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트루디는 율리아의 하녀가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궁내부 관리의 첩자 짓을 하게 된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왕 첩자가 될 거라면 왕족이나 귀족 정도는 되어야지, 자신과 하나 다를 것 없는 평민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처음엔 왕자궁에서 성실하게 인맥을 쌓아 율리아의 전속 하녀가 될 생각이었다. 일하는 것도, 하녀들과 잘 지내는 것도 자신 있었다.
그런데 왕자궁에 들어가자마자 율리아에게 정체를 들킨 것도 모자라, 역으로 감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트루디는 율리아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거기엔 그녀가 던져 준 금화 주머니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궁내부 관리는 보상에 인색한 편이었는데 율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두 번째는 코코 때문이었다.
코코는 율리아가 없을 때 트루디를 따로 불러냈다. 그러곤 만약 율리아를 배신하거나 허튼 마음을 먹는다면,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해 주겠다는 말로 트루디를 협박했다.
오르테가 왕궁에서 가장 무섭다는 악마 시녀의 말이었다. 첩자로 들어온 것도 들킨 마당에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트루디는 코코 앞에서 율리아에게 충성하겠다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율리아 시녀님, 이번에는 가서 뭐라고 할까요? 제가 마조람 영애에 대한 정보를 물어다 준 뒤부터 그 여자가 저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거든요. 돈을 받게 되면 저한테도 조금 떼어 준다면서, 벌써 부자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글쎄……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율리아가 작은 빗으로 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늘 수수한 크림색 드레스만 고집하던 그녀였는데, 오늘따라 은근히 우아한 멋이 느껴지는 옷을 입고 있었다.
코코처럼 드러내 놓고 화려한 장식을 매달진 않았으나, 과하지 않은 레이스와 자수가 멋스러웠다. 소매는 살짝 부풀린 모양이었고, 가슴 앞에서부터 자잘하게 들어간 주름이 치마 끝까지 이어져 고급스러워 보였다.
윤기 있게 빛나는 초콜릿색 머리카락을 또 한 차례 빗어 내린 율리아가 함께 있던 코코에게 물었다.
“코코는 크리스틴이 그 여자를 죽이리라고 생각해요?”
“응.”
“진짜요?”
“걔가 아니라, 걔들 가문이 죽이겠지.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1왕자의 측근이 죽이거나.”
“어느 쪽이건 결국은 죽는 결말이네요.”
율리아가 들고 있던 빗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이전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왕자에겐 숨겨 둔 연인이 있었고, 그 여자는 왕가의 혼약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언제나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그 상대가 크리스틴일 때도 있었고, 다른 대귀족의 딸일 때도 있었다. 1왕자의 결혼 상대는 몇 번 바뀌었으나, 그의 연인은 늘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트루디.”
“네, 시녀님! 말씀하세요.”
“가서 이렇게 말해. 마조람 후작가에서 당신을 죽여 없애려 할 거라고. 돈을 주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비밀을 지키기 쉬우니까.”
“그럼 그 여자가 포기하고 도망칠까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내게 붙었던 하이에나가 이번에는 그 여자를 노릴 거야. 궁내부에 마조람의 끄나풀이 있으니까, 그를 통해 동선을 파악하겠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죽다니 안됐어요.”
트루디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우스운 말이었다. 하이에나의 편에서 율리아의 암살을 도왔던 주제에, 꼭 개과천선이라도 한 사람처럼 남을 걱정하다니.
율리아는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듯 트루디를 쳐다보았다.
* * *
“크리스틴 마조람이에요.”
궁내부에 크리스틴이 나타났다. 궁내부 관리들은 크리스틴에게 굽신거리면서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 보려 애썼다. 마조람 후작가의 영향력도 대단했지만, 그녀는 장차 왕비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밖으로 나와요.”
크리스틴의 목적은 1왕자의 연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자신을 ‘내연녀’라고 정의한 여자는 크리스틴을 따라 궁내부에서 멀리 떨어진 정원으로 갔다.
“돈을 주러 오셨나요? 영애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크리스틴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관리이다 보니 딱딱하고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도 굴곡진 몸매가 은근히 드러나 아름다웠다. 처진 눈에 도톰한 입술, 둥근 코와 이마는 그녀를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게 했다.
특히 매력적인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느릿느릿 노래하는 것 같은 저음이 귀를 간질이듯 울렸다.
“돈 같은 건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럼 왜 찾아오셨어요?”
여자가 실망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며 묻자, 크리스틴이 선언하듯 말했다.
“오르테가에서 떠나요. 그렇게 큰돈은 줄 수 없지만 최소한의 정착금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어요. 당신도 여기 남아서 험한 일을 당하느니, 멀리 떠나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사는 게 좋잖아요.”
“그걸 왜 영애가 정해요? 저는 오르테가가 좋아요. 왕궁에서 일하는 것도 좋고, 여긴 제 연인이 있는 곳이니까요.”
여자는 자신만만했다. 바로 전날에도 1왕자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이 마조람의 금지옥엽인 건 알지만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서는 그녀에겐 적수조차 되지 못할 어린애였다.
“이건…… 부탁이 아니에요. 떠나요. 나도 이 상황이 불편하니까.”
“저도 부탁이 아니었어요. 돈을 주기 싫으면 안 줘도 돼요.”
“이봐요.”
“영애, 충고 하나 할까요? 남자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여자를 싫어해요. 왕자 전하는 언젠가는 왕이 되시겠지만, 침대 위에서는 평범한 한 사람의 남자일 뿐이랍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가르치듯 조롱 섞인 말투. 여자는 크리스틴을 놀리면서 극도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는 건 귀족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를 참고 그냥 뒤돌아섰다.
자존심이 상해 속이 문드러졌다. 자신은 늘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쑥불쑥 치솟는 끈적끈적한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머리에 심장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그날 1왕자가 저녁 만찬을 마치고 크리스틴의 입술에 키스하려 했지만, 그녀는 굳은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트루디는 그 소식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율리아에게 가져왔다.
“엄청 신나 있던데요. 마조람 영애가 1왕자님이랑 파혼할지도 모르겠다면서…… 이러다 자기가 왕자비 되는 거 아니냐고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일찍 죽고 싶은가 보네.”
율리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겁이 없는 여자였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건가 싶었다. 1왕자가 어떤 감언이설을 늘어놓았기에, 그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건가.
율리아는 이제 여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음식을 조심하라고 해. 후작 부인은 독을 잘 쓰거든. 이렇게까지 알려 주는데도 계속 그렇게 함부로 행동한다면…… 그땐 나도 방법이 없어.”
“걱정하지 마세요, 시녀님. 제가 잘 말해 볼게요!”
걱정은 무슨. 율리아의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트루디가 여자를 뭐라고 설득했는지는 몰랐다. 다만 워낙 자연스럽게 호들갑을 잘 떠는 아이이니 알아서 잘 했으리라 믿었다.
이틀이 더 지난 뒤, 궁내부에서 제공하는 여자의 식사에서 독이 검출되었다.
다행히 여자는 속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음식을 싸서 들고 다녔다. 그녀는 먹지 않은 음식은 매일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음식을 주워 먹은 동물들이 모두 주둥이에서 누런 거품을 흘리며 죽어 버렸다.
여자는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고 생각을 바꾸었다.
요구했던 30만 금화를 20만으로, 또 이틀 뒤에는 10만으로 내렸다. 그런데도 크리스틴이 요지부동으로 응답하지 않자, 이제는 1왕자에게 매달렸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은 전부 목석같아서 재미없었다고, 진짜 사랑이 뭔지 알게 됐다고 했잖아요!”
“그만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언제 그대에게 헤어지자는 말이라도 했어?”
“누가 날 죽이려고 한단 말이에요. 마조람 영애가 틀림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여기 계속 있다간 전하의 내연녀라고 손가락질만 당하다가 죽고 말 거예요!”
“피해망상이라고 했잖아. 이제 여름이야. 쓰레기통에서 상한 음식을 먹은 거겠지.”
“전하! 제발요!”
“너야말로 날 사랑한다면서 왜 자꾸 돈을 요구하는 거야?”
1왕자가 결국 화를 냈다. 그는 다정한 연인이었지만 오만한 왕족이기도 했다.
“어서 돌아가. 곧 약혼식 전야제가 있어. 네가 나랑 있으면 여러 사람이 불편해지잖아.”
“지금 날 쫓아내는 거예요? 내가 전하한테 그 정도밖에 안 돼요? 크리스틴 그 어린 계집애가 그렇게 대단해요?”
“그럼 네가 내 아내라도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1왕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정신 차려.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잖아. 그동안 서로 즐겼으니 된 거 아냐?”
“어떻게…….”
“내 방에서 장식용 보석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도 네 짓인 걸 모를 줄 알았나? 하는 짓이 귀여워서 봐주고 있었더니, 왜 그래. 너무 지나치잖아.”
“전하, 잠깐만요.”
“나가. 그래도 내 여자였는데, 병사를 부르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자는 그렇게 쫓겨났다. 욕심이 지나쳐 돈을 받긴커녕 1왕자에게도 버림받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