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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70/319)

65화

1왕자와 크리스틴의 약혼식 날짜가 발표되는 날, 왕비의 궁에서 전야제가 열렸다.

왕족과 그 왕족의 시녀들, 그리고 혼약을 맺는 가문과 그 가신들을 초대해서 약소하게 즐기는 연회였다.

이날은 어쩐 일인지 율리아가 연회에 가겠다고 먼저 말했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자신은 평민이니 왕자궁에 남아 있겠다고 했을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전야제라고는 해도 가문이 가문이다 보니, 사람이 많았다. 율리아는 연회장 구석에 서서 되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지금쯤 터뜨려야 하는데.’

1왕자의 연인은 여러 가지로 대단한 여자였다. 그녀는 절대 빈손으로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1왕자가 크리스틴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받고 있었다. 약혼식은 치러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부부가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왔군.’

율리아의 시선이 연회장 입구에 고정되었다.

1왕자의 연인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타났다.

여자를 먼저 발견한 건 얄궂게도 크리스틴이었다. 그녀가 굳은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자, 1왕자가 왜 그러냐고 묻다가 함께 얼굴을 굳혔다.

그러곤 서둘러서 여자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윽박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감옥에라도 가둬야 말을 들을 건가?”

“전하.”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어?”

“저 임신했어요.”

“……뭐?”

“임신했어요.”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컸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율리아의 시선은 크리스틴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흰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사람들이 핏기 없는 얼굴을 왜 종잇장이라고 표현하는지 알 것 같았다.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시간이 멈췄다.

경악하며 부릅뜬 두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그건 분노가 아니라 허망함이었다.

여자의 임신 선언으로 침묵에 휩싸여 있던 연회장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충격에 빠진 귀족들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1왕자는 크리스틴의 손을 놓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쥐고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진짜냐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정말 왕족을 잉태했느냐고 물었다.

“정말이에요. 돈만 조금 쥐여 주면 멀리 떠나서 혼자 키울 생각이었는데…… 전하, 이래도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시려고요?”

여자가 원망스레 물었다.

1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기대는 여자를 품에 안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크리스틴은 1왕자가 사라져 텅 비어 버린 자신의 옆자리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영애. 임신했다 한들…… 어차피 정부의 아이예요. 진짜 왕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요. 영애, 괜찮아요? 크리스틴!”

“믿을 수가 없군요! 아무리 왕자 전하를 놓치기 싫었다고 한들,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말할 수가 있는지. 믿을 수 없이 뻔뻔한 여자입니다.”

크리스틴의 추종자들이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고 위로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독한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야 추종자들의 말이 옳았다. 저 여자는 왕자의 정부일 뿐이고, 정부의 아이는 진정한 왕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를 보라. 애첩의 아들로 태어나 가까스로 왕족의 지위를 얻었으나, 오르테가에 그가 왕위 후계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왕자비는 크리스틴 한 사람일 것이다. 1왕자가 왕이 되면, 왕비도 그녀 한 사람일 것이다.

“일단 진정하고 여기서 나가죠.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서 이 일을 후작님과 상의해 보세요. 아무래도 저 여자가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으니.”

“영애, 괜찮아요?”

크리스틴은 자신을 부축하는 추종자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 한 걸음을 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여자는 1왕자의 품에 안기다시피 기대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일단 하루 정도는 푹 자고 싶어. 그런 뒤에 아버지와 상의하고, 어머니께 도움을 구해야겠어. 두 분이 어떻게든 해 주실 거야. 저 여자를 죽이거나, 아이를 없애서라도.’

여기까지 생각한 크리스틴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죽이다니, 누구를?’

멀리 쫓아내고 싶어서 협박을 하긴 했다. 하지만 소문처럼 음식에 독을 타거나 하진 않았다. 크리스틴은 평생 자신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믿고 살았다.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몰래 손을 쓴 건가 의심이 되긴 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해 보진 않았다. 어머니에겐 어머니의 방식이 있으니까.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비겁한 변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율리아.’

갑자기 율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율리아의 그 고요한 눈동자. 원망이나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오직 분노와 경멸뿐이던 그 눈동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크리스틴이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곤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추종자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본능적으로 율리아를 찾았고, 멀리 입구 쪽에서 레위시아 2왕자와 함께 서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율리아!’

눈이 마주쳤다. 율리아는 처음부터 크리스틴만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애써 찾았는데 시선을 오래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율리아 앞에선 언제나 그랬다. 마치 겹겹이 둘러놓은 성벽 너머의 자신을 속속들이 주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갖은 변명과 자기합리화도 소용없었다.

지독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대리 시험을 치렀을 때도, 과제를 베껴 썼을 때도, 필체를 연습할 때도, 아카데미 귀족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율리아를 보며 짜릿한 우월감을 느꼈을 때도.

크리스틴은 자신이 역겨웠다.

‘너야?’

크리스틴이 눈으로 물었다.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네가 한 짓이 아니란 걸 아는데, 왜 꼭 네가 한 짓처럼 느껴지는 걸까.’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율리아만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추종자들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밤인데도 바람이 미지근했다. 습기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한껏 꾸민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크리스틴은 화려한 머리 장식을 쥐어뜯듯 떼어 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섬광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바실리를 사랑했으나 처참히 배신당했고, 신분 때문에 싸울 수조차 없었던 율리아. 샤트린 공주라는 엄청난 상대에게 밀려 죽음으로 희생될 뻔했던 율리아.

1왕자와의 완벽한 결혼을 꿈꿨으나 처참하게 실패했고,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와 싸울 수 없는 자신. 왕자에게 임신한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가문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자신.

뭐가 달라.

발끝에서부터 새카만 어둠이 자랐다. 크리스틴은 움직일 수 없었다. 끈적거리는 어둠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와 심장으로, 머리로, 끝내는 영혼에 닿았다.

절망이라는 어둠이었다.

네 기분이 이랬었구나. 율리아 아르테. 너도 이렇게 절망했었구나. 억울하고 분하고, 믿을 수 없이 끔찍한 기분이었겠구나.

“어쩔 수 없어.”

크리스틴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어쩔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어?’

어디선가 율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거야? 이번에도 또 너희 부모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기다리다 보면, 그들이 알아서 네 손에 승리를 가져다줄 것 같아? 그렇게 사니까 좋아? 네가 말하던 귀족의 정의가 그거야?’

아니야. 아니야.

‘왕자에게 임신한 내연녀가 있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가문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럼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너보다 네 오빠가 나아. 그 자식은 그래도 달아날 용기는 있었는데.”

율리아의 목소리가 진짜로 들렸다.

연회장을 빠져 나가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 율리아와 닮은 뒷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율리아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1왕자 전하와 결혼하지 않겠어요.”

“뭐?”

마조람 후작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고, 다시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1왕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요. 왕비 같은 건 되지 않겠다고요!”

“크리스틴! 제정신이냐? 너까지 왜 이러는 거야!”

후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딸을 애지중지하는 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크리스틴도 아버지가 저에게 고함을 지를 줄은 몰랐는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너 설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느니……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후작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도 알아요! 귀족의 결혼에 사랑은 걸림돌이 될 뿐이란 거!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계약이기 때문에 서로 손해가 없도록 처음부터 잘 조율해야 한다는 것도요! 그리고 이 결혼이 왕가보다는 우리 가문에 이득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렇게 잘 아는 애가 왜 이러는 거야! 설마 그 내연녀 때문이냐? 크리스틴, 왕족에게 그 정도 흠은 아무것도 아닌 걸 알지 않니.”

“그게 아니에요.”

“아이는 사생아로 기록될 거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저는 가주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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