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마조람 후작은 진심이었다. 딸의 자존심이 문드러지는 것도 모른 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가문의 남자와 결혼해도 왕가의 주인과 비교할 수는 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크리스틴이 다시 물었다. 못 알아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되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아버지인 후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 국왕 전하를 찾아뵐 거란다. 너와 1왕자 전하의 약혼 말이다. 조금 급하게라도 약혼식부터 치르는 게 좋겠지.”
마조람 후작은 더는 시간을 끌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의 약혼식을 치른 뒤에 해방군 문제를 해결하고, 그다음엔 곧바로 결혼식 날짜를 잡자고 했다.
크리스틴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화가 나서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녀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버지, 저는…… 제가 가문의 후계자가 된 줄 알았는데요.”
“바실리가 없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거란다.”
“오빠를 찾으셨어요?”
“아직 소식이 없어. 그래도 제 발로 걸어 나갔으니 분명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올 거다. 네 오빠는 가문 밖에서 혼자 살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오빠가 돌아오지 않으면요?”
크리스틴이 대놓고 물었다. 말없이 식사를 이어 가던 후작 부인이 고개를 들고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 만약에 말이에요. 오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제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둘 중 하나는 가주가 되어야 하는데, 제가 왕자님과 결혼해 버리면…….”
그때 후작 부인이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크리스틴, 꼭 바실리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정곡을 찔린 크리스틴이 입을 꾹 다물었다. 후작 부인은 그런 딸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엄마는 너를 믿어. 크리스틴, 너는 한 번도 엄마를 실망케 한 적이 없지.”
“네…… 어머니.”
“가문을 위해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 보렴. 너는 바실리와는 다르니까, 잘 처신할 수 있을 거야.”
가문을 위해서. 후작 부인의 그 말은 크리스틴에게 자랑이자 족쇄였다. 그녀는 뜨겁게 차오르는 울분을 꾸역꾸역 짓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와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크리스틴은 그렇게 되뇌며 자신을 억눌렀다.
왕궁은 비밀이 없는 곳이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자마자 마조람 후작이 국왕을 만나 1왕자와 크리스틴을 맺어 주기로 약속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마조람 후작의 탐욕이 하늘을 찌른다며 혀를 내둘렀다. 아들을 공주와 짝짓지 못하게 되니까, 이번에는 딸을 왕자에게 보내려 하다니.
놀라운 건 국왕의 반응이었다.
“후작은 약혼식을 최대한 빨리 치르자고 말했는데, 부왕께서 해방군 토벌이 우선이라면서 천천히 진행하자고 했대.”
레위시아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말하는 레위시아도, 듣는 코코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우리 생각보다 더 기분 나쁘셨던 모양이야. 나는 바실리가 그렇게 위대한 녀석인 줄 몰랐다고. 마조람 후작과 부왕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다니.”
“후작의 반응은 어땠는데요?”
“곧바로 왕비를 만나러 갔다고 하던데? 부왕을 설득하는 것보다 왕비와 1왕자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나 봐.”
레위시아가 허리에 넓은 리본을 두르며 말했다. 그는 짙은 푸른색 드레스에 검은 리본과 화려한 숄, 그리고 짙은 주홍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코코, 나 살이 좀 빠졌나?”
“리본을 그렇게 꽉 졸라매면 누구나 허리가 가늘어 보여요.”
“안 졸라맸어!”
“뭔 소리예요. 숨도 못 쉬게 생겼는데.”
코코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레위시아는 아까부터 그의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느라 여념이 없는 율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율리아, 나 리본 좀 다시 매 줄래.”
“네, 전하.”
율리아가 웃으며 레위시아의 허리에서 리본을 풀어냈다. 그러곤 그의 뒤로 돌아가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바짝 붙어서 리본을 둘렀다.
레위시아가 고개를 홱 들어 올리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의 귓불이 불그스레했다. 율리아는 아무 생각 없이 리본을 예쁘게 매듭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데, 레위시아는 그녀의 손가락이 허리에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찔 떨었다.
“오늘은 맥스웰이 모시러 올 거예요. 전에 갔던 사교 클럽으로 가셔서 해방군과 신임 제독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세요. 지금 오르테가 전체가 다 그 이야기로 떠들썩하니까, 이번에는 쓸 만한 정보를 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라야지.”
“혹시 거기서 마조람 후작가의 가신 가문 자제나 크리스틴의 추종자들을 마주치거든, 맥스웰을 시켜서 그들에게 적당히 말을 흘리세요.”
“뭐라고?”
“1왕자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요.”
리본 매듭을 완성한 율리아가 레위시아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1왕자가 여성 편력이 심했었나? 그냥 평범했던 것 같은데…….”
“애인이 있어요.”
“그래, 애인이…… 뭐? 애인이 있어?”
레위시아가 펄쩍 뛰었다. 코코의 입에서도 나지막이 욕설이 흘러나왔다.
율리아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크리스틴에게 이 사실을 흘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의심받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맥스웰을 통해서 추종자들이 전달케 하고, 크리스틴이 1왕자를 직접 조사하게 만들어야죠.”
“두 사람의 결혼을 엎을 셈이야?”
“결혼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그러면 왜.”
“전하, 바실리와 샤트린 공주님처럼 1왕자와 크리스틴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어떨까요.”
“그야 당연히…… 축제를 벌여야지.”
“그렇게 해 드릴게요.”
율리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 * *
트루디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과연 율리아가 처음부터 쓸 만한 아이라고 판단한 하녀였다.
트루디는 궁내부 하급관리 중에서 1왕자궁의 정원을 관리한다는 여자를 찾았다. 나이는 20대 후반, 얼굴은 예쁘장한데 평판은 좋지 않은 여자였다.
몰락 가문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결혼 전부터 부유한 귀족만 골라서 만났다. 그러다 더 돈 많은 자가 나타나면 만나던 남자를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연애만 하다가 한 부유한 자작가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 가문이 망해 버리고 말았다.
빚만 잔뜩 남긴 채 도망가 버린 남편 때문에 사치를 즐길 수 없게 되자, 여자는 곧바로 왕궁에 일자리를 구했다.
“율리아 시녀님.”
밤늦은 시각, 왕자궁 응접실에 트루디가 나타났다. 레위시아를 기다리느라 잠들지 않고 있던 율리아는 트루디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응접실엔 율리아 혼자가 아니었다. 트루디가 왕자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시녀, 코코가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알렉사는 일찍 잠드는 편이라 보이지 않았다.
쭈뼛거리면서 율리아의 곁으로 가는 트루디를 보며, 코코가 피식 웃었다.
“트루디, 무슨 일이야?”
율리아가 물었다. 트루디는 머뭇거리면서 코코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율리아가 안심하라는 듯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코코한테는 비밀 같은 거 없어도 되니까, 말해 봐.”
“저…… 말씀하신 여자를 찾았어요.”
“그래?”
율리아가 먹으려던 과자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코코 때문에 긴장한 트루디가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궁내부 여자 관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하녀니까, 시중을 좀 들어 줬더니 굉장히 좋아했어요. 집이 가난해서 한동안 하녀를 들일 수가 없었대요.”
율리아는 말없이 트루디의 말을 경청했고, 코코는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치고는 차림새가 조금 이상했어요. 드레스는 수수한데 신발은 최고급이고, 손가락에 반지가 많더라고요. 화장도 그렇고, 머리도 최신 유행이었어요.”
“직접 한 게 아니지?”
“어떻게 아셨어요? 매일 아침 번화가에 나가서 화장을 받고 온대요. 장식용 가발도 그렇고, 진짜 비싸 보였어요.”
뻔하디뻔한 이야기였다. 그 여자에겐 왕궁 안에 돈 많은 애인이 있는 것이다. 트루디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여자가 누구와 만나는지 그걸 집중적으로 캐물었다고 했다.
“절대 말 안 해 주더라고요.”
“그렇겠지.”
율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쉬이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트루디가 거기까지 알아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그때 책을 읽는 줄로만 알았던 코코가 트루디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 만나서 이렇게 얘기해.”
“네, 네?”
“1왕자 전하께서 크리스틴 마조람 영애와 결혼한다더라. 왕궁에 큰 연회가 열릴 텐데, 궁내부는 한가해서 좋겠다. 나도 궁내부로 옮겨 달라고 졸라 봐야겠다. 이렇게.”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어떤 대답을 유도해야 하는 건지, 트루디는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그저 코코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겁먹은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