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샤트린 공주님은 야망이 크신 분이에요.”
“왕궁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연회에 알렉사를 동석시켜서 귀족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자랑한다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분명히 다른 노림수가 더 있을 거예요. 전하, 혹시 샤트린 공주님이 연회 날짜가 언제인지 말씀하셨나요?”
“어…… 최대한 빨리하겠다고 했는데. 가능하다면 여름이 오기 전에.”
“또 다른 건요? 초대 손님이라던가.”
“글쎄다. 초대 손님이야 뭐 거기서 거기지. 편들어 주는 귀족들이랑 친구들, 시녀 가문, 뭐…… 아! 그러고 보니.”
레위시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부왕을 초대한다고 하더라고.”
“네?”
율리아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레위시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녀에게 설명했다.
“꿈도 크지. 부왕은 국가 규모의 연회나 중요한 행사가 아니고서야 쉽게 움직이는 분이 아니야. 왕의 걸음이 향하는 곳에 권력이 모인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고. 가뜩이나 후계 싸움이 치열해졌는데…… 샤트린이 아무리 떼를 써도 부왕을 움직일 수는 없을걸.”
“만약에 공주님께 묘수가 있다면요?”
“묘수?”
“공주님이 연회에 참석한 가문의 남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흘리면…….”
율리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위시아가 물고기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코코도 들고 있던 찻잔을 콱 소리가 나도록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율리아가 한결 단호해진 얼굴로 말했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 최소한 두 분 중에서 한 분은 공주님의 연회에 참석하셔야 할 거예요.”
그게 샤트린의 노림수였다. 코코가 드물게 샤트린에게 감탄했다며 중얼거렸다.
“공주님은 진심이구나. 이 싸움에서 질 생각이 없어. 이거, 1왕자와 마조람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벌써 기대가 되는데?”
율리아는 그 이후의 일까지 예측했다.
“그야 같은 날 연회를 열겠죠. 그쪽엔 왕비 전하와 후작 부인이 있잖아요. 1왕자는 공주님의 연회를 어떻게든 망치고 싶을 테고, 크리스틴은 이번 기회에 가문의 힘을 과시하고 싶을 테니까요.”
율리아의 말이 옳았다. 샤트린이 주최한 연회에 국왕 부부가 등장한다는 건 1왕자에게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가뜩이나 레위시아의 지지 선언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 샤트린이 명예 결투 경연에서 승리하면서, 1왕자가 샤트린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크리스틴을 불러 어떻게든 해보라고 윽박질렀다.
“마조람 후작이 너를 내게 데려올 때, 뭐라고 말했는지 아느냐? 총명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서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는 여식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네가 바실리 대신 내 곁을 지키게 된 뒤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질 않으냐!”
“전하, 화를 거두세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리는지 아느냐? 말해 봐, 크리스틴. 브레웨 아카데미 4년 수석이라는 게 조작됐을 수도 있다는 건 무슨 소문이지?”
1왕자의 일갈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언젠가부터 율리아가 크리스틴에게 일부러 져 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특히 또래 귀족들 사이에선 그 이야기가 은밀한 화젯거리였다.
입술을 깨문 채 부들부들 떠는 크리스틴을 보고, 1왕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내가 그딴 헛소문에 휘둘린다는 말은 아니야. 브레웨 아카데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 평민이 마조람 후작이 오르테가 최고의 스승만을 붙여 가르친 너보다 뛰어날 리가 없으니.”
뛰어났다. 율리아는.
“샤트린이 부왕에게 정성스러운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더군. 이번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 중에서 남편감을 고르겠다고, 은근슬쩍 그런 농담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어머니도 말씀은 안 하셨지만 두 분 중에 한 분은 그 연회에 참석하실 생각인 것 같고.”
“전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보란 말이다. 샤트린 그 망아지 같은 것이 유치하게, 이 나를 연회 따위에 안달하게 만들다니.”
1왕자는 지난 경연에서 샤트린에게 패배하고도 여전히 여동생을 우습게 여겼다. 크리스틴은 그 점을 지적하려다가 그의 드높은 자존심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틴은 율리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연회가 율리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빈틈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샤트린과 공주의 시녀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낸 것이리라.
그래도 율리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레위시아 2왕자가 샤트린 공주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뒤부터, 크리스틴은 늘 율리아를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자꾸만 그 흉측한 꽃바구니가 생각났다. 그건 분명 선전포고였다. 크리스틴에게 있어 이 싸움의 상대는 레위시아 왕자나 샤트린 공주가 아니었다.
율리아 아르테였다.
“아직도 생각하고 있나?”
1왕자가 보채듯 물었다. 크리스틴은 가슴에서 차오르는 불쾌한 기운을 갈무리하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회를 여세요, 전하.”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정면 돌파하면 되는 일이니까.
“연회라니?”
“저희 어머니와 왕비 전하께 부탁해서, 큰 연회를 여세요. 샤트린 공주 전하께서 주최하는 연회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뭐? 그게 무슨…… 애들 싸움도 아니고.”
바로 그거였다. 이번 일을 애들 싸움으로 만드는 것. 크리스틴은 샤트린의 노림수를 유치한 애들 다툼으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께서 공주님의 연회에 참석하는 걸 막을 수 있어요. 왕비 전하께서는 당연히 전하의 연회에 오실 테고, 국왕 전하는 두 분의 다툼에 끼어들 수 없으니 차라리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거예요.”
“귀족들은 이 일을 진지한 후계 경쟁이 아니라 단순 화풀이 정도로 여기겠지.”
“바로 그거예요.”
유치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샤트린이 반격할 수도 없을 만큼 단순한 정면 돌파. 1왕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샤트린의 연회 날짜가 확정되었다. 공주가 보낸 초대장이 오르테가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왕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교 많은 샤트린이 국왕의 침전을 들락거리며 매일 그의 비위를 맞춘다는 소문이 돌았다.
국왕은 하나뿐인 딸의 정성에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졌다. 그는 바실리 마조람과의 파혼 이후 결혼에 부정적이었던 샤트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가장 기꺼워했다.
이대로라면 국왕이 샤트린의 연회에 참석하는 건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은 각을 재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1왕자의 눈 밖에 나더라도 공주의 연회에 참석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는 자들이 많았다.
특히 결혼 적령기의 아들이 있는 귀족들은 어떻게든 공주의 초대장을 구하려 안달이었다. 덕분에 공주궁의 시녀들은 매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통상 왕족의 초대장을 관리하는 건 측근 시녀였기에, 그들에게 바쳐지는 뇌물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곧이어, 1왕자와 왕비가 같은 날 연회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네 말대로 됐네.”
레위시아가 이제 놀랍지도 않다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코코도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유일하게 알렉사만이 감탄에 감탄을 더하며 율리아를 치켜세웠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율리아에겐 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냥 남들보다 크리스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뿐이에요.”
상대의 절박함을 평가절하해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크리스틴이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율리아는 샤트린이 연회를 연다고 했을 때부터 크리스틴이 이 유치한 대처법을 쓸 거라고 확신해 왔다.
딸과 아들의 신경전에 피곤해진 국왕은 어느 쪽의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샤트린이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졸랐지만 왕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귀족들은 공주님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거예요.”
율리아가 말했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저쪽엔 왕위 후계에 가장 가까운 1왕자와 왕비, 마조람 후작 가문이 버티고 있다.
샤트린의 지지 세력이라고 해 봐야 레위시아 왕자와 시녀들이 다였다. 숫자로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될 거라고, 율리아가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래도 취소할 수는 없어요. 이미 초대장도 다 돌렸고, 공주 전하는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당분간 아픈 척이라도 해야 하나.”
레위시아가 골치 아프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샤트린의 화풀이를 받아 줄 자신이 없었다. 성질 더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샤트린이었기에, 얼마나 분개하며 날뛸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샤트린에게는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에겐 있었다.
‘카루스.’
‘네가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 나타나 주겠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