폭력을 써 본 적이 없었다. 후작 부부가 누군가를 ‘처리’하라고 명령할 때는 그게 상대의 죽음을 뜻한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러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크리스틴 마조람은 후작가의 공주님이었고, 예쁘고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화가 나면 울고 떼를 썼다. 그러면 후작 부부가 알아서 상대를 ‘처리’해 주었다.
그건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이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니까 제 죄가 아니라고 여겼다.
철썩!
크리스틴이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그녀는 온몸을 비틀거리면서 손바닥으로 친 건지, 주먹으로 친 건지도 모르게 마구 손을 내둘렀다.
귀족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네가…….”
한데 이상했다. 율리아가 이렇게 키가 컸나. 분명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왜 남성용 예복을 입은 사람이 눈앞에 있는 건가.
크리스틴이 정신을 차린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세상에! 전하, 괜찮으세요?!”
코코가 찢어질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율리아가 다급한 얼굴로 웬 남자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상했다. 크리스틴이 때린 건 율리아인데, 앞에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연회장이 충격으로 가득 찼다. 귀족들이 입을 틀어막은 채 크리스틴을 노려보고 있었다. 뒤에서 후작 부부가 달려와 크리스틴의 팔을 잡아당겼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세상에…… 마조람 영애가 왕자 전하를 때렸어.”
크리스틴은 그제야 저가 때린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