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부인, 저는 돌아가지 않아요.”
“보자. 유학을 보내 줄까? 바이칸으로 가고 싶어 했지? 아니면 작은 보육원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서로 자기 얘기만 하는데도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후작 부인은 율리아가 꺼내 놓은 진심을 이해했다.
“그래, 이해해. 그렇다 해도 왜 하필이면 왕궁이니. 우리가 다른 귀족 가문에 너를 추천해 줄 수도 있었잖아. 너는 영리한 애니까, 영지 관리나 상단 업무도 잘했을 거야.”
율리아가 차갑게 되물었다.
“다른 귀족…… 방계의 첩이나 가신의 양녀로요?”
“율리아.”
“후작님은 저를 바깥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어요.”
후작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찻잔을 달그락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닳고 닳은 사람이니 율리아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을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어디로 팔아넘길지 모르니 내 발로 먼저 나온 것이다. 나는 마조람 후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끝끝내 죽이려거든, 지금까지 한 것보다는 더 공을 들어야 할 것이다.
후작 부인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너는 영리한 애지.”
찻물이 식어 그윽하게 솟아오르던 차향도 거의 사라졌다. 후작 부인은 찻잔에 입술만 댔다가 떼곤 율리아에게 말했다.
“시녀는 대부분 평생 한 사람의 왕족에게만 충성한단다. 알고 있겠지?”
“네.”
시녀는 모시는 왕족과 불화가 생기지 않는 한, 평생 고용직이었다. 알아선 안 될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은 죽을 때까지 모시던 왕족을 떠나선 안 된다.
“크리스틴은 내게 너를 꼭 집으로 데려와 달라고 말했어. 아마 내가 널 잘 설득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겠지.”
후작 부인의 손이 테이블 위를 완전히 떠났다. 부인은 율리아처럼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낯선 타인을 대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리아, 약속해 줄래?”
“무엇을 약속해 드려야 하나요.”
“바실리의 아내, 첩, 연인, 가족, 친구…… 그 무엇도 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율리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꽉 다물렸다.
“크리스틴의 친구였다는 소문도 거슬려. 너와 그 애는 태생부터가 다르잖니.”
크리스틴은 제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다. 후작 부인에 대해 잘 아는 건 딸인 크리스틴이 아니라 율리아였다.
후작 부인은 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게 분명했다. 부인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거였다.
바실리와 크리스틴 주위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두 사람이 어떤 희망이나 미련도 품을 수 없도록 완전히 멀어지라는 것.
그런 거라면 이쪽에서 환영이다. 애초에 실종된 바실리가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율리아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약속할게요.”
후작 부인이 살짝 웃었다.
“율리아, 나는 네가 좋아.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너는 내 밑에서 사교와 교양을 배워서 귀족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귀족 남자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귀족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 그런 점도 마음에 들어.”
후작 부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부인은 마지막으로 율리아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 주곤 왕자궁을 떠났다.
* * *
날씨가 더워졌다. 옷감이 얇아지고,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은 사람이 종종 보였다.
왕자궁의 시녀들도 더위를 피해 창가에 모여 앉았다. 과일을 얼려 차갑게 만든 디저트를 먹던 중, 코코가 불쑥 말을 꺼냈다.
“레위시아 왕자님의 시녀가 되려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던데.”
“특별한 재능이요?”
알렉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코코는 은근한 미소를 입에 물고, 율리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레위시아 왕자님은 지금까지 시녀를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거든. 왕비 전하께서 가까운 가문의 영애들을 몇 번이나 소개했는데도 매정하게 거절하기만 했지.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율리아를 데려왔잖아. 왕자님 시녀가 되려면 브레웨 훈장 정도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 많았지.”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기사 시험도 봐야 하는 거냐고, 턱이 높아져서 꿈도 못 꾸겠다고.”
코코의 시선이 이번에는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알렉사가 쑥스러운지 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 표정을 쑥스러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리아와 코코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특이한 눈매라 조금만 시선을 내려도 졸려 보이는데, 그렇게 하니 더욱 게슴츠레해졌다.
“얘 좀 봐. 누가 보면 당연한 얘길 하고 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줄 알겠다…….”
코코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실 근거가 아예 없는 소문도 아니라서, 율리아는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문의 근원지가 왕자궁의 하녀들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율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하녀들이 슬그머니 딴청을 부렸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건 트루디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율리아와 시선이 마주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율리아 시녀님, 맛은 괜찮아요?”
“맛있어.”
“제가 언니들한테 말해 줬어요. 시녀님은 단 거랑 고소한 걸 좋아한다고요. 아이스크림에 검은 곡물가루가 들어가니까 너무 맛있는 거 있죠!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왔니?”
“샤트린 공주님의 궁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잔뜩 주문하길래, 가서 물어봤어요.”
최근 트루디의 친화력은 왕자궁을 넘어 궁내부와 다른 건물에서 일하는 하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공주궁에서 간식으로 뭘 주문하는지도 알아? 하녀들하고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율리아가 조금 감탄하는 얼굴로 트루디를 바라보자, 다른 하녀들이 질 수 없다는 듯 너도나도 말을 보탰다.
“아이스크림 재료가 전부가 아니에요. 과자랑 빵에, 여름도 아직 안 됐는데 향수에 장식까지 얼마나 물건이 많던지.”
“내일은 드레스 상인이 오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공주님이 시녀님들 드레스를 전부 새로 맞춰 준대요.”
“어? 나는 정원사들이 단체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하녀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탤 때마다 율리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코코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차례 시선을 주고받고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연회를 열려고 하네요.”
“연회 준비네.”
아이스크림은 샤트린의 요리사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그걸 외부에서 종류별로 주문했다는 건 손님용이란 소리였다.
정원을 새로 가꾸는 것도, 시녀들의 드레스를 모두 새로 맞춰 준다는 것도, 모두 대대적인 연회에 앞서 하는 행동들이었다.
샤트린은 사치스러운 편이었다. 오르테가 왕궁에 하나뿐인 공주이니, 그동안 샤트린이 누려 온 금전적인 여유는 평민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율리아의 뺨을 때린 걸 사과하는 의미에서 보낸 선물들은 보석에 익숙한 코코마저 질리게 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연회를 열려고 벌써 이 난리지?”
“왜 하필 지금일까요.”
“아무래도 이번 경연에서 승리한 걸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인정받으려나 본데…… 알렉사를 부르겠네.”
율리아도 코코의 의견에 동의했다. 샤트린은 명예 결투 경연에서 1왕자에게 승리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일을 어떻게든 과장해서 소문내고 싶은 것이다.
사실 지금은 조금 애매한 시기였다. 봄은 끝나 가는데 여름은 오지 않았고, 큰 태풍이 올 거라는 뱃사람들의 걱정이 부두에 떠돌았다.
각자 생각에 빠진 시녀들 앞에 시종이 나타났다.
“시녀님들, 왕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레위시아였다. 이날도 일어나자마자 샤트린에게 불려가 한참 동안 시달렸던 그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시녀들에게 공주궁에서 있었던 일을 고자질했다.
“샤트린이 연회를 열겠대!”
코코가 눈썹을 한쪽만 쓱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알아요.”
“명예 결투에서 대전사로 삼았던 알렉사를 꼭 데리고 참석하라는데…….”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승리한 게 되게 자랑스러운가 봐. 귀족들한테 그걸 광고하겠다고 성대한 연회를 열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그것도 알아요.”
레위시아가 버럭 화를 냈다.
“알아도 좀 모른 척해 주면 어디가 덧나냐? 샤트린한테 듣자마자 달려와서 말하는 건데…… 너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나 몰래 샤트린 궁에 첩자라도 심었어?”
코코는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레위시아가 꼬치꼬치 캐물어도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코코를 대신해 율리아가 하녀들이 가져온 소식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자, 레위시아가 짜증을 내며 알렉사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그녀에게 물었다.
“너도 알았어?”
“무슨 말씀입니까?”
“너도 하녀들이 물어온 소식 듣고 바로 저렇게 다 알았냐고.”
“잘 모를 땐 그저 잘 듣기만 해도 중간은 간다고 배웠습니다.”
“너라도 몰라서 다행이다.”
레위시아가 알렉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코코가 그런 그를 비웃었다. 그런데 유독 율리아만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입을 열지 않았다.
하녀들이 움직이며 창가의 빛을 가릴 때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빛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홀린 듯이 율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위시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율리아, 무슨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