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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5/319)

60화

“네?”

머뭇거리던 트루디가 진짜냐고 물었다. 율리아는 고개를 두 번 끄덕여 주었다.

트루디의 눈동자에 탐욕의 빛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율리아는 이렇게 욕망에 충실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인간은 단순할수록 매력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말했다.

“일을 잘하면 두 배로 줄 거고.”

트루디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율리아가 내민 금화 주머니를 받아 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꼭 잡고 주머니 밖에서 느껴지는 금화의 감촉으로 대략적인 액수를 확인했다. 그러곤 율리아에게 상체를 내밀고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시녀님,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떤 사람하고 친해졌으면 좋겠어.”

“그런 건 일도 아니에요! 말씀만 하세요. 상대가 누구건, 꼭 친구가 되어 보일게요. 깍쟁이한테는 추종자가 되어 주고, 외로워하는 사람한테는 보모처럼 굴 수 있어요.”

역시 쓸 만한 아이다. 율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내부 하급관리 중에 1왕자궁 정원 담당이 있어. 젊고 예쁘장한 부인인데,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도망을 쳐서 혼자 살고 있을 거고.”

“이름은 모르세요?”

“이름까진 모르겠어. 그래도 찾을 수 있겠지?”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언제까지 보고드리면 될까요?”

“너무 서두르지 마. 의심받지 않도록.”

“네, 시녀님!”

트루디가 두 손으로 금화 주머니를 꼭 잡고 대답했다.

비장한 얼굴을 하고 방 밖으로 나가는 트루디의 뒷모습을 보며, 율리아는 국왕을 꼭 닮은 1왕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하찮은 평민 주제에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짜증 섞인 고함과 함께 손찌검이 날아왔다.

이놈의 인간들은 왜 이렇게 자신만 보면 평민 계집, 하찮은 평민 이러면서 때리지 못해 안달인가. 율리아는 얼굴에 떠오른 경멸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맞는 건 괜찮았다. 불구가 되거나 죽지만 않는다면야, 매질도 당해 줄 수 있다.

삶을 반복하면서 이런 식으로 맞았던 걸 세어 보면 수십 번은 된다. 채찍질을 당한 적도,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단순히 상대가 미운 게 아니라,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디 한번 때려 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누가 뒤에서 긴 팔을 뻗어 상대의 손목을 홱 잡아챘다.

“아아아악!”

율리아를 때리려던 건 크리스틴의 추종자 중 하나인 가신 가문의 자제였다. 율리아는 왕궁을 거닐다 그를 우연히 마주쳤고,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그에게 ‘이러고 다니는 걸 크리스틴이 알면 좋아할 것 같으냐’고 되물었을 뿐이었다.

“놔, 놓으라고! 으아아악!”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희게 질려 가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녀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남자의 손목을 잡아챈 알렉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부러뜨리면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귀족과 귀족 사이에 일어난 폭행 사건이기 때문에, 상해가 큰 쪽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저자는 율리아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저는 평민이잖아요. 맞아도 어쩔 수 없어요.”

알렉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래로 한껏 처진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감정 표현이 서툰 알렉사는 가끔 이런 식으로 기분을 드러내곤 했는데, 율리아는 지금 그녀가 몹시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발…… 놔.”

남자는 이제 애원하고 있었다. 알렉사에게 잡힌 그의 손목은 희고, 붉고 아주 난리였다. 이러다 정말로 부러뜨릴 기세라서, 율리아가 알렉사에게 다시 말했다.

“놔주세요, 알렉사. 저는 괜찮아요.”

“명예 결투를 하면 됩니다.”

“네?”

“코코에게 들었습니다. 귀족과 시비가 붙었을 때는 낯짝에 철썩 소리가 나도록 장갑을 집어 던지고, 대전사가 아닌 진짜 결투를 신청하라고요. 그럼 십중팔구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칠 거라면서…….”

코코가 좋은 걸 가르쳤구나.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남자의 팔목을 움켜쥔 알렉사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저 때문에 이러지 마세요.”

정말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놓아준다는 얼굴로 알렉사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율리아를 때리려던 남자는 끄으으, 소리를 내면서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보복하겠지. 상관없었다. 어차피 한동안 크리스틴을 상대하게 될 테니, 그 애의 추종자들이 무슨 짓을 하건 두 배로 갚아 주면 된다.

왕자궁으로 돌아왔더니 코코가 웬 편지를 손에 들고 심각한 얼굴로 그걸 읽고 있었다.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율리아가 서둘러 코코에게 다가갔다.

“코코? 무슨 일 있어요?”

“어머, 시…… 제기랄! 깜짝이야!”

“왜 욕을 하고 그래요?”

“놀랐잖아!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하니?”

코코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들고 있던 편지를 박박 찢기 시작했다.

율리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코코의 손에서 조각조각 난 편지를 빼앗았다.

“이게 뭔데 그래요?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예요?”

“내놔!”

“수신인이 저네요.”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코코가 찢어 놓은 편지를 눈으로 훑으며 테이블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각난 편지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안 보는 게 나아.”

“도대체 뭔데 그래요.”

“내가 너 괴롭히려고 그랬겠어? 쓸데없는 편지니까 내 선에서 처리하려고 그러는 거지! 너는 그걸 꼭 그렇게 맞춰 가면서 읽어야겠니?”

“크리스틴이네.”

율리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건 크리스틴이 율리아에게 보낸 편지였다. 왜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느냐며 할 말이 있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는데, 크리스틴치고는 어투가 격했다. 아마도 잔뜩 화가 난 채 쓴 편지인 것 같았다.

“이거 몇 번째 편지예요?”

“뭘 물어보니. 너도 내가 그 계집애 편지 다 찢어 버리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코코가 질린 얼굴을 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보내는 줄은 몰랐어요. 지난번에 후작 부인이 다녀갔으니까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만날 거야?”

코코가 걱정스레 물었다. 알렉사도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면서, 굳이 만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율리아는 두 사람을 차례대로 쳐다보고 살짝 웃었다.

“안 만나요.”

“진짜지?”

“네, 저는 크리스틴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게 없거든요. 그런 건 오래전에 다 포기했어요.”

크리스틴 마조람은 적이다. 추억이나 그리움이 아니다. 친구라는 말로도 부를 수 없다. 그건 우정에 대한 모독이다.

세 번째 삶이었다. 멀리 도망가서 혼자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오르테가를 벗어나 바이칸 제국까지 달아났던 율리아는, 하이에나들이 의뢰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쳐도 소용없었다. 숨으면 찾아내고, 달아나면 쫓아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율리아를 죽인 뒤에 그녀의 머리를 마조람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크리스틴에게. 울면서 쓰고, 또 썼다.

[크리스틴, 제발 한 번만 살려 줘. 우리 비밀은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너희 가족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네 친구라고 했잖아. 신분은 달라도, 나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는 없다고 했잖아. 이렇게 빌게.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크리스틴은 답장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빌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름을 바꾸고, 출신도 바꿀게. 평생 얼굴을 가리고 다니라고 해도 그럴 수 있어. 바이칸 북부의 산골 마을로 가서 떠돌이 약초꾼이 되어도 괜찮아. 그냥 멀리 떠나서 살 수 있게 해 줘. 하이에나들이 날 죽이지 않게 해 줘. 크리스틴, 정말 날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빌었다. 살려만 달라고. 너희 가족의 눈에 띄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게 사라지겠다고. 없는 사람처럼 숨어 살 거라고 맹세했다.

율리아를 놓쳤던 하이에나들이 몇 번이나 그 편지를 단서로 그녀를 추적해 왔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일꾼과 강제로 결혼시켜서 가문에 충성하도록 만들자는 의견을 낸 것도. 귀족이 되고 싶어 하는 애니까, 가신 가문의 귀족에게 첩으로 넘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한 사람도.

모두 크리스틴이었다.

* * *

율리아가 크리스틴의 편지를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때, 크리스틴은 마조람 후작 부부와 이른 저녁을 함께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해방군은 어떻게 단속할 예정인지, 남부 함대 신임 제독이라는 카루스 란케아는 어떤 인물인지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국왕 전하와는 이야기해 보셨어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해방군 진압에 왕실 기사단을 동원할 거라고 하셨다.”

“정보가 없잖아요. 이번에도 왕궁 앞에서 기습 시위까지 했는데, 그들의 정체와 은거지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대책반을 조직해서라도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식사나 마저 해라.”

“들어 보세요. 신임 제독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전에는 최대한 조심해야 하잖아요. 일단 1왕자 전하께 이 일을 맡겨 보시고, 제가 뒤에서 그분을 도와드리면…….”

“크리스틴.”

마조람 후작이 부드럽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꽤 피곤해 보였다. 실종된 아들 바실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왕가와의 관계를 동시에 보살펴야 했기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원래 그 일은 바실리에게 맡길 생각이었단다.”

“바실리…… 오빠에게요?”

“그래. 샤트린 공주과 약혼식부터 치른 뒤에 해방군을 토벌하고 나면, 바실리가 왕가의 사위로 자리매김하는데 유리할 테니까.”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크리스틴의 포크가 현저히 느려졌다.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버지의 말에 귀 기울였다.

“한데 일이 꼬여도 한참 꼬였어. 샤트린 공주가 저토록 드러내 놓고 우리 가문을 적대시한다면, 우리로서는 공주를 포기하고…… 1왕자 전하와 가족이 되는 수밖에.”

“네?”

“크리스틴, 네게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이라뇨?”

“왕비가 될 수 있잖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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