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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64/319)

59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추종자들이 달려와 크리스틴에게 무슨 일이냐며, 괜찮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크리스틴은 애써 고개를 저었지만 떨리는 손과 굳은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크리스틴이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녀를 달래던 가신 가문의 자제가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기 그 평민 계집 아냐?”

“그러네요. 그 건방진 시녀.”

평민 계집. 건방진 시녀.

크리스틴은 곧바로 율리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고개를 홱 들어 올리고 추종자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1왕자궁 밖, 중앙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 율리아가 서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지난번처럼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율리아는 느긋한 속도로 두 명의 시녀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크리스틴의 시선을 느낀 건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는 웃었을까.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고, 얼굴 가득 비웃음을 머금었을까. 크리스틴은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이게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패자는 자신이었다.

열등감이 들끓어 이성을 마비시켰다. 해결책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레위시아 왕자궁에서도 이번 연회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카루스의 등장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이득을 챙긴 레위시아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에겐 마조람의 위기가 곧 축제였다.

“진짜 우스운 일이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친제국파의 상징이었는데, 막상 제국의 진짜 권력자가 나타나니까 아무것도 못 하고 구경만 했다는 게.”

레위시아의 말엔 감출 수 없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코코가 턱을 괴고 말했다.

“해방군은 알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은 반제국파가 아니라, 친제국파에게 도움이 되어 왔다는 걸.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죠.”

해방군의 존재는 마조람 후작에게 장작과도 같았다. 그들이 불쑥 튀어나와 사람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면, 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오르테가는 친제국파에 힘을 실어 주었다.

해방군이 정말 오르테가의 독립을 원하는 자들이라면 무척 분노해야 마땅한 이야기였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해방군은 바이칸의 신임 제독이 국왕의 딸과 처음 만나는 날 시위를 벌였고, 오르테가에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건 마조람과 친제국파에서 마땅히 막았어야 하는 일이었다. 우습게도 사람들은 반제국파가 아니라 친제국파를 욕했다.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거냐고, 해방군이 활동한 지도 꽤 오래됐는데 그동안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했냐고 비난했다.

“난 마조람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벌써 기대돼.”

“저도요.”

대화를 이어 가던 레위시아와 코코가 동시에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알렉사도 코코를 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조람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우리 율리아’라면 예측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율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결혼시키겠죠.”

“누구랑 누구를?”

“1왕자 전하와 크리스틴이요.”

“뭐어?!”

레위시아가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그러곤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닫고, 다시 벌렸다가 닫았다.

코코가 하, 기막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아직 자식이 하나씩 남아 있었지.”

“진짜 싫다…….”

레위시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난다고 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 두 사람의 결혼이라니, 세상은 곧 멸망할 거야. 오르테가에서 제일 더러운 가문의 딸과 제일 지저분한 왕가의 아들이 결혼이라니. 추접스럽고 역겨워. 코코, 우리 멀리 도망가서 살까? 너랑 나랑 같이 율리아랑 알렉사 데리고, 저 먼 남부의 섬을 하나 사서 우리끼리 살자.”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도망치려면 혼자 가세요. 우리는 싸우기로 했으니까.”

“왜 내 시녀들은 이렇게 하나 같이 겁이 없을까.”

레위시아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

율리아는 그를 안쓰럽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코코와 알렉사가 양쪽에서 레위시아의 팔을 잡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코코가 냉정하게 말했다.

“결혼은 효과적이에요. 역사 속 권력자들이 왜 그렇게 결혼을 많이 하고, 자식들까지 이용해서 혈연을 맺어 왔는지 알잖아요.”

“알지.”

“마조람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면서 친제국파의 결속을 다지고, 왕가와 마조람의 동맹을 단단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원래는 바실리와 샤트린 공주님이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불가능해졌으니까요.”

“하…… 역시 돌파구는 그것뿐인가.”

이들이 아는 걸 마조람 후작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후작은 오래전부터 바실리를 샤트린 공주와 결혼시켜서 왕의 딸과 가문의 후계자를 한데 엮는 그림을 그려 왔다.

그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그 일을 바라왔는지 안다면, 바실리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샤트린에게 파혼 선언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어차피 이제 다 틀렸지.’

율리아의 입에서 작은 과자가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남은 건 크리스틴과 1왕자를 결혼시키는 건데, 그러려면 후작은 후계자를 다시 세워야 해.’

왕비는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 두 사람의 결혼은 1왕자가 왕위 후계에서 물러나거나, 크리스틴이 작위 승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1왕자가 왕위를 양보할 리 없으니, 결국 희생되는 건 크리스틴이었다. 마조람 후작도 그렇게 명령하리라.

‘바실리한테 한 번쯤은 고맙다고 할 걸 그랬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구르고 굴러 이토록 큰 눈덩이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율리아는 손가락에 묻은 설탕 가루를 냅킨으로 닦아 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심란해서 공부할 기분이 아니라는 레위시아를 어르고 달래서 제왕학 수업까지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율리아는 트루디가 받아 놓은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온도는 괜찮으세요? 입욕제 향기는 어때요?”

“좋아.”

“제가 등 밀어 드릴게요!”

트루디는 요즘 율리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하이에나에게 그녀의 명령을 전달했을 때는 꼼짝없이 죽게 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진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율리아의 말대로였다.

트루디는 눈치가 빠르고 감이 뛰어났다. 그녀의 본능이 율리아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녀들도 오늘 연회에서 있었던 일로 시끄러워요. 제국에서 오신 분이야 뭐, 잘 모르지만…….”

“그래?”

“1왕자궁에서 일하는 하녀가 그러는데요. 거기 전하께서 엄청 화가 났대요. 마조람 후작가의 아가씨께 나가라고 막 소리를 지르고, 당분간 왕궁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했대요.”

하녀들의 눈과 귀는 왕궁 어디에나 있다. 율리아는 또 한 번 그 사실을 되새기며, 트루디에게 물었다.

“공주님은 어떻대?”

“어휴, 말도 마세요. 공주궁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래요. 샤트린 공주님이 시녀님들한테 선물이라면서 보석함을 열고, 가까운 귀족들한테는 밤새도록 놀다 가라고 귀빈실을 열어 줬다고.”

“그렇구나.”

율리아는 트루디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있었으나, 그다지 큰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트루디가 물어오는 소식들은 율리아가 이미 알고 있거나, 그러리라 예상했던 것뿐이었으니까.

율리아가 심드렁해지자 마음이 조급해진 트루디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1왕자궁에서 일하는 하녀들도 참 불쌍해요. 1왕자 전하께서 기분이 나쁠 때마다 모두 궁 밖으로 쫓겨난다고 들었거든요.”

“쫓겨난다고?”

율리아가 작은 흥미를 보였다. 그러자 신이 난 트루디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일찍 쉬러 갈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니야? 이렇게 물었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일을 두 배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안됐네.”

“1왕자 전하는 사생활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낯선 사람은 사적인 공간에 발도 못 들이게 한대요. 진짜 믿을 수 있는 하녀나, 오래 일한 하녀한테만 맡긴다나요. 다들 그렇게 되고 싶어 안달이에요.”

“봉급을 많이 주나 보다.”

“네, 두 배나 된대요. 일은 절반인데 봉급이 두 배라고,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트루디가 헤헤 웃었다. 율리아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니 마음이 놓였다.

이 평민 시녀님은 쓸모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인 것 같다. 트루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왕궁에 친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 이런저런 소문을 주워 모았다.

“고마워, 트루디.”

율리아가 목욕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트루디가 욕실을 정리하는 동안 몸을 말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욕실 정리를 끝내고 돌아온 트루디에게 작은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가져가.”

“이, 이, 이게 뭐예요?”

트루디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율리아는 알면서 뭘 묻느냐는 얼굴로 말했다.

“금화.”

“이건 왜 주시는데요? 설마 절 내쫓으시려고요? 아, 안 돼요. 시녀님, 저 이제 진짜 시녀님 편이에요. 아직 궁내부 관리님한테는 보고도 안 했고, 그때가 되면 시녀님이 시키는 대로 말할 생각이었어요.”

트루디가 애절하게 매달렸다. 율리아가 내민 금화 주머니를 거절하며, 이런 건 안 줘도 되니까 쫓아내지 말라고 애원했다.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건 수고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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