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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4/319)

51화

“약속?”

코코가 콧잔등을 확 찌푸렸다.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말투가 뾰족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멍청이가! 너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 그런 건 미리 알려 줬어야지. 레위시아 님한테도 말해 놨고, 하녀들이 음식이랑 다 장만했을 텐데…… 어휴!”

“죄송해요.”

“됐어. 내일 해.”

코코는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오늘 차려진 건 그냥 간식으로 즐기고 파티는 내일 하면 된다면서.

하지만 율리아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왕자 전하께 죄송해서 안 돼요. 하녀들도 고생했는데, 저 때문에 두 번이나 일을 시킬 수는 없어요. 늦게라도 동참할 테니 먼저 즐기고 있어요.”

“시끄러워. 넌 왜 그렇게 매번 말이 많은 거니? 그냥 그 약속 취소해.”

“중요한 약속이에요.”

율리아는 양보하지 않았다. 코코도 율리아가 양보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너 진짜…….”

코코의 눈썹이 계단처럼 층을 그렸다. 율리아는 그 화난 얼굴조차 어여쁘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렉사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율리아를 응시했다.

한껏 짜증을 내던 코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들어와.”

“그럴게요.”

“그 중요하다는 약속이 뭔지는 몰라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다음에 만나자고 해. 오래 기다리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명심할게요.”

왕자 궁을 벗어난 율리아는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부둣가로 나왔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치고는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마부에게 부둣가 앞에 내려 달라고 말한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더니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율리아가 걸음을 멈춘 건 긴 부두를 지나고 나서야 등장한 하얀 모래사장이었다.

짠 내음과 함께 거친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모자를 벗자 소금기 묻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흔들었다.

율리아는 모래사장 위에 서서 새카만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삶, 알렉사는 율리아를 구하고 바다 위에서 죽었다. 그때 알렉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적선에서 탈출한 율리아가 발을 디뎠던 곳이 이 해변이었다.

기절할 듯 아픈 몸을 억지로 움직여 알렉사가 놓지 말라고 당부했던 노를 끌어안고 억지로 저었다. 태풍은 잦아들지 않았다. 울고 원망하고, 저주하다가 보니 어느새 이곳이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여기 올 수 있게 됐네요.”

그런데 다시 만난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다니.

약속은 지켰다. 죽은 알렉사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녀 덕에 살아남았던 율리아가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세 번째 경연이 펼쳐지는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율리아는 자신의 치장은 뒤로 미루고 알렉사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알렉사는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었지만, 기사들이 사용하는 약식 갑옷과 검을 빌렸다. 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고 검을 든 그녀는 굉장히 근사했다.

큰 키와 긴 팔다리, 나른하고 게슴츠레해 보였던 눈매는 언뜻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네.”

코코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레위시아가 한탄하며 말을 보탰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멋지잖아. 왕궁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마음은 다 내가 가져야 하는데…… 경쟁자가 생겼다고.”

“뭐요? 하녀들이 뭐라고요? 내가 미쳐.”

“다들 나한테 잘해 주잖아.”

“다음 생엔 하인으로 태어나세요. 그래도 잘해 주면 그때 다시 말해요.”

“코코, 좀 착각하게 내버려 둬도 되잖아. 냉정하기는.”

레위시아의 예언은 그들이 샤트린 공주의 궁에 도착했을 때 현실이 되었다.

“누구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샤트린을 시작으로, 공주의 시녀들과 공주궁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모두 홀린 듯이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레위시아와 나란히 서도 작지 않은 키에 반듯한 어깨, 무심해 보이는 눈빛은 마치 전설 속 승리의 여신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남부 사람 특유의 짙은 피부와 흰 머리카락까지, 그녀에겐 한순간에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샤트린이 다시 물었다.

“레위시아, 얘 누구냐니까?”

“오늘 샤트린 네 대전사로 명예 결투에 출전할, 콴 가문의 알렉사.”

레위시아가 경쾌하게 말했다.

세 번째 경연은 오르테가 왕실 기사단의 연무장에서 치러졌다.

결과가 예정된 경연이라 모인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크리스틴 마조람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는 바실리가 실종된 일이 크리스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판단했다. 결투는 오직 대전사의 실력에 의해 좌우되니, 1왕자에게 크리스틴이 필요할 일도 없었다.

“경연을 시작합니다.”

이번 경연을 진행하는 사람은 국왕의 보좌관이었고, 감독하는 사람은 왕실 기사단장이었다.

두 사람 다 무료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승패가 정해진 시합, 적당히 꾸민 말로 1왕자의 체면만 세워 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렇게 되나 보자.

율리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렉사는 긴장하지 않았다. 나른해 보이는 눈매 덕에 언뜻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갑옷을 입은 젊은 여자라니.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짙은 호기심이 묻어났다.

국왕의 보좌관도, 기사단장도, 심지어는 1왕자 쪽의 사람들도 모두 알렉사를 힐긋거렸다. 귀족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샤트린은 이미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알렉사에게 다가와 저들 들으란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

“알렉사, 몇 살부터 검을 잡았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결투에서 져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좋아. 이 경연에서 우승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오르테가의 하나뿐인 공주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뭐든지 말입니까?”

알렉사가 진짜냐고 되물었다.

건방진 태도였지만 샤트린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잘 물어봤다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래. 뭐든지.”

왕족의 약속이다. 알렉사의 얼굴에 흔적 같은 미소가 스쳤다.

율리아는 알렉사의 소원이 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빚도 다 갚았겠다, 그녀도 이제 당당한 오르테가의 귀족이었다. 공주의 대전사가 되어 명예로운 승리를 거머쥔 뒤에는 돈이 문제가 아니게 될 테니, 귀족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쟤는 소원이 뭘까.”

코코가 속삭이듯 물었다.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작위를 계승하는 거겠죠.”

귀족이란 신분, 작위를 계승하면 부모님이 누렸던 모든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

왕족의 도움이 있다면 복잡한 절차 따위는 모두 생략한 채 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가주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국왕의 보좌관이 연무장 중앙을 가리켰다.

“대전사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1왕자의 대전사는 40대 초반의 남자로, 거인처럼 덩치가 컸다.

그는 자신의 딸만큼 어린 알렉사를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샤트린 공주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승부만 가리면 되는 명예 결투라지만 운이 나쁘면 부상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진짜 재수 없는 경우엔 목숨을 잃기도 했다.

1왕자의 대전사가 웃음기 섞인 얼굴로 알렉사와 마주 보고 섰다. 머리 하나 정도 키 차이가 났지만, 알렉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반쯤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려 상대를 응시했다.

“구스타브다.”

“알렉사입니다.”

인사는 간단했다. 자신의 이름이 중요한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 싸움이 1왕자와 샤트린 공주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것이다.

구스타브는 성의 없는 자세로 검을 꺼내 들었고, 알렉사로부터 한걸음 크게 떨어져 섰다.

“어디서 나타난 애송이인 줄은 모르겠지만, 용기와 만용을 구분해라.”

알렉사가 구스타브의 충고를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그녀가 검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왕실 기사단장이 1왕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샤트린은 기사단장이 자신에게는 허락을 구하지 않아 기분이 나빴지만, 그렇다고 이미 시작된 결투를 중단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레위시아에게 바짝 다가가 보란 듯이 귓속말을 건넸다.

“레위시아, 알렉사가 이기겠지?”

“몰라.”

“왜 몰라? 네가 데려왔잖아.”

“나도 알렉사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 처음 본단 말이야.”

샤트린이 말도 안 된다며 레위시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가 아픈 옆구리를 문지르며 저리 꺼지라고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샤트린은 막무가내로 레위시아의 곁에 붙어서 그를 괴롭혔다.

“왜 몰라? 네가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대전사로 삼았는데, 설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망신 줄 생각은 아니겠지? 레위시아, 우리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했잖아.”

“너 혼자 약속했지.”

“레위시아!”

그때 갑작스럽게 결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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