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구스타브와 알렉사는 가만히 서서 상대의 자세와 호흡, 간격을 살폈다. 그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스타브는 정석적인 기사의 검술을, 알렉사는 왕실 기사단장조차 처음 보는 신기한 검술을 사용했다.
“도대체 저 아이는…….”
기사단장의 입에서 의문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알렉사의 움직임은 검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조차 넋을 잃을 만큼 빠르고 아름다웠다.
검의 활로는 변칙적이고, 걸음은 춤추듯 가벼웠다. 늘 나른하게 반쯤 내리뜨고 있던 눈에서 찌르는 것 같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공주님,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굽니까?”
왕실 기사단장이 샤트린에게 다가와 물었다.
공주는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결투를 시작할 때 자신에게는 허락을 구하지 않은 그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알렉사를 상대하고 있는 구스타브였다.
그는 왕실 기사단에서도 특출한 실력자였고,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1왕자의 호위가 되었다.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 있었다. 이 명예 결투라는 것도 적당히 왕자의 비위만 맞춰 주면 되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딴생각에 빠진 구스타브에게 알렉사가 속삭였다.
“기사님,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십시오.”
연무장에서 오직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울컥 화가 난 구스타브가 검 끝으로 그녀의 가슴 보호구를 찌를 듯 파고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구스타브 경!”
놀란 기사단장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알렉사의 보호구는 멀쩡했다. 애초에 칼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연하게 몸을 틀어 구스타브의 공격을 피했고, 엄청난 속도로 반격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구스타브가 검을 놓쳤다. 그가 짧은 비명을 삼키고 손목을 붙잡았다.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기사가…… 검을 놓쳤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검술에 대해 문외한인 자들은 알렉사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였고, 구스타브가 검을 놓쳤다는 사실만 알았다.
연무장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른 검이 알렉사의 발치에서 멈췄다.
그녀의 승리였다.
샤트린의 대전사가 1왕자의 호위 기사를 결투에서 꺾어, 공주가 이번 경연의 승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난 사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아니거든. 너한테 뭐든 들어주겠다고 말했을 때도 사실은 비싼 보석이나 한 움큼 쥐여 주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고.”
샤트린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경연이 끝나 자신의 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기분이 너무 좋아. 할 수만 있다면 오빠의 그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두고두고 보고 싶어.”
레위시아가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샤트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렉사에게 말했다.
“내 호위 기사가 될래? 네 가문을 복원하고, 작위 계승까지 전부 처리해 주지. 넉넉한 봉급에 근사한 집도 사 줄 수 있어.”
샤트린의 시녀들은 물론이거니와 코코와 율리아도 놀란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파격적이다 못해 대담한 제안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알렉사에겐 두 번 고민할 필요 없이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렉사가 샤트린의 제안을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뭐? 왜 죄송해?”
“제 소원은 가문을 복원하는 것도 아니고, 작위를 계승하는 것도 아닙니다. 공주 전하의 호위 기사가 되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뭐? 그럼 뭔데.”
“제 소원은…….”
알렉사가 고개를 돌려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곧은 시선이었다.
“왕자궁에 남는 것입니다.”
* * *
율리아가 물었다.
“왜 그런 소원을 빌었어요?”
율리아는 알렉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이번엔 스스로 시녀가 되어 왕자궁에 들어오겠다는 그녀의 선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호위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알렉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대리석처럼 깨끗한 그녀의 눈동자에 아지랑이 같은 온기가 일렁였다.
율리아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웃었다.
“귀족이 평민의 호위 기사가 될 수는 없어요.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크게 비웃거나, 혹은 당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거예요.”
“제가 손가락질당하는 건 괜찮은데, 당신이 곤란해질까 봐 참았습니다.”
“알렉사.”
“왕족의 시녀가 되는 건 명예로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분명 가문의 영광이라며 기뻐하셨을 거고요. 율리아, 저는 이대로 괜찮습니다.”
알렉사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잠시 말문이 막힌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궁은 제약이 많은 곳이에요. 시녀도 마찬가지고요.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왜 하필이면…….”
“율리아는 영원히 왕궁 시녀로 살 생각입니까?”
“아뇨.”
“그럼 언제까지?”
“글쎄요. 원하는 걸 쟁취하고 나면 사라지겠죠.”
“그럼 저도 그때까지만 여기 있겠습니다.”
더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알렉사는 고집이 아주 세고, 벽창호 같은 구석이 있었다.
“왕궁에서 나가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말해요. 왕자 전하께는 제가 잘 말할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알렉사가 웃었다.
율리아는 그녀의 미소가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순수해서 바라보는 상대방을 죄책감에 젖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