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오르테가는 며칠간 조용했다. 그러나 수면이 고요해 보인다고 해서 물속까지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남부 함대에 신임 제독이 부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전의 사령관이 비자금을 착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에 더해 신임 제독이 국왕을 처음 방문한 날 해방군이 시위를 벌이자, 걱정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혹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오르테가 남부 해상에 파견된 신임 제독이 하필이면 그 유명한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였기 때문에, 금방 사그라들 줄 알았던 전쟁론은 꾸준히 힘을 얻어 퍼져 나갔다.
국왕은 어떻게든 카루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썼고, 마조람 후작은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를 관찰했다.
크리스틴과 1왕자를 결혼시키려는 후작과 샤트린 공주를 카루스에게 소개하려는 국왕.
귀족들은 둘 중 하나만 성공해도 위태로운 오르테가에 든든한 동아줄이 되리라고 믿었다.
1왕자는 크리스틴과의 결혼에 꽤 적극적이었다. 그는 오르테가의 귀족 가문 여식 중, 자신과 결혼할 만큼 괜찮은 상대가 크리스틴 마조람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1왕자가 직접 몸을 움직여 크리스틴을 찾았다. 정말 중요한 행사가 아니고서야 왕궁 밖으로는 잘 나가지 않는 그로서는 대단한 시도였다.
“마조람 저택은 정말 오랜만에 오는군. 크리스틴, 그대가 궁에 오지 않으니까 너무 허전했어. 내 사과를 받아 주겠나?”
그는 크리스틴에게 지난번에는 미안했다며, 서운했다면 화를 풀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1왕자궁의 시녀들이 하루 내내 만든 꽃 장식이 크리스틴의 방을 가득 채웠다. 가득 채우고도 남아 복도까지 죽 늘어섰다. 그날 오르테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모두 크리스틴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대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러 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시녀들이 애썼으니 궁에 오거든 칭찬이라도 해 줘.”
꽃과 선물, 다정한 말까지. 크리스틴은 1왕자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완벽한 부부가 될 거야.”
“고맙습니다, 전하.”
새침한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크리스틴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발갛게 물든 뺨에 21살다운 순진함이 묻어났다.
가문의 귀한 아가씨로만 살아온 크리스틴에겐 연애 경험이 없었다.
그녀는 1왕자의 달콤한 말과 다정한 태도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틀에 박혀 있으며 다정한 태도는 가식일 뿐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크리스틴, 손을 주겠어?”
1왕자가 크리스틴의 손끝을 잡고 부드럽게 문지르더니,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그뿐 아니었다. 크리스틴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자 깍지를 끼는 대신 그녀의 손을 팔에 얹고, 그 위를 자신의 손을 덮었다.
1왕자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크리스틴에게 냉정하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렇게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굴었다.
“오늘 저녁은 내 궁에서 먹지. 그대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시녀들이 물어볼 거야.”
“오늘이요?”
“그래, 크리스틴. 선약이라도 있었나?”
선약이 있어도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대는 1왕자, 미래의 왕이다. 크리스틴은 얼떨결에 고개를 저으며 선약 같은 건 없다고, 초대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지금까지 그대는 내 조력자였지. 그때는 그대가 딱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니 귀여운 매력이 있어. 크리스틴, 앞으로는 이 모습으로 내게 오도록 해.”
귀엽다니. 크리스틴의 뺨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그녀를 그런 식으로 칭찬해 준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1왕자가 크리스틴 마조람에게 왕자비의 자리를 약속하고, 그녀를 위해 매일 다른 꽃을 바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크리스틴은 매일 그의 궁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1왕자의 낭만적인 면모를 칭찬했다. 국왕을 닮았다고도 했다. 꽃을 보내는 건 시녀들이 하는 일이고, 만찬을 준비하는 건 요리사의 몫이었으나, 찬사의 말은 모두 1왕자의 것이었다.
율리아는 그 모든 걸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그녀의 머릿속만은 얼어붙은 바다처럼 정적이었다. 율리아는 왕국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다가가는 걸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사람을 바꾸면 된다. 적의 힘이 강해 상대할 수 없다면 적의 팔다리를 자르면 되고, 적의 수가 많아 싸우기 어렵다면 하나씩 천천히 제거하면 된다.
크리스틴 마조람.
한때는 신분 차이를 떠나 마음을 나누었다고 믿었던 친구. 사회의 규범이나 제도 따위는 어른들의 사정이라 외면하던 사춘기 시절, 순진했던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기도 했다.
부모보다 친구가 중요했던 시기였다. 얼마나 철없는 짓인 줄도 모른 채 우리는 영원할 거라고, 이야기 속 영웅들처럼 의리를 지키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율리아, 너 대체 왜 이래?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하이에나를 보낸 건 내 부모님이지 내가 아니야. 널 버린 건 우리 오빠지 내가 아니야! 순진한 네가 오빠의 감언이설에 속은 게 잘못 아냐? 내가 뭘 했다고 이래!”
“날 너희 가문의 남자에게 팔아넘기려고 했잖아.”
“너…… 귀족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늙은 귀족의 첩이 되어서, 귀족이 되라고? 그게 귀족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나는, 고작 그 정도였다고?”
“평민이 귀족이 되려면 그 방법뿐이야. 냉정하게 생각해. 네가 만약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들은 제대로 된 귀족 대우를 받을 거고.”
“개수작 부리지 마. 넌 내가 죽길 바랐어. 4년 동안이나 대리 시험을 쳐 준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브레웨 훈장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죽길 바랐잖아!”
“말조심해, 율리아.”
“너나 조심해, 크리스틴. 난 이제 밖으로 나가자마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할 거야. 내가 바로 브레웨 훈장의 진짜 주인이라고. 크리스틴 마조람이 신분으로 협박해서 대리 시험을 쳐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마조람의 딸은 위선자이며 살인자라고!”
“닥쳐!”
“그걸 들키기 싫어서 친구였던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 입…… 다물어, 율리아. 내가 너를 정말 어떻게 하기 전에.”
“그것도 협박이라고 하는 거니? 네 오빠처럼 날 감금해 두고 죽이거나, 네 부모처럼 암살자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크리스틴, 정신 차려. 그 정도론 날 막을 수 없어.”
율리아는 그때 이미 네 번을 살고 있었다. 죽고, 또 죽었던 그녀는 악의와 독기만 남은 채 크리스틴을 몰아붙였다.
“마조람의 가주가 되고 싶다고 했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후계자가 된 네 오빠 말고,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네가 마조람 후작이 되어야 한댔지?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율리아.”
“네가 딱 어울려. 비겁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에 살인자. 바실리는 멍청하고 이기적이지만 너처럼 야비하지는 않거든.”
“말 함부로 하지 마. 평민인 네가 뭘 알아?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인내했는데!”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 크리스틴 마조람의 4년 업적은 다 내 것인데.”
“율리아 아르테. 너 정말…….”
“내가 막을 거야. 네가 가주는커녕 후계자도 되지 못하게 할 거야. 너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이름뿐인 귀족으로 남겠지. 네 손으로 이룬 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은 크리스틴 마조람을 후작가의 공주님으로만 기억할 거야.”
“착각하지 마. 넌 아무 힘이 없어, 율리아. 내 부모님의 명령 한마디면 벌레보다 가볍게 짓밟을 수 있는 게 평민인 네 목숨이야.”
“어디 한번 너도 그 벌레한테 죽어 봐.”
그날 크리스틴은 율리아의 눈동자에서 뭔가를 읽었다.
율리아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싸움을 멈추고 가문에 붙잡아 두려 했던 크리스틴은, 잠깐의 망설임을 버리고 바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병사를 불러서 율리아를 잡아 감옥에 가두라고 소리쳤다.
네 번째 삶이었다. 율리아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멀리 달아났고, 오르테가에 크리스틴과 마조람이 브레웨 아카데미에서 저지른 비리를 폭로했다.
귀족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브레웨 아카데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마조람 후작이 오르테가에서 아무리 드높은 권력을 가진 자라고 해도 아카데미의 이름이 더럽혀진 이상, 크리스틴이 가져간 브레웨 훈장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끈질긴 조사가 있었다. 크리스틴은 4년 동안 치렀던 시험을 다시 치러야만 했다. 모든 시험지와 과제, 논문을 검수당했다. 필적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가르쳤던 교수들까지 총동원된 검증이었다.
크리스틴이 받았던 브레웨 훈장은 아카데미에 회수되었다.
크리스틴은 수치스러워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인 마조람 후작을 졸랐다. 율리아를 죽여 달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마조람의 사랑받던 공주님이 우울증에 걸려 칩거에 들어간 뒤, 후작은 하이에나들을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율리아 아르테와 그 주변 사람, 그녀의 도주를 돕는 모든 사람을 다 죽여 없애라고. 율리아가 살았던 보육원을 불태우고, 율리아와 함께 자란 고아들을 찾아내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리하라고 했다.
본보기였다.
네 번째 삶, 율리아는 크리스틴을 폐인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분노한 후작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도망쳐도, 숨어도 소용없었다.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던 고마운 사람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율리아의 마음도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그러니까 크리스틴, 나는 아홉 번째를 사는 지금도 너와 네 가문을 용서할 수가 없는 거야.’
똑같이 갚아 줄 것이다. 지금 당장 크리스틴을 평민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겪었던 불행을 최대한 비슷하게 겪게 하리라.
율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언뜻 보면 분노도 격정도 없이 그저 초록으로 뒤덮인 바다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건 무시무시한 괴물, 먼바다의 레비아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