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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8/319)

63화

* * *

며칠간 암행에 적극적이던 레위시아가 드디어 유의미한 소식을 물어왔다.

“율리아!”

그는 왕자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맥스웰을 내보내고, 자신의 방에서 드레스를 벗어 던지며 율리아를 찾았다.

“전하?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으셨네요.”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것이다. 코코와 알렉사는 진작 잠들었다. 왕자가 돌아오는 소리에 눈을 뜬 율리아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레위시아의 방에 들어왔다.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레위시아가 율리아의 팔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크리스틴 마조람이 1왕자의 여성 편력을 조사하기 시작했어. 영애의 추종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그의 과거를 캐묻고 다니더라고.”

드디어 시작했구나. 율리아가 살짝 웃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괜찮았다.

“그래서 찾았대요?”

“여자가 많긴 한데, 크리스틴 마조람이 신경 써야 할 만큼 특별한 관계의 여자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어. 사귀다가 흐지부지된 여자가 몇 명, 정부 삼아 만났던 여자가 또 몇 명.”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권력 가문의 아들 중에 그 정도 과거도 없는 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레위시아도 그게 두 사람의 결혼에 별다른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사고가 터졌어.”

“1왕자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났나요?”

“1왕자의 숨겨 둔 연인이……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레위시아가 소름 끼친다며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그는 율리아를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알고 있었어?”

“궁내부 하급관리 중에 1왕자 전하께서 총애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 하녀에게 알아보라고 시켰고, 운 좋게 누군지 알아냈죠.”

“그 여자가 크리스틴 마조람에게 사람을 보냈어.”

“설마…….”

“1왕자와 헤어지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달라고 했대.”

역시나. 율리아가 짧은 웃음과 함께 한숨을 흘렸다.

레위시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암행 내내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대? 마조람 후작가가 그렇게 우습나? 1왕자한테 가서 헤어져 줄 테니 돈을 달라고 해도 목숨이 위험할 판국에, 마조람 후작가의 금지옥엽을 협박해?”

“전하.”

“조만간 왕궁에서 시체 하나 치우게 생겼어. 1왕자는 알고 있을까? 저 때문에 사람 하나가 죽게 생겼다는 걸.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이지만, 정말 정나미 떨어지는 놈이야.”

“크리스틴은 돈을 주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어마어마한 거액을 불렀다는데, 마조람 후작 정도 되면 그 돈을 주느니 죽여 없애는 게 싸게 먹힌다는 걸 알겠지.”

“그게 아니라…… 돈을 주면 지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크리스틴은.”

레위시아는 이번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결투야? 아무리 사랑 없는 결혼이라고 해도 남녀 사이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어.”

“있어요. 크리스틴은 1왕자의 숨겨 둔 연인을 적으로 여길 거예요.”

“이건 결혼이 아니라 계약이잖아. 그런데도 질투를 한다고?”

“남녀 사이잖아요. 크리스틴은 이런 일에 면역이 없어요. 우리는 그 애가 스물한 살이라는 걸 기억해야 해요. 그 애는 1왕자가 아니라 그 여자를 더 미워할 거예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게 싫거든요.”

그러는 너도 스물한 살이면서.

레위시아는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율리아에게 물었다.

“사랑이 없어도 그게 가능해?”

“그럼요.”

어쩌면 사랑 비슷한 감정이 이미 생겼을지도 모른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감과 설렘의 중간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크리스틴에게는 훌륭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모든 건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되뇌고 있을 거예요. 자신은 바실리와 다르다면서, 그렇게 생각 없는 철부지가 아니라고 말하겠죠.”

“맙소사.”

가발을 떼어내던 레위시아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최근 왕궁에는 하나만 터져도 시끌시끌할 일이 연달아 일어나,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수군대기 일쑤였다.

하루가 지났다. 왕궁 전체가 어수선했다. 레위시아의 2왕자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녀들이 일하다 말고 모여서 자꾸 수군거리자, 코코가 짜증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

“야! 그냥 대놓고 얘기해. 너희가 무슨 얘기하는지 다 아는데, 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차라리 우리 앞에서 대놓고 말해! 비둘기처럼 구구거리니까 더 귀를 기울이게 되잖아!”

“아이, 시녀님도…… 저희가 언제 그랬어요.”

“다 내 옆으로 와! 어디서 뭘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여기 와서 하나씩 다 얘기해. 모른다고 하면 화낼 거야.”

“이미 화내고 계시면서…….”

코코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하녀들은 꿍얼거리면서도 그런 코코가 무서웠는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억지로 입을 열었다.

“1왕자궁 시녀님들이 크리스틴 마조람 영애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샤트린 공주님이 연회를 또 열려고 했다가 왕비님께 혼났대요.”

“1왕자 전하께서 마조람 영애한테 키스했대요. 온실이었다는데, 목격한 사람이 많더라고요. 영애께서…… 망가진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고.”

코코가 마시던 차를 콱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곤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율리아와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알렉사는 아예 듣고 있질 않았다.

“뭐 그렇게 대단히 재밌는 얘기도 아니잖아. 왕궁에 이런 난리가 난 게 하루 이틀이야? 이제 남의 일에 관심 그만 갖고, 가서 너희 할 일이나 해.”

“네, 코코 시녀님.”

하녀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물론 코코가 없는 곳에서 또 수군거리겠지만,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녀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 코코가 율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트루디는 뭐래?”

“음…… 우리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여자예요. 자기 자신을 내연녀라고 불렀대요.”

“내연녀?”

코코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그런 상황이면 자신이 왕자의 진정한 사랑이며, 뒤늦게 나타난 크리스틴을 두 번째라고 공격해야 맞지 않나.

율리아가 슬쩍 웃더니 트루디가 한 말을 코코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30만 금화 정도면 깨끗하게 헤어져 줄 수 있고, 50만 금화면 아예 다른 나라로 꺼져 줄 수 있어. 서로 좋은 일이지. 난 부유하고 자유롭게 살게 될 거고, 마조람 영애는 내연녀를 처리한 뒤에 왕자 전하의 유일한 아내가 될 수 있고.’”

“미친 것.”

“내연녀도 놀라운데, 아내라는 말을 쓴 건 더 놀라웠어요. 크리스틴이 돈을 주지 않으면 1왕자 전하에게 아내가 둘이 될 거라고 경고하는 말이었으니까요.”

“사랑했을까?”

“제가 보기엔…….”

율리아의 입에서 한없이 냉정한 평가가 쏟아졌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세상은 시궁창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저는 사랑을 믿지 않지만, 부정하지는 않거든요?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죠.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율리아의 말을 따라 한 코코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관심 없어 보이는 알렉사에게 물었다.

“얘, 꼬마야. 너는 언제쯤 첫사랑 같은 걸 해 볼 거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렉사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갸웃하며 말했다.

“연애라면 몇 번 해 봤습니다. 용병 짓도 매일 매 순간 바쁜 건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심심한 용병들끼리 돌아가면서 연애 짓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저는 꼬마가 아니에요. 코코보다 훨씬 크죠.”

“뭐? 그게 진짜야? 연애를 해 봤다고? 몇 번이나?”

“네, 제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계속 차였지만요.”

“뭐어? 심지어 네가…… 내가 지금 무슨 얘길 듣고 있는 거야.”

“연애 이야기 중이었습니까? 진작 말씀하시지.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이게 전부입니다.”

“뭔데?”

“그놈이 그놈이다.”

알렉사의 입에서 할머니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코코는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율리아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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