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뭐? 왜!”
“이렇게라도 눈길을 끌어야 할 거 아냐. 평생 사이가 나빴던 이복 남매가 서로를 파트너 삼아 춤이라도 춰야지. 레위시아, 설마 말로만 날 지지하려던 거야?”
“춤을 왜 춰. 너랑 왜. 난 널 지지하려는 거지, 춤을 추려는 게 아니었다고.”
“나도 싫어. 그래도 참아. 왕족은 철들자마자 싫어하는 사람이랑 춤추는 것부터 배우잖아.”
그건 그래.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는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샤트린의 손을 잡았다.
샤트린이 레위시아를 데려가 버리는 바람에 한가해진 코코가 알렉사와 율리아 곁에 나란히 섰다.
악마 시녀 코코의 악명을 익히 아는 귀족들은 알렉사의 곁을 맴돌면서도 점잖게 인사를 건넬 뿐, 짓궂은 농담이나 무례한 질문을 건네지 못했다.
“샤트린 오르테가 공주 전하와 레위시아 오르테가 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빈말로도 닮지 않은 두 왕족이 나란히 연회장에 들어서자, 몇 되지 않는 귀족들이 과장되게 기뻐하며 손뼉을 치고 인사를 건넸다.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샤트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1왕자궁에서 시종이 도착했다.
“샤트린 오르테가 공주 전하께 보내는 1왕자 전하의 전언입니다.”
시종은 샤트린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두 손 위엔 황금색 문양이 번쩍거리는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초대장입니다.”
“뭐라고?”
샤트린의 눈동자에 가늠할 수 없는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레위시아가 입 모양으로 ‘큰일 났다’라고 중얼거렸다.
“양쪽에서 연회가 열려 귀족들이 혼란스러워하니, 공주 전하께서 넓은 마음으로 양보하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공주께서 1왕자님의 궁으로 오시면, 이번 연회는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되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닥쳐라! 나보고 박쥐처럼 거기 끼어 놀다 가란 말이냐?”
샤트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1왕자가 보낸 시종은 잔뜩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주인이 내린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하여 이 초대장을 보내노라고…….”
철썩! 더는 참지 못한 샤트린이 결국 손찌검을 했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낀 샤트린의 손이 시종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쳤다.
뺨에 긴 상처가 남을 만큼 세게 얻어맞은 시종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샤트린을 바라보았다.
“이리 다오.”
샤트린이 시종의 손에서 초대장을 빼앗았다. 그러곤 박박 소리가 나도록 잘게 찢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구둣발로 짓밟았다.
시종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건 초대장을 보낸 1왕자에게도 크나큰 모욕이었다.
“가서 전해라. 마조람의 계집애가 내 형제의 귀에 어떤 말로 속살거렸는지는 몰라도, 이 샤트린 오르테가를 적으로 만든 걸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노라고!”
난 몰라.
레위시아가 살려 달라는 얼굴로 자신의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 * *
아들과 딸이 개처럼 서로를 물어뜯으며 싸우고 있을 때, 국왕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다시 말해 보아라.”
“전하.”
“다시 말해 봐!”
왕의 발치에는 한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부복해 있었다. 그는 왕의 보좌관 중 가장 뛰어난 자로, 왕에게 최근 남부 함대의 제독이 바뀌었다는 비보를 전하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고?”
“그렇습니다. 황제의 전령이 국경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아직 공식적인 서한을 받은 것은 아니니, 그냥 다음 기회에 만나자고 하시면…….”
“지금 나더러 무혈 제독을 쫓아내란 말이냐?”
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보좌관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카루스 란케아라는 이름의 남자가 왕에게 접견을 신청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황제의 두 번째 기사이며 리바이어던 함대와 기사단의 우두머리이고, 무혈 제독이란 칭호로 이름 높은 바이칸의 영웅이 이 남쪽 오르테가에 왜 나타났단 말인가.
그래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름과 생김새는 물론이거니와 그가 성가셔하는데도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수차례 신원을 확인했다.
한데 진짜 카루스 란케아였다.
무혈 제독이었다.
그가 품에서 리바이어던 기사단의 단장이자 함대의 지휘관임을 증명하는 문서와 패를 꺼내었을 때, 왕의 보좌관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싶었다.
“중앙 접견실을 열어라. 서기관도 셋 이상 불러.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국왕의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는 바이칸 제국의 전쟁 영웅이 오르테가 왕궁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부터 시커먼 낯을 하고 있었다. 꼭 황제의 검 끝이 목젖을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국왕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카루스 란케아를 오르테가 왕국에 호의적인 상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의 등장을 이용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없는지, 이 일이 국왕인 자신에게 호재인지 악재인지, 마음이 복잡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카루스는 중앙 접견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짙은 색의 해군 제복 위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소파 한쪽에 검대를 풀어놓곤 그 위에 한 손을 올리고 있었다.
햇살 쏟아지는 아름다운 접견실에 배부른 맹수가 한 마리 갇혀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카루스와 함께 나타난 바바슬로프와 덩치 큰 기사들 때문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대륙에서 가장 이름 높은 리바이어던 기사단의 일원이었고, 오르테가의 병사들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자였다.
“제독님, 차를…….”
나이 지긋한 왕의 시녀들이 나타나 그에게 다과를 권했다.
카루스는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노련한 시녀들의 접대를 받으며 느긋하게 왕을 기다렸다.
‘율리아는 어디서 뭐 하고 있으려나.’
카루스는 국왕을 기다리면서도 율리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맥스웰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왕궁 안에서 두 왕족이 유치한 알력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같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율리아라면 분명 뒤에서 누군가를 조종하고 있겠지.’
그게 레위시아 2왕자인지, 아니면 샤트린 공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내민 손을 잡았지만, 그녀가 왕궁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자세히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국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왕의 보좌관이 먼저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카루스는 그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곤 접견실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오르테가의 국왕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처음 뵙겠습니다. 카루스 란케아입니다.”
카루스가 소파에서 일어나 국왕이 내민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의 손은 거칠고 큰데, 국왕의 손은 나이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두 번의 헛기침을 내뱉은 국왕이 뻣뻣한 자세로 상석에 앉았다.
카루스는 같은 자리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소식은 들었소. 황제 폐하께서…… 남부 함대의 책임자를 새로이 결정하셨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연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전의 제독도 무척 성실하고 훌륭한 지휘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소만.”
국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한 소리였으나, 하필 그 말로 카루스의 비웃음을 사고 말았다.
“훌륭한 지휘관은 아니었지요. 비자금을 착복하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이제부터 조사해 볼 예정입니다. 폐하께선 남부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시니, 왕께서도 흔쾌히 협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오.”
국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루스는 그런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겁이 많은 자라고 듣긴 했는데, 황제에 대해 말할 때마다 정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바이칸의 황제는 황도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기에 두 사람이 마주쳤던 건 꽤 오래전의 일일 텐데, 왕은 아직도 황제를 과거와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카루스는 황제를 주군이라 여기며 믿고 따랐으나, 한 번도 두려움에 지배당한 기억은 없었다.
“그럼 앞으로는 제독이라 부르겠소.”
“오늘 방문한 건 다름이 아니라, 폐하의 전령이 도착하는 날에 맞춰 남부 함대 출정식을 하기 위함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래, 그렇지. 여기는 오르테가 해상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카루스의 눈치를 보던 왕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빼고 물었다.
“환영 연회야 출정식 이후에 제대로 하면 될 테지만……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오?”
“왜 그러십니까?”
“지금 연회가 한창이라 그렇소이다.”
연회라. 카루스가 다시 율리아를 떠올렸다.
“왕자궁과 공주궁에서 연회가 한창일 텐데, 제독 또래의 젊은이들도 많을 테고.”
“그렇습니까.”
뻔하지만 효과적인 수였다. 카루스는 국왕의 노림수를 알면서도 흔쾌히 넘어가 주었다.
“이왕이면 공주궁으로 가 보겠습니다.”
율리아가 맥스웰을 통해 말했다.
‘연회가 있는 날, 샤트린 공주의 궁으로 와 주세요.’
카루스가 한쪽 뺨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