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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71/319)

66화

크리스틴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왕궁 연회장 그 많은 사람 앞에서도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가슴을 들썩거리며 울었다.

“바실리 오빠보다 제가 더 영리하잖아요.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죽도록 공부한 것도 오빠가 아니라 저잖아요. 가문 어르신들도 제가 오빠보다 더 쓸 만한 애라고, 마조람의 보물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얘야, 크리스틴.”

“왕비 말고 가주가 되고 싶어요. 내연녀한테 휘둘리기나 하는 한심한 왕자의 보모가 아니라! 마조람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고요!”

“가주는 영리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후작의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크리스틴을 아끼는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마조람은…… 아주 많은 사람의 욕망을 짊어지고 있어.”

“저도 할 수 있어요. 책임감이라면 도망쳐 버린 오빠보다 제가 나아요.”

“닳고 닳아야만 버틸 수 있어. 가주는 그런 자만이 할 수 있단다.”

“저도…….”

그때까지 부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후작 부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너는 너무 순진해, 크리스틴.”

그녀는 우아한 자세로 앉아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내더니, 크리스틴에게 다정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넌 고작 그 평민 계집아이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자기혐오에 빠질 만큼 마음이 약한 애야. 내연녀가 있는 걸 알았으면 그 여자가 사고 치기 전에 죽여 없앴어야지. 가주가 되려면 그보다 더 잔인한 명령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릴 수 있어야 해.”

“저도 할 수 있어요.”

“아니, 넌 못 해. 엄마는 네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 그리고 왕의 아내가 뭐 어때서. 지금 왕과 왕비를 보렴.”

“어머니.”

“권력이란 동색이 아니야. 네 눈엔 왕이 권력을 다 가지고 있고, 왕비는 뒷방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왕과 왕비는 다른 색의 권력을 가졌을 뿐이야.”

“기어이 저를 왕비로 만들고 싶으세요? 오늘 그 사달을 겪고도…….”

“국왕도 애첩이 있지.”

후작 부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게다가 아들도 있고.”

“어머니!”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 왕의 사랑을 등에 업고도 평생 침전에 갇혀 살아갈 뿐이야. 크리스틴, 네 눈엔 레위시아 오르테가가 왕족으로 보이니? 내 눈엔 단순히 왕궁 거주자일 뿐인데.”

“달라요. 레위시아 전하에겐…….”

율리아가 있다. 그렇게 말하려던 크리스틴이 재빨리 말을 삼켰다. 부모님 앞에서는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율리아의 이름을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후작 부인은 그런 딸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내연녀가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엄마가 처리해 주마.”

“……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 줄게. 사랑하는 내 딸, 그러니까 이제 투정은 그만 부리렴. 오늘은 조금 실망이구나.”

죽이겠다는 말이에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의 입에서 ‘실망’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여름이 시작되던 날 오르테가 해안에 강한 태풍이 찾아왔다.

뱃사람들의 경고에 귀 기울인 자들은 피해를 덜 입었으나, 그렇지 않았던 자들은 큰 손해를 보았다. 배가 부서지고 집에 물이 새는 건 다반사였고, 집채만 한 파도에 휩쓸려 실종됐다는 사람도 종종 나왔다.

비와 바람만으로도 너무 무서운 게 태풍인데, 이번에는 바다까지 심상치 않았다. 철새들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는 늙은 뱃사람들만이 해일을 걱정했다.

“율리아 아니었으면, 어휴.”

남부 함대는 태풍이 닥치기 전부터 안전한 해안가에 배를 대고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다. 모두 카루스의 명령이었다.

병사들은 태풍이 금세 물러가리라고 보았으나, 바바슬로프를 중심으로 율리아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기사들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일이 닥칠 거다.”

바바슬로프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믿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 중에는 오르테가 남부 해상에 파견된 지 10년이 넘은 자도 있었다. 태풍은 종종 왔지만, 군함이 부서질까 봐 걱정해야 할 만큼 큰 해일이 닥친 적은 없다고 웃었다.

“복덩이가 거짓말했을 리 없어.”

카루스는 율리아에 대한 바바슬로프의 맹목적인 신뢰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말에 따라 태풍에 대비했고, 남부 함대는 무혈 제독의 선견지명 덕에 무사히 태풍을 넘길 수 있었다.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해안가와는 달리, 오르테가 왕궁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한창이었다.

왕위 후계자가 될 거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1왕자와 마조람의 금지옥엽 크리스틴의 약혼식이 시작되었다.

1왕자의 손을 잡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는 크리스틴은 성녀처럼 꾸민 모습이었다. 길고 투명한 베일이 귀 뒤에서 시작돼 발끝까지 떨어지고, 머리엔 보석을 깎아 만든 화관을 썼다.

감탄과 경탄이 이어졌다. 크리스틴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며 비웃고 비난하던 귀족들도 이 순간만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이 입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위시아 2왕자궁의 시녀들만이 시큰둥한 얼굴로 나지막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알렉사가 물었다.

“저 여자가 크리스틴 마조람입니까?”

“드레스 좀 봐. 미쳤네.”

코코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더니, 흥 코웃음을 쳤다.

결혼식도 아니고 대관식도 아닌데 너무 과하다는 것이다. 특히 1왕자는 맡겨 놓은 왕관을 가지러 나온 것 같은 차림새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샤트린과 공주궁의 시녀들에게까지 비웃음을 샀다.

두 사람을 가장 신나게 비난할 것 같았던 레위시아는 식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1왕자와 국왕에게 향한 채 돌아올 줄을 몰랐다.

레위시아의 뒤쪽에 서 있던 코코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전하, 정신 차리세요.”

“응?”

“마실 거라도 갖다 드려요?”

레위시아는 그제야 1왕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코코를 바라보았다. 그는 본래 읽기 쉬운 편인 사람이었는데 이날따라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안개 낀 바다처럼 가깝고도 멀어 보이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코코가 말했다.

“크리스틴은 왕비 전하가 아니에요. 1왕자는 국왕 전하가 아니고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남의 불행을 내 것인 양 간접 체험하지 말라고요.”

“어떻게 알았어?”

“네?”

“내 마음 말이야. 어떻게 읽었냐고.”

레위시아가 코코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코코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턱짓으로 율리아를 가리켰다.

“어떻게 알았겠어요. 우리 궁에 신기하게 눈치 빠른 애가 하나 있잖아요. 전하께서 신경 쓰시는 것 같으니 말조심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 여자가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부터 계속 기분이 안 좋으셨잖아요. 전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에요.”

코코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레위시아는 코코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대충 웃어넘겼다.

약혼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왕 부부가 긴 축사를 읽고, 마조람 후작 부부가 유리 상자에 담긴 예물을 가져왔다. 귀족들은 고상한 태도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날은 오르테가 왕국 역사에 세기의 약혼으로 기록될, 왕가와 마조람이 혈연으로 하나가 되는 날이었다.

‘본래라면 바실리와 샤트린 공주가 이 자리에 있었겠지만.’

율리아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고, 시야는 선명하게 밝아졌다.

‘바실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해서 내 복수가 끝난 줄 알았다면 크게 착각한 거야. 나는 아홉 번째를 살고 있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이제 또 하나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 이후의 일이야 크리스틴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기까지는 계획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네 차례야, 크리스틴.’

사건은 시끄럽지 않게 시작되었다.

약혼식장에 뒤늦게 도착한 귀족들이 은근슬쩍 크리스틴과 마조람 후작 부부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거 들었소? 브레웨 아카데미에서 졸업생들의 성적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일 거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성적이 조작됐다고 하더군. 대리 시험은 물론이거니와, 논문과 과제까지 바꿔치기했다고.”

“세상에! 도대체 누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대요?”

“마조람 후작 영애가…….”

수군거림은 웅성거림으로 변하고, 곧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귀족들의 입에서 하녀들의 입으로, 시종들의 입에서 왕족의 귀로. 밀폐된 식장 안에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졸업생들이 단체로 고발한 거라 누가 신고자인지 모른대.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혔어. 어디서 구했는지 논문에 과제, 필기 노트까지…… 증거가 수두룩하게 제출되었대.”

“영리한 평민을 협박해서 대리 시험을 치르게 했대. 평민이 무슨 힘이 있었겠어? 시키는 대로 하면 학비를 대 준다거나, 생활비를 보태 주거나 그랬겠지.”

“미쳤어. 그럼 뭐야. 4년 동안 수석 했다며? 천재라며? 졸업 시험에서 실수만 안 했어도 브레웨 훈장을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고 했잖아?”

“다 거짓말이었던 거지.”

귀족들의 시선이 까칠하게 변했다. 마조람 후작가를 향한 존경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겉치레일 뿐, 그 근원은 질투에 가까웠다.

크리스틴 마조람이 실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았고, 힘없는 평민을 협박해서 대신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그녀를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손바닥 뒤집듯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1왕자 전하께서는…… 알고 계신 건가?”

“모르시겠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가서 은밀하게라도 전달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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