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 *
1왕자의 초대장을 가져온 시종은 샤트린에게 뺨을 얻어맞은 채 공주궁에서 쫓겨났다.
덕분에 연회 분위기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저들끼리 모여 눈치만 살폈고, 샤트린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쁜 건 결국 시녀들이었다. 샤트린의 시녀들이 곁에 바짝 붙어서 온갖 감언이설과 다정한 위로로 공주를 달랬다.
코코가 그걸 보며 이죽거렸다.
“안 봐도 뻔하네. 1왕자궁에선 분명 샤트린 공주가 난데없이 시종을 폭행했다고 떠들어 대고 있을 거야. 크리스틴 그 영악한 계집애가 이 좋은 먹잇감을 놓칠 리가 없으니. 공주는 왕위 후계로 거론되기에는 폭력적이고,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하면서 말이지.”
코코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알렉사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글쎄요.”
다른 사람은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고 있는데, 유독 율리아만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냥 어쩌다 한 번씩 연회장 입구를 슬쩍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연회장 바깥에서 파도처럼 소란이 밀려왔다.
처음엔 당황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귀족들이 내뱉은 기쁨 섞인 비명이, 마지막엔 감격에 겨운 시종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국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화들짝 놀란 코코가 욕설을 내뱉었다가 재빨리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알렉사의 게슴츠레한 눈도 휘둥그렇게 뜨여 있었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샤트린과 레위시아만큼은 아니었다.
“아버지!”
시녀들에 둘러싸여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던 샤트린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연회장 입구로 달려갔다. 레위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국왕이었다.
왕은 울먹이며 달려온 샤트린이 팔에 달라붙자, 평소보다 훨씬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딸을 달랬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부녀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샤트린은 왕의 팔을 꽉 끌어안고 보란 듯이 턱을 들어 올렸다.
샤트린 공주의 연회를 택한 걸 후회하던 귀족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왕의 곁으로 모여들어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말을 걸려 애썼다.
장례식장이나 다를 바 없었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반전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왕과 그의 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율리아만은 다른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루스.’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이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미소가 드문 사람이라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린 듯 어울리는 제복에 검은 망토, 국왕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카루스가 왕의 뒤에서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자마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다.
존재감이란 건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율리아는 눈앞에서 펼쳐진 불공평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샤트린의 화려한 드레스나 국왕의 권력, 레위시아의 외모도 그의 상대가 되지는 않았다.
카루스 란케아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인력이 있었다.
왕궁에서 만난 카루스 란케아는 양 떼 사이에 등장한 한 마리 맹수 같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흔들리는 망토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불같은 성미의 샤트린조차 카루스를 앞에 두고서는 겁 많은 고양이처럼 움츠러들었다.
공주가 왕에게 바짝 달라붙어서 물었다.
“아버지, 이분은…….”
“인사해라. 카루스 란케아, 바이칸 제국의 무혈 제독이다.”
카루스 란케아.
바이칸의 무혈 제독.
누군가 작게 비명을 지르고, 이내 연회장이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카루스는 그 고요를 기꺼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바이칸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이제부터 한동안 그가 상대해야 할 오르테가의 귀족들이 화려한 차림새를 뽐내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 샤트린 공주의 연회장은 극적인 변화를 두 번이나 겪었다.
국왕과 제독의 등장으로 한 번, 그리고 1왕자궁에서 공주궁으로 넘어온 귀족들에 의해서 한 번.
박쥐 같은 귀족들이 무혈 제독의 얼굴을 보겠다며 공주궁으로 몰려들었을 때, 샤트린은 연회장의 문을 닫고 그들을 받아 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레위시아의 설득에 못 이겨 문을 열고 짧게나마 환영 인사를 던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경연도 아닌데 승자와 패자가 있었다. 승자는 당연히 샤트린이었고, 패자는 1왕자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 일에 대해 거의 떠들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카루스에게 쏠려 있었다.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이란 건 그만큼 오르테가에 중요한 자리였다. 바이칸 제국이 왕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방식의 외교를 하려 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인사하게. 내 하나뿐인 딸이자, 이 나라의 유일한 공주일세.”
국왕이 샤트린의 손을 잡고 카루스에게 이끌었다. 공주에겐 한 톨의 관심도 없던 카루스가 그제야 시선을 내려 샤트린과 눈을 마주쳤다.
“샤트린 오르테가입니다.”
“카루스 란케아입니다.”
딱히 존중해 줄 필요 없는 속국의 공주지만, 카루스는 예의를 지켰다. 국왕이 은근히 기뻐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멀리서 율리아가 그를 보고 있었다.
“제 연회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독님, 실례가 안 된다면 춤을 신청해도 될까요?”
그래서 샤트린이 그를 홀린 듯 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카루스는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율리아가 있는 방향에다 대고 말했다.
“기꺼이.”
그건 그녀가 그에게 했던 대답이었다.
카루스가 샤트린의 손을 잡고 연회장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샤트린도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카루스의 곁에 서니 한없이 여리게만 보였다.
국왕은 자연스럽게 레위시아의 곁에 남았다. 아들을 어색해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이 두 걸음만큼 떨어져서 한마디 말도 없이 연회장을 지켰다.
바이칸의 신임 제독이 오르테가 왕국에 호의적인 사람이라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제국이라면 치를 떠는 반제국파를 온건하게 만들거나, 뒤에서 손가락질당하는 친제국파에게 힘을 실어 줄 수도 있었다.
카루스는 등장만으로 오르테가 왕궁을 들썩이게 했다.
“무혈 제독이 우리 공주님과 춤을 추다니. 내 생에 이런 걸 구경하게 되는 올 줄이야.”
“남부는 황제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된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제독을 바꾼 거지?”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남자로군. 숨이 막혀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어.”
귀족들이 카루스를 흘깃거리며 수군댔다. 그들은 이 모든 게 한 사람의 시녀 때문에 일어난 일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한 기사가 다급히 나타나 왕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해방군이 왕궁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오르테가 바다에서 제국군을 쫓아내고 왕국을 진정한 독립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며…….”
“뭐라고?”
기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카루스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샤트린의 손을 잡고 느리게 춤을 추던 그가 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아주 낮은 소리로 물었다.
“해방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