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날 밤 율리아가 맥스웰을 찾았다.
“어이구,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시녀님하고 나,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무슨 일 있어요?”
“황제 폐하의 전령이 티타니아를 넘었다고 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카루스 님이 그 소식을 전해 주라고 하셨죠.”
그랬구나. 율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와 달라고 한 거라며, 그녀가 맥스웰에게 말했다.
“카루스 님께 전해 주세요.”
“뭐라고 하면 될까요.”
“황제의 전령이 불쾌한 등장을 할 예정이라면, 카루스 님은 오르테가의 손님이 되어야 한다고요.”
“그게 무슨…… 그냥 그렇게만 전하면 됩니까?”
“국왕을 직접 찾아 전령이 올 거란 예고를 해 주세요.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카루스 님을 통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세요. 친제국파인 마조람 후작의 세력 확장을 막으면서, 국왕이 후작에게서 독립적으로 제국과 소통할 수 있는 줄이 되어 주시는 거예요.”
“허…… 허허.”
“연회는 일주일 뒤예요.”
맥스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은 좀 그렇긴 한데, 우리 대장보다 시녀님을 먼저 만났으면 분명 동업 제안을 했을 것 같네요. 이제 시녀님이 시키는 일은 절대 의심하지 말고 따라야겠어요.”
“그런가요. 안 그래도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오르테가 외곽 동쪽 부둣가로 가면 작은 보육원이 있어요. 거기 가면 원장이 귀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든 작은 공부방이 있거든요.”
“보육원이요?”
맥스웰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네. 거기서 뭘 좀 찾아서 어떤 사람에게 가져다주세요.”
율리아가 맥스웰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맥스웰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웃음기가 솟아났다.
* * *
연회 당일이 되었다. 율리아는 뒤늦게 도착한 초대장을 손에 들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코코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똑똑한 애가 알면서 뭘 물어. 연회 초대장이잖아. 샤트린 공주가 이제야 너를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제가 거길 왜 가요? 평민으로라도 머릿수를 꼭 채워야겠대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왕궁 공식 연회가 아니니까 초대장만 있으면 아무나 참석할 수 있어. 왕궁 규율에 평민은 연회장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레위시아 전하의 측근 시녀니까, 사실 자격이야 충분하지.”
“전 안 가요.”
“가야 할걸.”
“왜요?”
“알렉사는 가잖아. 온갖 승냥이들이 그 애 옆에 달라붙어서 침도 흘리고, 코도 흘리고, 온갖 끈적끈적한 욕망을 질질 흘리고 다닐 텐데. 누가 그걸 막아 줘?”
“코코가…….”
“그럼 네가 왕자님 파트너 해.”
“갈게요.”
아무래도 혼자 빠지는 건 안 될 일인 것 같았다. 코코의 말대로 연회에서 공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알렉사일 텐데, 귀족들의 사교 문화에 무지한 그녀가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 누군가는 동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율리아는 하녀 트루디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었다. 언젠가 코코에게 선물받은 짙은 녹색에 검은색 레이스가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트루디가 입에 발린 칭찬을 쏟아 냈다.
“율리아 시녀님, 너무 아름다워요. 다들 깜짝 놀랄 거예요. 매일 수수한 크림색 원피스만 입으시다가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으니까 꼭 다른 사람 같아요!”
율리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드레스를 다 입은 그녀는 샤트린에게 선물받은 장신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보석함에 손을 뻗었다.
거기엔 자신이 하기엔 너무 화려한 것들이 많았다. 굳이 남들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율리아는, 그중에서 가장 단순해 보이는 검은색 귀걸이와 얇은 목걸이만을 챙기고 보석함을 닫았다.
“준비 다 했니? 가자.”
코코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화려한 드레스에 반짝반짝 빛나는 장신구로 한껏 치장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예쁘다고 칭찬하자 코코는 쑥스러웠는지 코웃음 치며 못 들은 척했다.
“알렉사는요?”
“말도 마. 내 옷 고르는 것보다 걔 옷 고르는 데 시간을 더 썼어. 내가 진짜 뭘 입혀도 똑같아 보이는 애는 보다보다 처음 봤어.”
코코가 투덜거릴 때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하녀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도대체 왜 그런가 싶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하녀들 뒤에 삐딱하게 서 있는 알렉사를 발견했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으음.”
알렉사는 아름다웠다. 굳이 말하자면, 아름다운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귀엽거나 사랑스럽거나, 어여쁘지는 않았다.
그녀는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겨 늘어뜨리고, 몸에 적당히 달라붙으면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드레스를 입었다. 어깨부터 가슴까지는 실루엣이 드러나고, 그 아래로는 그냥 뚝 떨어지는 옷이었다.
짙은 피부에 어울리는 은빛 천에 상처투성이인 팔엔 긴 장갑을 꼈다.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눈매가 독특해 나른하고 농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누가 쟤를 스무 살이라고 생각하겠냐고, 코코가 중얼거렸다.
준비를 마친 율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세 명의 시녀가 연회장에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시녀님들…….”
하녀들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렸다.
불꽃처럼 화려한 빨강에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휘감은 코코, 어두운 녹색과 검은색으로 무장한 율리아, 그리고 사교 연회가 처음인 주제에 백 년 묵은 구렁이처럼 여유로워 보이는 알렉사까지.
우리 궁의 시녀님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다른 궁의 시녀님들이 백 명 정도 몰려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하녀들은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샤트린 공주의 연회장은 한적했다.
예상했던 일인데도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는지, 레위시아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코코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샤트린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던 귀족들이 전부 1왕자와 크리스틴이 주최한 연회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백작과 그의 두 아들이 1왕자궁으로 갔다고 합니다.”
“……일가의 귀족들이 모두 그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선물을 보내긴 했는데.”
“버려.”
샤트린이 이를 갈았다.
“내 궁에 온다고 해 놓고, 감히 날 엿 먹여? 이것들이 왕족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진정해, 샤트린.”
“레위시아, 너 같으면 진정하게 생겼어? 형제라는 인간이 하는 짓이 고작 이 정도라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왕위 후계? 웃기지 말라고 해.”
잔뜩 흥분한 샤트린이 귀족들 앞에서 오빠인 1왕자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여동생이 친구들이랑 파티 좀 즐기겠다는데, 어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이따위 장난질을 해? 하! 경연에서 한 번 이겼다고 이 정도면, 내가 그 위치까지 올라가면 아주 볼 만하겠어. 안 그래?”
“말조심해. 여기 너만 있는 거 아니니까.”
“도대체 누가 생각한 거지? 오빠는 이런 유치한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라도 다른 방법을 썼을 거라고.”
샤트린의 분노가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율리아는 공주에게 길을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흘깃 바라보는 레위시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레위시아가 피식 웃으며 정보를 흘렸다.
“그걸 몰라서 묻냐. 1왕자궁에 누가 들락거리는지 몰라?”
“뭐, 크리스틴 마조람?”
“왕비 전하를 움직인 건 1왕자이지만, 마조람 후작 부인을 움직인 건 그 딸이겠지. 오르테가 사교계에서 마조람 후작 부인보다 입김이 센 여자가 어디 있다고. 부왕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까지 빼앗으려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연회를 열어야 한다고 설득했겠지. 뻔하잖아.”
“빌어먹을 마조람!”
샤트린이 들고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아름다운 유리잔이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나고, 잔뜩 겁에 질린 하녀들이 그걸 치우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전하, 진정하세요.”
“크리스틴 마조람이 재수 없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요. 가문만 믿고 저가 무슨 왕족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게 영 꼴불견이긴 했죠.”
율리아는 샤트린의 시녀들이 공주를 달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크리스틴이 친구가 많은 타입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공주궁의 시녀들에게까지 저런 평가를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게 다 그 재수 없는 마조람 계집애 때문이란 말이지…….”
그 순간 샤트린의 머릿속에서 크리스틴은 천하에 재수 없는 계집애가 되었다.
뜻밖의 성과였다. 율리아는 샤트린을 레위시아가 자라는 동안 방패가 되어 줄 왕족으로 골랐다.
한데 다시 생각해 보니 단순 방패막이로만 쓰다가 버리기엔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샤트린은 국왕의 사랑을 듬뿍 받는 딸이었고, 그녀의 불같은 성격을 추종하는 자들도 적게나마 거느리고 있었다.
“이제 좀 진정해. 네가 화내는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1왕자를 버리고 너한테 와 준 귀족들을 위해 연회를 진행해야 할 거 아냐. 주최자가 계속 유리잔이나 집어 던지고 있어서 되겠냐.”
“레위시아.”
“왜?”
“이리 와.”
샤트린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꼭 빌려 간 돈을 달라는 것 같은 모양새라, 레위시아가 눈살을 확 찌푸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왜?”
“오늘 내 파트너는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