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날 저녁, 크리스틴 마조람은 왕궁에서 왔다는 심부름꾼에게 커다란 꽃바구니를 받았다. 화사한 레이스로 포장된 바구니는 크기가 아주 컸고, 향긋하고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그걸 1왕자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한 크리스틴은 수줍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최근 왕위 후계자 후보로 떠오른 샤트린 공주가 경연에서 승리하면서, 1왕자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그는 이 모든 게 바실리 탓이라며 마조람 후작은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크리스틴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브레웨 훈장의 주인이 될 거라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훈장은커녕 크게 도움 되지 않는 그녀에 대한 질책이기도 했다.
그런 왕자가 화를 풀고 화해의 선물로 꽃바구니를 보낸 거라면 정말 안심이었다.
크리스틴은 1왕자와 평생 함께 갈 사이였다. 그게 군신 관계이건, 혹은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건.
“아가씨, 어서 풀어 보셔요!”
“그럴까?”
“어서요, 궁금해 죽겠어요.”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보채는 하녀들 앞에서 레이스 매듭을 풀었다.
“이게…… 뭐야.”
흉측한 꽃바구니였다.
시뻘건 꽃 한 송이를 중심으로 죽은 잎사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가시덩굴이 바구니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차마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심지어 손으로 만질 수도 없었다. 마녀가 독이라도 발라서 보낸 것 같았다.
크리스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녀에게 물었다.
“심부름꾼이 뭐라고 했어? 이걸 누가 보냈다고?”
“그게,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왕궁에서 오셨다기에, 저희는 그냥 당연히…… 아가씨를 흠모하는 신사 분이 보냈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받았어요.”
그 흔한 카드조차 없이 흉악스러운 바구니만 하나 덜렁 보내다니. 도대체 누굴까. 하녀들은 크리스틴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크리스틴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율리아.
고요한 얼굴과 차가운 눈동자. 실력으로 이기고 싶었지만, 신분으로 누를 수밖에 없었던 상대.
“율리아.”
크리스틴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율리아가 확실했다. 이런 걸 보낼 만큼 그녀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사람은 오직 율리아뿐이었다.
이 꽃바구니는 무슨 의미일까.
“싸우자는 거겠지.”
크리스틴은 바구니를 갖다 버리려는 하녀를 손으로 막은 뒤, 그걸 자신의 서재에 갖다 놓았다. 그러곤 오래도록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크리스틴 마조람은 레위시아 2왕자궁에 방문하기 위해 수차례 허락을 구했으나, 매번 알 수 없는 내부 사정으로 거절당했다.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틴이 쓴 편지는 단 한 통도 율리아의 손에 닿지 않았다.
모두 코코가 한 짓이었다.
마조람 후작의 사주를 받은 궁내부 관리들이 왕자궁으로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으나, 코코에게 가로막혀 그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쯤 되자 크리스틴은 왕자궁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이 율리아를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가장 의문스러운 건 레위시아 2왕자의 태도였다.
그는 오르테가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별 존재감 없는 왕족이었다. 언젠가 마땅한 기회가 생기면 혼인 외교의 대상이 될 게 뻔한, 크리스틴으로서는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상대.
레위시아 왕자가 아무리 마조람 후작과 그의 딸인 크리스틴을 미워한다고 해도, 그는 지금까지 그들에게 특별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왜 율리아를 저토록 꼼꼼히 숨겨 준단 말인가. 심지어 율리아는 입궁하기 전까지 왕족이라곤 그림자도 마주친 적 없는 평범한 평민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바실리가 실종된 후 후작 부부가 크게 상심했다는 건 후작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크리스틴도 하나뿐인 오빠가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어쩌면 바실리의 실종에 율리아가 개입한 건 아닐까. 크리스틴의 마음 한구석에서 흐릿한 위화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냐, 아닐 거야. 지나친 비약이야.’
바실리가 마조람 저택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율리아는 왕궁에 있었고, 그 애가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여기까지 숨어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불안하고 꺼림칙했다. 율리아만 생각하며 그랬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고 대화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남편보다 바쁜 후작 부인이 드물게 일찍 저택으로 돌아온 날, 다 함께 모인 식사 자리에서 크리스틴이 말했다.
“어머니, 2왕자궁에서 계속 제 방문 요청을 거절해요. 무슨 방법이 없나요? 오빠처럼 무턱대고 쳐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거긴 뭐 하러 가니.”
“1왕자 전하께서 레위시아 2왕자가 샤트린 공주를 지지했던 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셔요. 직접 가서 부딪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흠, 그렇구나.”
“어머니가 직접 방문하실 수는 없나요?”
“크리스틴.”
“어머니도 결혼하기 전엔 왕궁 시녀였다면서요.”
마조람 후작 부인은 오르테가 사교계를 이끄는 3명의 거두 중 하나로, 지금까지 남편과는 다른 독립적인 권력을 형성해 활동해 왔다.
친제국파를 대표하는 후작과 1왕자의 후견인이나 다를 바 없는 후작 부인. 보통 부부가 둘 다 권력을 탐하면 가정이 평화롭기 힘든데, 특이하게도 그들은 각자의 외부 활동을 존중하면서 사이가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왕자 전하께 꼭 전해 주게.”
얼마 후 마조람 후작 부인이 왕자궁의 문턱을 넘었다.
크리스틴이 직접 찾아오고 궁내부 관리를 움직이기까지 했지만 율리아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은 후작 부인은 완전히 다른 방법을 썼다.
왕비를 움직인 것이다.
후작 부인은 충성스러운 1왕자파였기에, 왕비는 그녀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다정한 왕비 전하께서 레위시아 왕자님의 안부를 물으셨지. 돌아가서 왕자궁의 분위기는 몹시 평온하며, 시녀들은 상냥했다고 말씀드리겠네.”
율리아는 응접실 문밖에서 후작 부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코코가 뭐라고 대답한 것 같긴 한데, 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후작 부인이 정중히 부탁했다.
“그럼 가서 내 아이를 좀 불러 주겠나?”
내 아이라니. 율리아의 입에서 갈라진 웃음이 터졌다. 저건 후작 부인이 아랫사람들 앞에서 율리아에게 친근함을 드러내고 싶을 때 애용하는 표현이었다.
처음엔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귀한 후작 부인께서 평민 계집을 자식처럼 생각할 리는 없으니.
코코가 문밖으로 나와 율리아에게 눈짓했다.
“들어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자꾸.”
코코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작은 얼굴이 도자기처럼 희었다. 코코는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아.”
그래서 그녀의 다음 말이 마음에 바로 와 닿지 않았다.
“예의 바르게 두들겨 패고 와.”
후작 부인은 우아한 자세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율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쪽을 바라보며 다정히 미소 짓기도 했다.
“오랜만이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후작 부인이 율리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살짝 포옹했다. 손이 닿았지만, 가슴이나 뺨은 닿지 않는 포옹이었다.
율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의자로부터 사선으로 떨어진 애매한 위치에 섰다.
“그렇게 거리 두지 않아도 돼. 왕궁 시녀가 됐다고 해서 우리와 모르는 사이가 된 건 아니잖니.”
“부인께서 왜 찾아오셨는지 알아요.”
“일단 앉으렴.”
후작 부인이 의자를 권했다. 율리아는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크리스틴이 널 많이 그리워해.”
후작 부인은 웃고 있었다. 얼굴 위에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미소였다.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미워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가엾은 율리아, 혹시 내가 없을 때 남편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거니?”
후작 부인이 하이에나에 대해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우아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율리아를 가지고 놀려는 것이다.
“왕궁엔 왜 들어온 거야?”
율리아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이에나에 대해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후작 부인은 차분하고 다정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그녀의 편임이 확실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친절이었다.
고민을 마친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 자신을 지키면서 도련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야 했으니까요. 후작님은 저를 강제로 후작가의 일꾼과 결혼시키려고 하셨지만…….”
“결혼이라고? 넌 결혼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데. 율리아, 네가…… 올해 스물한 살이었나?”
후작 부인이 호호 웃으며 물었다. 율리아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충격적이던 사건이 그녀에게는 한낱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율리아, 바실리도 너와 마찬가지야. 아직 어리단다. 너는 또래보다 조숙한 편이고, 바실리는 귀하게 자라다 보니 정신 연령이 어리잖아.”
율리아는 후작 부인의 말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긍정해도, 부정해도 전부 기분 나쁠 것이기 때문에. 자식을 흉볼 수 있는 건 부모만의 특권이 아닌가.
“내 아들이 낭만적인 첫사랑을 한 건 어미로서 기분 좋은 일이긴 한데, 너한테 부담이 컸겠구나. 두 사람은 이제 헤어졌으니까,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와. 네게 미안한 만큼 해 주고 싶은 게 많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